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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다 가다 보다 유라시아

탐험가 김현국의 유라시아 마실 가기 -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주제강연 원고

by 김현국 Oct 22. 2024


우리 아이들이

아빠 차를 타고 함께

바이칼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오고

우리의 청년들이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발트해에서 윈드 서핑을 하고

우리의 어른들이

자신의 차로

유라시아 대륙의 북극권에서

오로라를 보고 오는 일,

생각만 해도 시원하지 않습니까!

탐험가김현국-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청년문화포럼 주제강연

https://youtu.be/SoNK8RjGnk8?si=MelheFIR7SCiZ92_

만나다 가다 버다 유라시아(탐험가 김현국) - 문화체육괸굉부 초청강연 영상


안녕하세요.  

탐험가 김현국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탐험가로서 제가 하고 있는 일은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연결된 길에 대한 자료를 반복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보면

서울에서 출발해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유라시아와 29년째 인연을 맺어오고 있고 1996년, 2001년, 2014년, 2017년, 2019년, 2023년 모두 여섯 차례 대륙횡단을 마쳤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지금 당장, 우리 일상에서의 이동 수단을 사용해서 한반도로부터 확장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Km 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유라시아 대륙 14,000km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유라시아 마실가기이지요.


우리 아이들이

아빠 차를 타고 함께

바이칼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오고


우리의 청년들이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발트해에서 윈드서핑을 타고

우리의 어른들이

자신의 차로

유라시아의 북극권에서

오로라를 보고 오는 일,

생각만해도 시원하지 않습니까!

**

지금부터는 제가 이러한 일을 하게 된 계기와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1987년 민주화의 봄- 자신감과 실망감


‘1987’,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으신가요!

예, 영화 ‘1987’이 있네요. 저에게 ‘1987’은 대학에 입학했던 해입니다. 역사에서는 6.10민주항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공부보다 시위 현장에 많이 있었던 저는 민주화의 봄이 이루어지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무엇인가를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해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야당 지도자들의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실패하게 되었지요. 저도 너무나 실망을 했습니다.


2.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여행을 통해 나와 세계를 만나다


1988년, 군에 입대했죠. 그리고 여전히 쫄병이었던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습니다. 침상에서 바닥을 닦고 있는데 고참들이 보고 있던 TV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저는 ‘그래 바로 이거다! 지구 끝까지 가보자’라고 마음먹었습니다.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이번에는 여행을 통해 풀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3. 1990년 제대, 여행의 시작- 탐험가의 첫 여행이 일본!


1990년, 제대하자마자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으로 갔습니다. 탐험가의 첫 여행이 일본, 좀 그런가요?. 1990년은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지 1년이 넘었을 뿐이었습니다. 제 주위에서는 아무도 외국에 나가본 사람들이 없었죠. 밖에 나갔다가 어떻게 한국으로 되돌아오느냐가 고민이었어요.

 (현재는 스마트 폰을 통해 실시간에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이자 세계화 시대로 우리는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다니는 3,200만 해외여행자를 가지고 있죠.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리가 가까웠던 일본에서는 헤엄이라도 쳐서 돌아올 수 있겠다는 패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여행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배우고서 인도로 향했습니다.

4. 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인도- 익숙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다

1991년, 인도로 향했습니다. 당시 인도는 저에게서 집으로부터 가장 먼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거리의 멈을 의미하지는 않고요, 익숙함 즉 학연과 지연, 혈연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킴을 의미합니다.

인도대륙의 서쪽에 있는 봄베이, 지금은 뭄바이라고 부르죠. 뭄바이에서 동북방향으로 이동을 해서 네팔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도시 고락푸르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출입국심사가 이루어지는 소나우리라는 마을로 이동을 했고 이곳에서 국경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출입국 심사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단지 대나무 하나가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국경선은 얕은 하천이었고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습니다. 현지인들은 하천을 건널 수 있게 만들어진 다리 위를 자류롭게 오가고 있더군요.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저에게서 국경이라는 것은 무장한 군인과 삼엄한 경계를 의미했습니다. 또 허락 없이 국경을 넘게 되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총에 맞아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살벌한 곳이었죠. 결국, 저도 현지들처럼 다리를 건너 비자가 없이 네팔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국경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인도나 네팔에서는 유럽 여행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요. 이들은 인도를 문명세계가 잃어버린 어머니의 정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대화하면서 하나 부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럽에서는 10대 시절부터 여행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럽도 이웃 나라를 서로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잖아요.

 또 국경을 통해 여행이라는 것에 대해 정의를 해보고 한동안 여행지상주의자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여행은 국경 또는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낯선 곳으로의 경계를 넘는 행위잖아요. 국경이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서로 다름’과의 만남을 의미하죠.

 ‘서로 다름’은 세상에서는 불평의 이유가 되고 불평하게 되면 서로 당을 짓거나 결국 원수처럼 되기도 합니다. 남과 북의 분단도, 현재 진행 중인 유라시아 지역에서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서방세계와 러시아의 충돌도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도 모두 ‘서로 다름’이 그 이유인데요.

