책 속에 밑줄이 많으면 뿌듯한 이유
모처럼 해외여행을 떠난 친구의 인스타그램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시시각각 업로드된다. 아무렴, 여행에서 남는 건 역시 사진뿐이야. 사진이 꽤 많은 걸 보니 추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좋은 여행이라는 뜻이겠지? 친구 덕분에 나도 이국의 풍경을 구경하는 호사를 누려본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친구는 이따금 이 사진들을 보며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추억들을 떠올릴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다. 여행 중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면 사진으로 남기듯이, 책을 읽다가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발견하면 ‘밑줄’을 긋는다. 오래전부터 그 문장 하나가 나를 기다렸다는 느낌이 들면서 전율이 돋는다. 그 감흥을 기억하기 위해 밑줄을 긋는다. 밑줄이 많다는 건 그만큼 반짝이는 순간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모두가 함께 읽는 공용 도서거나 남에게서 빌려 온 책일 때, 필기구를 찾느라 독서의 흐름이 끊기는 게 싫을 때는 밑줄 대신 붙였다가 떼기 쉬운 인덱스 스티커로 표시하기도 한다. 책장 사이사이에 꽂힌 인덱스 스티커는 마치 보물이 묻힌 곳을 표시해 둔 깃발과도 같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부자가 된듯한 기분이 든다.
밑줄을 치고, 인덱스 스티커로 표시해 둔 문장들은 노트에 옮겨 적으며 한 번 더 음미한다. 그렇게 쌓인 필사 노트는 나의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나중에 다시 펼쳐보면, 그 당시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문장들을 마주했는지 떠오른다.
독서를 할 때 읽었던 부분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렇게 기억력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세세한 부분까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잘못된 독서를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실망스러웠던 적도 있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전부 줄줄 꿰고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독서는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내가 밑줄치고 간직하고 싶었던 단 한 문장이라도 있다면, 그 문장이 계속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면 책 전체를 아는 것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마녀의 서랍_다섯 번째 칸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에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서 단골 책방에 갔다. 이곳에서는 표지를 가려놓은 블라인드 북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호기심에 한 권 샀다가 안희연 시인의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이라는 에세이를 뜻밖에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책들을 읽느라 살짝 미루다가 눈이 많이 오는 날에 처음 펼쳐보았다. 흰 눈밭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심정으로.
이 책을 읽는 동안 얼굴에 진실의 미간이 여러 번 떠올랐다. 시인의 감수성과 문장이 나에게 맑고 단단한 보석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것이 마음의 수면을 뚫고서 '꼬르륵' 내면 깊숙이 가라앉았다. 이토록 섬세한 심상을 독자의 가슴에 확실하게 전달하는 문장력에 감탄했다.
사실 근사한 문장을 만나면 가차 없이 밑줄을 긋는 편이지만, 가끔 밑줄마저 성가실 만큼 문장에 푹 빠질 때도 있다. 밑줄을 그은 문장은 눈밭의 발자국처럼 길을 만들어 다음에도 나를 그리로 인도하지만, 일부러 발자국을 지우며 읽는 문장도 있다. 다음에 다시 책을 펼쳤을 때 처음 가는 길처럼 새로워지도록. 이 책에 실린 산문들이 그랬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가 열광했던 문장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충만한 감성만이 남았다. 하얀 눈밭에 내가 걸었던 흔적은 사라졌지만, 눈을 밟을 때의 기분 좋은 감촉만이 또렷하게 남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