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부상족이 된 이유
내 인생의 첫 가방은 초등학교-물론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긴 했지만-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사준 빨간색 책가방이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만화캐릭터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고, 금속 잠금장치와 튼튼한 손잡이가 달린 그 가방을 받고서 입학 전날까지 설렜던 기억이 난다. 이제 막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딛게 된 아이에게 가방은 미지의 모험을 함께 할 든든한 벗처럼 느껴졌다. 집에서 늘 나를 챙겨주던 부모님이 학교까지 따라올 수는 없으니, 그때부터 나 자신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교과서, 공책, 필통, 준비물 등 학교에 있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이 담긴 가방은 그래서 더 소중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거치는 동안 내 가방은 거의 내내 무거웠다. 일찌감치 ‘혹시 몰라’ 병에 걸려서 그랬는지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혹시 필요해질 물건들을 가방에 가득 쟁여놓고 다녔다. 물론 혹시 몰라 챙긴 물건들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무심코 가방에서 빼놓고 나온 물건이 꼭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가방 때문에 어깨는 빠질 것 같아도 마음 편한 쪽을 선택하자 생각했다.
나처럼 이런저런 물건들을 과하게 휴대하는 사람들을 어느 날부터 ‘보부상족'이라고 불렀다.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보부상’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독서 생활자의 가방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가방 안에 책 한두 권은 필수! 틈틈이 가볍게 읽기 좋은 한 권과 긴 시간 집중해서 읽을 수 있는 한 권을 챙겨서 상황에 따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잠깐 기다릴 때는 중간에 읽다 말아도 크게 부담이 없는 에세이가 좋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때에는 긴 호흡으로 읽는 소설이나 인문학 서적이 좋다. 때에 따라 휴대용 북스탠드를 챙기기도 한다. 어디서든 양손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편하고, 책을 펼쳐 놓고 필사할 때도 요긴해서 없으면 허전하다.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위한 필기구도 종류별, 색깔별, 심지어 굵기별로 지니고 다닌다. 눈에 들어온 책의 문구나 쓰고 싶은 글의 온도, 결, 감성에 따라 사용하고 싶은 펜도 그때그때 다르다. 필사와 메모를 위한 노트도 용도별로 준비되어 있다. 일상 기록을 위한 다이어리, 좋아하는 문구만 모으는 수첩, 그냥 낙서용 메모장 등 서로 다른 결의 텍스트들이 노트 한 권에 뒤섞이는 게 싫어서 여러 권 들고 다닌다. (그저 좋아하는 노트를 새로 사기 위한 합리화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독서용품 외에도 노트북이나 개인용품들도 같이 챙겨야 해서 나의 가방 속은 언제나 만원 버스처럼 붐빈다. 딱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물건들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다니는 모습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방 속에 담긴 물건들은 낯선 환경 또는 불안한 일상의 한 부분에서 익숙한 편안함을 제공한다. 힘들고 지칠 때 언제 어디서든 내가 좋아하는 책의 세계에 숨어들 수 있는 것도 빵빵한 가방 덕분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꺼이 보부상족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녀의 서랍_여섯 번째 칸
돌잔치 때 연필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내가 공부를 무척 잘할 것으로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 기대에 완전히 부응하진 못했다. 어쩌면 아기였던 나는 연필이라는 물성에 매료되었던 건 아닐까? 지금도 필기구 욕심이 상당한 걸 보면 말이다.
필기구뿐만이 아니라 문구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편이다. 다양한 문구용품이 즐비한 공간에 들어서면 동공이 확장되고, 발걸음은 바빠진다. 특히 노트와 필기구라면 틀림없이 충동구매를 하고 만다. 필통 안에는 연필, 볼펜, 색연필, 만년필까지 여러 가지 필기구가 가득 차 있고, 가방 안에는 용도별 수첩이 몇 개씩 묵직하게 들어있는데도 다시 지갑을 열게 하는 것. 그것이 나와 문구의 관계이다. (도대체 문구에 대한 이 맹목적인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문구의 모험’이라는 책을 만났을 때의 내 기분이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 책에는 클립, 볼펜, 수첩, 지우개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하고 있는 문구에 대한 역사가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연필 한 자루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기까지 그 안에 엄청난 고민과 노력, 수많은 사연이 녹아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그냥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연필이나 펜을 그저 무심히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어떤 물건 하나가 생활의 형태를 바꾸고, 그 바뀐 생활의 형태가 또 다른 문화를 만드는 과정들도 엿볼 수 있는데 사람과 사물이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각각의 사물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주위에 쓸모없는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어제와 똑같다고 여겼던 나의 자리, 나의 시간은 그렇게 의미 가득한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