저는 여행이 분쟁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여행은 국경이나 경계 너머의 ‘서로 다름’과의 만남을 의미한데 서로 다름을 이유로 불평을 하게 되면 여행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잖아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는 여행이 사람을 세련되게 만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도, 네팔 등지에서 3년 시간을 보내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자취방으로 돌아왔죠. 엎드려서 방바닥에 다녔던 지역들을 ‘점’으로 찍고 서로를 연결해보니 ‘선’이 되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저의 이야기들을 지도 위에 올려놓고 한반도까지 오는 길들을 찾아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시베리아가 눈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5. 기회의 땅 러시아, 미지의 세계 시베리아

시베리아하면 어떤 키워드가 떠오르는가요! 춥다! 그렇습니다. 유형지, 동토의 땅이죠. 그리고 저에게는 소련, 사회주의 종주국이었습니다.

1991년 12월 26일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이 해체되었습니다. 소련의 몰락은 서방세계와 같은 발걸음을 걸어왔던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장이자 자원의 보고로서 기회의 땅을 의미했습니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발생한 동란을 계기로 세계는 냉전이 본격화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소련이 무너지기까지 42년이라는 시간 동안 현재의 러시아는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요, 시베리아는 미지의 세계와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기회의 땅 러시아! 미지의 세계 시베리아!

저를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생각하면 행동한다’였죠.

6. 1995년 러시아 극동의 도시 하바롭스크

1995년. 다시 배낭을 꾸리고 러시아 극동의 한 도시인 하바로프스크로 향했습니다. 여름방학 3개월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러시아라는 나라가 정말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7.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1996-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것들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3월 초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번에는 모터바이크와 함께였죠.


1890년, 두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던 러시아의 극작자 안톤 체호프의 이야기가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모터바이크를 현대판 말이라고 부르죠. 저는 모터바이크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러시아에 어떠한 기회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낯선 대륙의 끝없는 길은 셀 수 없이 많은 장애물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대륙횡단에는 성공했지만 저는 다시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여행과 시베리아 횡단을 통해 1만Km 이상으로 시선이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8. 1997년, 소련의 심장, 러시아의 중심 모스크바에서

1997년,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수도에서 직접 기회를 만들어 보자’라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도 유럽처럼 방사선 형태의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크레믈린이 붉은 광장과 함께 있습니다.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10개의 대로가 있었습니다. ‘M’자로 시작되는 길인데요 현재는 12개로 늘어나 있습니다.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소련시절의 영향력 혹은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당시의 제게 ‘모든 길은 모스크바로 통한다’였습니다.

매일 메모하면서 걸어 다니다가 사업 아이템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쌀을 수입해서 일본 쓰시 집에 팔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모스크바 거리 곳곳을 익히게 되었고요.

차를 운전하게 되면서는 열개의 대로를 따라 시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M10, 러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와 모스크바와 우랄산맥을 연결하는 M5, 우랄 그리고 M7, 볼가 연방도로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9. 실크로드와의 만남- 설레임과 안타까움


특히 M5, ‘우랄’ 도로를 따라 우랄산맥을 넘게 되면 1996년에 제가 모터바이크를 타고 달렸던 시베리아가 시작됩니다.


그 아래로는 중앙아시아로 연결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를 오가다가 ‘실크로드’와 만났습니다. 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을 이어주던 고대 교역로입니다. 처음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이 무척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실크로드의 현실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실크로드를 포함하고 있던 중앙아시아는 1991년 12월 소련의 일원으로서 함께 무너졌습니다. 가난은 환경 파괴도 가속화시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10. 디지털 시대의 패러다임- 유목주의

한편 2,000년이 다가오면서 새 천년의 패러다임으로 유목주의(Nomadism)가 떠올랐습니다. 저도 디지털 시대를 공부하게 되었는데요.

 결국,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선이 있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지구에 영향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크로드에 이러한 생각들을 결합해서 ‘N. 실크로드 대장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11. 2001년  N. 실크로드 대장정


(1) 변화에의 도전, N.실크로드 대장정

1999년, N.실크로드 대장정이라는 계획안을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먼저 함께할 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온. 오프라인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모으고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면서 만나게 되는 지구의 환경, 빈곤, 질병 등의 지구촌 과제들을 이슈화하겠다는 내용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3년 째되던 2001년에는 이런 저런 성과와 함께 사전답사까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2) 9.11 사태-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2001년 8월 30일 사전답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12일 뒤에 9.11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3년 동안의 노력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죠.

미국과 아프카니스탄은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20년 동안 전쟁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십년이 넘도록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했습니다.

(3) 어둡고 긴터널에서 기도와 함께 다시 시작하다

2013년, 12월 성탄절 이브 예배를 마치고 숙소로도 사용하던 학교 사무실로 돌아왔고 바닥에 누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N.실크로드와 함께 10년이 넘는 세월이 그냥 사라져버렸다고요.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이젠 내년도 사무실 임대비용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요. 저는 실패했습니다,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한참 뒤 다시 일어셨습니다. 저에게 탐험가라는 명함을 만들어준 시베리아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트랜스 유라시아 시리즈라는 이름의 유라시아 대륙횡단 계획안이 만들어졌습니다.

12. 트랜스 유라시아 시리즈- 유라시아 대륙횡단

2014년 러시아와 한국간의 무비자 협정이 발효가 되엇습니다. 양국 사이를 비자없이 오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01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1만Km 시베리아 횡단 도로가 완공되었습니다. 이 길의 완공으로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의 길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재료를 수입해서 가공한 후 수출하는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다양한 물류루트를 확보하는 것은 마치 생명줄을 잡는 것과도 같습니다.

(1) 트랜스 유라시아 2014- 징기스칸의 속도

2014년, 저는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육로로 되돌아오는 길에는 모터바이크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싣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오는 과정을 자료화 하기도 했습니다.

대장정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전시와 방송을 통해 관련 내용들을 알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2) 트랜스 시베리아 2017- 유라시아 마실 가기

2017년의 대륙횡단에는 유라시아 마실가기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샐러리맨을 기준으로 14일이라는 연차휴가동안 자신의 차량을 가지고 지구의 배꼽, 바이칼 호수에 다녀올 수 있도록 관련 자료들을 만들었습니다.

2018년에는 EBS 세계테마기행에서 섭외가 들어와 아시안 하이웨이 7호선을 배경으로‘아시아의 유목민’이라는 주제로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3) 2019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

2019년, 다시 유라시아 대륙횡단에 도전했습니다.

‘업그레이드 된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 자료화’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10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러시아 연방도로의 완공은 포장도로의 완공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2014년까지만 해도 현지인은 러시아의 길을 사망도로라고 표현했습니다.

20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전 구간의 포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물류회사가 활성화 되기 시작하고 차량 운전자들이 증가하고 도로 관련 인프라 시설들이 대륙의 끝없는 길을 따라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기회는 새로움 속에 들어있습니다.

2019년, 저는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업그레이드 된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를 따라 만들어지는 변화들을 자료화 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2019년 유라시아 대륙횡단 중에는 뉴욕에 있는 더 익스플로러스 클럽(TEC)으로부터 정회원으로 승인 되었습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탐험단체로 남극점의 아문센과 달 착륙의 닐 암스트롱, 에베레스트의 힐러리 등이 멤버로 있었고 현재는 민간 우주인 시대를 열고 있는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등의 영화 등을 통해 해저 탐사에 관한 많은 노하우를 가진 제임스 카메론 감독도 이곳의 멤버입니다.

2022년에는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은 유엔 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에서 주관하고 있는 아시안 하이웨이 프로젝트의 일부분입니다. 이 길은 제가 반복적으로 자료화하고 있는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와 많은 구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 유라시아 문화교류 라는 이름으로 기획 전시와 국제 포럼, 청년 아카데미로 구성된 국비 사업도 대표로서 감당을 했습니다.

(4) 2023년 길은 평화다!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 유라시아 마실 가기

2023년, 여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횡단에 도전했습니다. 뉴욕, The Explorers Club은 국제 기구와 각국 정부, 다국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23년의 유라시아 대륙횡단에는 세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겨울 환경에서 시베리아 횡단 도로를 자료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의  저의 반복된 행위로 인해 모든 환경에서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에 대한 자료가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Km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이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유라시아 대륙 14,000Km로 확장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차를 타고 누구나 그리고 언제든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위해 모터바이크가 아닌 자동차가 이동 수단이 되었고 998cc 캐스퍼 경승용차로 겨울 환경의 시베리아를 횡단했습니다.. 유라시아 마실 가기, 유라시아 대륙횡단에 대한 대중화 선언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유네스코지정 세게자연유산인 바이칼 호수 보존을 위한 활동을 계획했습니다. 여기에는 전쟁 중인 러시아에서 환경 캠페인을 통해 지구의 우선  순위는 전쟁이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연방 정부로부터 초대를 받아 러시아의 탐험가이자 바이칼 자연보호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바실리 수툴라씨와 함께 바이칼 호수 본존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메타버스를 활용한 게임과 증강현실 아바타입니다. 이를 위해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 14,000km를 시각 자료화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길 위에서 만들어진 자료와 이야기들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12. 할 일

2024년. 현재는 고국에서의 새로운 여정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올해의 계획은 누구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거나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메타버스를 활용한 게임과 증강현실 아바타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는 유라시아라는 단어를 특화시킨 여행자 복합공간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13. 결론


(1) 현재는 디지털 기반의 세계화 시대입니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스마트 폰을 휴대하고 국경너머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지구를 캔버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디지털 유목민이라고 합니다.

1996년, 모터바이크를 이동수단으로 시베리아를 단독횡단 한 행위는 최초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유라시아와 29년이라는 시간과 여섯 번의 대륙횡단은 이야기로서의 디테일을 의미합니다.

최초의 기록과 이야기로서의 디테일은 저의 경쟁력이라고 말합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길 위에서 만들어진 저의 이야기들이 세계를 상대로 어떤 확장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다시 도전해보겠습니다.

(2) 두 눈을 가진 삶

실제 시베리아 가보면 타이가라 불리는 침엽수림 지대가 끝도 없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극히 일부분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제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배운 것은 ‘지금 제 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복적으로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외눈박이의 삶이 아닌 두 눈을 가진 삶을 지향해봅니다. 고맙습니다.

메타버스에서 아바타가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소개하는 영상을 보시면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3) 광야에 길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삶

탐험과 여행의 차이에 대해 질문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목적성의 유무라고 말합니다. 여행에서도 목적이 있을 수 있지만 탐험에서는 목적없는 탐험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탐험가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곳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살펴보거나 조사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남과 북이 분단된 환경에서 대륙으로 연결되는 길(한반도로부터 확장된 공간)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있는 일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소외 되어 왔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탐험가라는 직업은 정식 직업군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행위는 춥고 배고픔을 의미합니다.

이런 중에 누군가 손을 내밀어준 사람들은 잊기 힘듭니다.

특히, 대륙은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도움을 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도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여행자가 될 수 있기에 대륙에서 여행자를 돕는 일은 불문율과도 같습니다 (신명기 10장 18절 말씀과 나그네에게 숙식을 제공하라는 칭기스칸의 말).


대륙횡단 중에 매일 아침 어디선가 다가와 우다치 (행운을 빈다!)라는 말로 저의 하루의 시작을 축복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집 안방을 내어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넉넉하지 않은 환경이었다는 것을 알면 그 기억은 더 선명해집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많은 구간은 시베리아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혹독한 기후로도 알려져 있지만 시베리아는 오지와 가난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을에 들어오는 교통 노선도 없습니다. 어떤 일로 도시에 나가야 할 때면 사람들은 감자 부대를 지고 차들이 다니는 큰길까지 걸어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태워다 줄 차를 만나기까지 무작정 길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일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중에 7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후줄그레한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었는데 축 쳐진 어깨를 보니 어떤 연민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2023년, 저의 여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횡단에서는 겨울 환경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도로를 자료화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반복된 행위로 인해 모든 환경에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도로에 대한 자료가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유라시아 마실가기지요.

이를 위해 오토바이가 아닌 자동차를 또 누구나 자신의 차량으로 대륙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998cc 경승용차를 이동수단으로 선택했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목표를 모두 이룬 것에 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2023년의 여정에서 가장 큰 기쁨은 길을 걸어가는 시베리아 사람들을 저의 자동차로 그들의 필요만큼 태워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맙습니다.(20분짜리 강연 원고)

탐험가김현국-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청년문화포럼 주제강연

                                      두번째(1시간 10분짜리 강연 원고)


시베리아, 하면 어떤 키워드가 떠오르신가요!

춥다! 그렇습니다. 유형지, 동토의 땅 그리고 저에게는 소련, 사회주의 종주국이었죠.12월 26일 냉전의 한축이었던 소련이 해체되었습니다. 소련의 몰락은 서방세계와 같은 발걸음을 걸어왔던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장이자 자원의 보고로서 기회의 땅을 의미했습니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한국에서 발생한 동란을 계기로 세계는 냉전이 본격화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로 인해 소련이 무너지기까지 42년이라는 시간 동안 현재의 러시아는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요 시베리아는 미지의 세계와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기회의 땅 러시아, 미지의 세계 시베리아! 저를 잡아당기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생각하면 행동한다였죠. 1995년,다시 배낭을 꾸렸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주제가 있는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려인의 이주경로”였죠.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지방에서 러시아 지방을 취급하는 여행사가 없어서 서울을 여러 번 올라 다닌 다음에야 비자를 만들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러시아의 비자는 조그마한 종이 안의 조그마한 공간에 제가 방문하고 싶은 지역을 모두 써넣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러시아의 도시들에 대해 알지도 못했지만 이름도 길어서 어렵더군요. 하바롭스크 공항이 눈에 들어오면서 걱정이 좀 되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나 있다고 배웠거든요. 또는 아주 욕심이 많은 동물 이미지였고요. 우중충한 회색빛 건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별이 붙어있는 모자를 쓴 출입구관계자들의 무뚝뚝한 표정이 무섭게 느껴지더군요. 뒤를 돌아보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일주일 뒤에 있었죠. 심사를 마치고 공항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저에게 몰려오더군요. 민소매 차림의 상의에 운동복 바지, 낡은 신발 그리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 더부룩한 수염.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다는 이미지가 무서운 사람들처럼 보이게 하더군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알료나라는 이름을 가지 젊은 여성청년을 보게 되었어요. 하바롭스크 사범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공항에 배웅을 나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해 시내로 나가게 되었죠. 그리고 그녀를 통해 보다 저렴한 숙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특징 중의 하나가 간판이 없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어디에 식료품 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또 버려진 아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사람들은 위협한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요. 알료나가 매일같이 숙소로 찾아주어 저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정도 적응하고서 시내로 나가게 되었지요. 시내에서 북한 선교를 위해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재미교포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운영하고 있다는 신학교로 숙소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러시아 학생들과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비딸리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과 가깝게 어울렸는데요.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나오는 유대인을 러시아에서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러시아는 180개 이상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입니다. (러시아는 현재 89개 연방 주체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하바롭스크 지방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 유대인 자치주였던 것입니다. 그는 유소년 시절 하바롭스크 탁구 챔피언을 지냈던 스포츠맨이기도 했습니다. 성격이 밝고 적극적인 청년이었는데 함께 어울려 다니곤 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시절의 음악을 구하러 레코드 가게에 나갔다가 디마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건축을 전공했지만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초등학교에서 종이접기 선생님, 하바롭스크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디제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형적인 중산층 출신의 지식인이었는데 재능이 많았습니다.( 세계의 종교들이 러시아로 몰려들어오던 그때, 인도 밀교를 믿고 있었던 디마..,)

 하지만 불평도 많았는데요. 그것은 나라가 망해서 자신과 같은 청년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저는 자신의 나라로 여행온 부유한 나라의 외국 젊은이였으니까요.

저는 제가 사는 곳도 비슷하다. 나도 이 여행을 위해 한 달 동안 노동 일을 통해 경비를 만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료나의 어머니가 고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아버지는 코카서스 출신의 러시아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집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국말을 잘하시더군요. 그는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이었습니다 사할린 출신의 고려인은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러시아에 끌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 출신의 고려인은 조선시대 말에 먹고살기가 어려워 자발적으로 연해주로 옮겨간 사람들이었죠. 이들은 현지화가 되어 한국말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알료나의 할아버지를 통해 고려인의 이주 경로에 대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할 시간이 다가왔고 선교사님과 이야기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시더군요. 러시아는 정말 기회의 땅이다라고요. 다시 강조하시면서 러시아는 20세기 마지막 서부 개척지라며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곳에서 도전하고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야 나라가 강해진다고도 말씀하셨고요. 저는 마치 그분의 말씀이 제 삶의 소명처럼 느껴졌습니다. 더군다나 잠잘 곳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였으니까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강하게 원하면 우주의 기운이 함께한다).

 귀국을 했고 함께할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1개의 시차와 180개 이상으로 이루어진 대륙인데 또 대체 어디에 깃발을 꽂을 것인지 혼자서는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여러분도 막막할 때면 친구를 찾잖아요 (웃음). 그러나 친구들은 하나같이 거기는 사회주의 종주국이잖아! 가면 아오지 탄광 아니, 강제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 고 고개를 돌렸죠. 어떤 이는 제가 먼저 들어가서 충분히 자리 잡고서 자신을 초대해 달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죠.

 모두가 부정을 하니까까 이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남들처럼 취직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때가 대학교 4학년 2학기였습니다.

 동시에, 1890년 두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한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안톤 체호프의 여행을 통해 지식인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 그의 글 속에서 시베리아라는 대자연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의 여정의 목적지는 사할린 섬이었는데요.

 어느 날, 그는 모스크바에서 1만 km 떨어져 있는 사할린 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인에게 시베리아는 유형지였는데요. 사할린 섬은 모스크바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중의 하나로 더욱 열악한 환경을 의미했습니다. 이곳에서 죄수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직접 사할린 섬에 가서 확인해 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알리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할린 섬에 가기 위해서는 시베리아를 지나야 했고 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영하 40도는 추위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 여름 철에는 얼어있던 강들이 녹으면서 홍수가 발생하고 저지대로 물이 흘러들어 질퍽거리는 진흙땅이었습니다. 습지에는 벌레가 많지요. 또한 400km는 거리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죠.

 이 때문에 아무도 시베리아에 가지 않으려 했고 어떤 이유로 시베리아 유형이 확정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1890년 당시 안톤 체호프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는 이미 모스크바 사회에서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공했다는 것은 현실에 안주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사할린섬에 가게 됩니다.

그의 여정을 통해 지식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의 글에서 시베리아 대자연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요. (그의 여정의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사할린섬’이라는 책은 보고서였기 때문에 여행기의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만.) 시베리아라는 대자연에 대해 숲 속의 적막감과 이른 아침 새소리로 표현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 시베리아는 타이가라 불리는 침엽수림지대가 바다처럼 펼쳐지는데요 우리 눈으로는 아주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짧은 글에서 저는 시베리아라는 대자연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광활한 평원, 거대한 숲 그리고 자작나무,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펴고 밀크 커피 한잔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무도 나와 함께하려는 사람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후문에서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 기다리다가 옆에 있던 버스 토큰 매표소에서 동전으로 긁는 즉석복권 한 장을 샀죠. 긁어보니 100만 원이라는 숫자가 나란히 쓰여있었습니다. 은행에 가져갔더니 백만 원에 당첨되었다고 직원이 놀라더군요. 10년 넘게 근무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요. 그 당시에도 1,000만 원, 1억 당첨금이 있어서 100만 원은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는 것을 보고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정말 어려운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27프로 넘는 세금을 떼고 받은 돈으로 모터바이크를 사러 달려갔죠. 학교 부근에 있던 가게 아저씨는 저에게 호감을 보이더군요. 저는 인도 여행 이후부터 전공 공부를 내려놓다시피 하고 여행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문화 예술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습니다. 제 차림이 히피 같다고 주위에서 평하곤 했죠. 바이크 가게 아저씨는 제게 자유인 같다며 모터바이크를 타고 세계 여행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저는 바이크 가격 딜을 생각하며 별생각 없이 그러고 싶다고 말했죠.

그리고 수업을 받으러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전공 교수님과 마주쳤고 교수님은 김 군, 이 번에는 어디 다녀왔나!라고 물었고 저는 러시아 극동에 다녀왔습니다라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평소에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저에게 물어보고서 제가 대답할 때면 시선을 돌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할 것이지 웬 여행이냐고 걱정하시는 것이었지만 그때 저는 그분의 마음을 모르고 서운하게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다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다음 계획은 이라고요. 그 순간 모터바이크 가게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고 체호프를 마차에 태우고 시베리아를 달렸던 말이 모터바이크로 바꾸어져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모터바이크는 현대판 말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렇게 조합이 되었죠. 예, 모터바이크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려고 합니다!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교수님은 수업 끝나고 연구실로 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기획안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지요. 제가 좋아했던 교수님께 찾아갔습니다. 기획안이 뭡니까?라고 물어봤습니다. 교수님이 가까이 와보라고 하시더니 조용히 어디 가서 대학에 다녔다고 말하지 마라(웃음)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네 생각을 육하원칙대로 써보는 거야!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대륙원정이라는 제목의 기획안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때의 기획안 만드는 경험이 지금까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며칠 뒤에 국내 대기업 본사에 도착해 있었지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데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부사장님과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요. 아무 사이도 아니다는 말을 반복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혼잣말로 보통 대기업에는 외부에서 제안해 오는 사업기획안인 하루에 수백 개 정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부분은 보지도 않고 쓰레기 통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어떻게 이런 아마추어 기획안이 여기까지 도착했냐는 것을 궁금해하는 것이었지요.

저도 신기했습니다. 기획안은 학교에서 시민단체로 시민단체에서 언론사로 언론사에서 기업으로 연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제가 직접 뛰어다니기도 했었는데요. 매일같이 언론사로 출근하다시피 해서 인사드렸고 편집국장님이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모터바이크 회사를 연결해 주었고 항공기 회사를 연결해 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모터바이크와 모터바이크 운송 및 왕복 항공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눈떠보니 스타? 아니, 시베리아!

모터바이크 타고 시베리아 횡단 여행 1996


1996년,

대학을 졸업하고 3월 초,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두 대의 모터바이크는 이미 현지에 도착해 있었죠. 모터바이크를 받는 것이 어려웠지 한 대냐 두 대냐는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터바이크 회사와 만나면서 1년 전에 만났던 디마를 생각했죠. 나라가 망했고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어떠한 선택의 기회도 없다!라는 그의 말이 맴돌았습니다. 그와 함께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어떤 기회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100개의 경험, 99개의 부작용

하바롭스크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디마와 함께 세관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관에서 첫날 디마는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러시아어를 모르는 저는 왜 그런가 하고만 생각했죠. 나와서 듣고 보니 이러했습니다.

모터바이크나 차량을 외국으로 가지고 나가기 위해서는 일시 수출입 증명서라는 서류가 필요한데 서류에는 제 이름으로 두 대의 모터바이크가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러시아 세관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모터바이크를 팔려고 왔나 보다라고요.

그렇다면 세금을 먹여야 하는데 외국인이 팔려고 가져온 모터바이크를 어떻게 봐야 할까 하고 담당자는 고민을 했고 다음과 같이 결정을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1996년도 당시에도 여러 면에서 여전히 사회주의 법이 적용되고 있었고 그들의 시각에서 외국인이 팔려고 가져온 모터바이크는 사치품으로 해석이 되어 특별소비세 적용이 되었습니다. 1300%. 바이크 가격이 200만 원이라면 2600만 원을 내야 모터바이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 소리를 듣고 디마는 펄쩍 뛰었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 대는 제가 타고 러시아를 횡단할 거라고 말했고 나머지 한 대는 자신에게 기증한 모토바이라고 그는 설명을 했던 것입니다.

사회주의 특징 중의 하나는 관료주의지요. 모든 것이 서류이고 담당자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되돌아올만한 일에는 절대로 사인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에는 지금도 공휴일이 많습니다. 점심시간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의 시간입니다.

인도 밀교를 믿고 있었던 디마는 이런 소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주 긴급한 일이 아니면 차에 타지 않는다라고요. 그래서 시내에서 8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세관까지 매일 걸어 다녔죠. 그렇게 도착하면 점심시간이었고 또 퇴근 시간 혹은 공휴일이었지요.

디마는 러시아에서는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러시아는 되는 것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렇게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버렸지요. 매일 찾아가 설득하다시피 해서 모터바이크 한 대는 보증금만 받기로 했고 디마에게 기증한 걸로 주장했던 바이크에는 여전히 높은 세금이 매겨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가지고 있는 비자기간으로  러시아 횡단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비자 연장을 위해 한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디마는 사라지고 없더군요. 자신이 제게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장남이었던 그에 대한 그의 어머니의 걱정도 대단했습니다. 같은 러시아인에게도 당시의 러시아 횡단은 너무나 위험한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두 번째 작업으로 여행 허가부서를 찾아갔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징 중의 하나가 이동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러시아를 횡단하기 위해서는 따로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조그마한 비자 용지 안에 러시아의 모든 지역을 써넣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담당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재 러시아의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다. 혼자서 외국인이 러시아를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였죠. 그러면서 무장군인을 대동하고 그에게 월급과 숙식을 제공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저도 좋지만 그럴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1년 전 이 도시에서 알게 되었던 러시아인 북한태권도 사범이 싸우다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전쟁에서의 패배와도 같습니다. 인플레이션, 살인적인 물가 상승, 높은 실업률, 이로 인한 가정해체, 그리고 약물 중독과 온갖 사건 사고들) 이것이 1996년 당시 러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던 것과 달리 현장에서 알면 알아갈수록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죠.

선교사님을 찾았고 지역사회에서 발이 넓은 고려인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를 통해서는 러시아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과 삼일 만에 모든 일이 정리가 되었죠. 모터바이크 한 대는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 제가 타야 할 바이크에 대해서는 보증금을 내었고, 여행허가는 그의 제자였던 사람이 공무원으로 있는 지역에 가서 받아오는 것이었죠.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끝없는 길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련 시절 대중들의 이동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대중들의 이동을 열차로 특성화해 놓았습니다. 이로 인해 도로는 열악함 그 자체였죠. 대부분이 군사용 목적으로 만들어졌고요. 구멍투성이 천지였습니다.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 주는 길이 있는지 현지인들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바라보았을 때 바이칼 호수 뒤편에 있는 러시아 자바이칼 지역은 중국과 경계를 이루며 스타노보이 산맥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흥안령이라고 부르는데요. 정확히 외 흥안령이 있습니다. 이곳은 산길이고 자갈투성이었습니다. 또 시베리아는 많은 곳이 저지대 습지입니다.

초봄이면 얼어있던 강물이 녹으면서 홍수가 발생합니다. 이곳저곳이 질퍽거리는 풀밭 투성이었죠. 모터바이크는 진흙탕에 빠져 움직일 수가 없고 발밑에는 불개미떼, 머리 위로는 모기떼 눈을 향해서는 날파리 떼 그리고 어디든지 물어뜯는 쇠파리 뗴들이 가득했습니다. 특히 말파리, 순록파리라고도 부르는 쇠파리 떼의 공격은 대단했습니다. 맞아 죽어도 계속해서 달려들어댔죠. 쇠파리 떼를 보면 공황장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또 호랑이를 봤냐는 말을 많이 듣는데요. 제가 만났으면 현재 이곳에 없겠지만 호랑이도 있고 곰도 있습니다. 연해주라 불리는 연해지방이나 하바롭스크 지방에는 아무르 호랑이라 불리는 세계 최대의 호랑이를 숲이나 (주로 지방 도로 등에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골 사람들입니다.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 그리고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시골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골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진짜 러시아라고 불리며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함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난함과 술에 취해 있음.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는 공공예절이 무척 발달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베우게 하죠. 하지만 술에 취해버리면 달라집니다. 보드카 유명한 술이죠. 러시아에서는 40도는 술이라고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렇게 독한 술에 취하게 되면 싸움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을만 벗어나면 야생이 살아 숨 쉬고 잇습니다. 러시아 남성들은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되면 공공연하게 허리에 커다란 칼을 차고 다니기도 합니다. 11개의 시차와 180개 이상으로 이루어진 러시아라는 나라는 온갖 무기를 접할 수 있는 곳이 기도 합니다.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탐험가김현국)’이라는

노래에도 나오지만 경찰검문에 시달리고 자갈투성이 산길과 질퍽거리는 진흙땅에서는 바이크를 타고 가는 시간보다 매고 가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숲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국내에서는 여행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주말이 되면 지리산에 들어가 살다시피 했는데요. 야생이 살아 숨 쉬는 러시아에서는 숲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있는 시골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로도 못 가고 숲으로도 못 가고 경계에 있어야 했지요.

제가 자신 있어해 왔던 것들이 하나하나씩 모두 깨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노래를 만들어준 가수가 그러더군요. 당시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후회한 적이 없었냐고요. 하바롭스크에 도착해서부터 매일 후회했다고 말했죠. 하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길까지 들어와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우랄산맥을 넘어 시월 초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젊은이들의 거리로 알려진 아르바트 거리를 걷고 있는데 마오쩌뚱과 체 게바라 평전, 마르크스 자본론 등이 헌책이 되어 길바닥에 쌓여 있더군요.

그렇게 귀국을 했고 다시는 새로운 길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죠. 하지만 저는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통해 이미 시야가 1만 km로 넓어져 있었습니다.

1997년,

모스크바로 다시 날아갔습니다.

이번에는 모스크바에서 직접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목적이었죠. 국제관계대학이라는 학교 기숙사를 숙소로 하고 모스크바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 손에는 메모와 볼펜을 들고요. 모스크바도 유럽처럼 방사선 형태의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크렘린이 있죠. 붉은 광장과 함께요.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10개의 대로가 있습니다. M자로 시작되는데요.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세계와 만나게 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지요. 당시 제게는 모든 길은 모스크바로 통한다였습니다.

1은 벨라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벨라루스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이 됩니다.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의 일부 구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3은 우크라이나를 거쳐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10은 ‘로시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연결이 되죠. 저는 모스크바에서 유럽으로 들어갈 때  9번 도로인 발트 연방도로를 이용합니다.  또 모스크바에서 우랄산맥까지는  7번 도로, 볼가, 우랄산맥 넘어 시베리아로는 5, 우랄연방도로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메모하면서 걸어 다니다가 사업아이템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쌀장사였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너무나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한국은 1997년에 IMF를 맞았죠.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 국가부도를 선언했습니다. 나라가 또 망한 것이었죠. 하지만 암울한 시기가 기회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노브이 루스키라고 불리는 새로운 부유층인데요. 이들은 베부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소련 시절 당이나 정부에서 고위 간부나 관료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대표로 있었던 국영기업들은 서방의 자본과 결합을 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죠. 또 한 부류는 외환거래나 불법제품을 판매해서 돈을 번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기업가 정신으로 부를 이룬 사람들이었고요. 모두의 공통점은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호화별장을 사고 해외여행을 가고 비싼 식당에서 파티를 즐겼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일본 열풍이 불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도 지식인 사이에서는 무라카미 류 소설 열풍이 불었고요. 젊은이들은 사무라이 문화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부유층들은 초밥집을 찾았죠. 초밥집이 마구 늘어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초밥집에 미국 쌀을 수입해서 파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러시아어나 미국 네트워크가 없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자비량선교하시는 분과 함께 헸습니다. 자비량 선교사는 아무 곳에서도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선교하시는 분을 말하는데 저와 함께했던 분은 광주 분이었는데 러시아어를 잘 알고 있었고 그가 몸담고 있는 선교단체가 미국에 있어서 미국으로부터 쌀을 수입해 오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수입한 쌀은 일본의 기술과 자본으로 미국에서 생산된 것이었습니다. 쌀장사를 하면서 곡물 시장이 무기 시장보다 더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라는 브랜드가 붙게 되면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인연을 맺은 상표는 ‘니시키’였습니다. 일본에 있는 지방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쌀장사를 하면서 모스크바에서 길들을 익히게 되었고 차로 이동하게 되면서 시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로 M10, 로시야와  M5, 우랄과 M7, 볼가연방도로를 이용했습니다.

특히 M5 우랄 연방도로 따라 달리게 되면  우랄산맥을 넘게 되고 이것은 1996년 제가 모터바이크를 타고 달렸던 시베리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아래로는 중앙아시아가 있습니다.  이 도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크로드와 만났습니다. 실크로드는 동과 서의 문명을 이어주던 고대 교역로입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현실의 실크로드는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실크로드를 품고 있었던 중앙아시아는 1991년, 소련의 일원으로서 함께 무너졌습니다. 가난은 환경 파괴도 함께 가져오게 만듭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한편 2,000년이 다가오면서 새천년을 감당할 패러다임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노마디즘, 유목주의였습니다. 이로 인해 역사 속의 인물이었던 칭기즈칸이 현재로 소환되었습니다. 그의 특징은 적은 숫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행력을 끼친 것입니다. 그의 정규군은 십만 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약 3억 명 정도에게 영행을 끼쳤다고 합니다.

저도 디지털 시대를 공부하면서 이런 말이 들어왔습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대중에게로의 정보 접근성이 가장 좋은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보를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요. 아날로그 시대에는 정보를 쥐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대중이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 선이 있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알래스카나 베트남 등 지구 어느 곳에서 영향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크로드에 이러한 생각들을 결합해서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온 오프라인으로 세계의 젊은이들을 모으고 실크로드 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만나게 되는 지구의 환경, 빈곤, 질병 등의 과제들을 이슈하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카스피해에서는 해양오염방지 캠페인을 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활동을 인터넷 교육 커리큘럼으로도 만들어 캠페인의 영향력을 확장시켜 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카스피해는 오염이 심각한데요. 카스피해에는 철갑상어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엔은 철갑상어를 멸종위기로 보고 보존해야 할 지구촌의 자원으로 선정했습니다. 카스피해는 다섯 개 나라에 의해 둘러 싸여 있습니다. 그중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는 카스피해와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규모 정유시설들이 해안에 있고 이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오염원이 바다로 흘러들고 있죠. 소련 시절에 당이나 장부에서 고위직을 했던 사람들이 운영했다가 멈추어있던 정유시설에 서방의 자금이 들어오면서 이들은 막대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환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토대로 베트남에 있는 초등학교나 강원도나 알래스카  등에 있는 어린이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짓기를 통해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함께 지구촌에 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에는 하샬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우리의 두레와 비슷해서 집을 짓게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도와주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자본의 노리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전통도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제적인 NGO인 해비타트와 함께 사랑의 집 짓기를 통해 인류가 보호해야 한 전통 지키기 프로그램도 넣어보았습니다. 이밖에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지구 사막화 방지를 위한 나무 심기 등이 있었고요. 로봇과의 행진도 이벤트로 넣어봤습니다.

1999년, N실크로드 대장정이라는 계획안을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서울이 아닌 지방, 광주로 내려왔습니다 저에게 익숙한 곳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공원 안에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숲과 산책로가 있었으니까요. 공원 휴게실을 임대하고 인터넷을 연결했습니다.

광주와 서울에서 전시회 하면서 함께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함께 홈페이지를 만들고 마스터플랜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메일을 통해 세계와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맨 먼저 노키아라는 휴대폰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세계 1위의 휴대폰 회사였죠. 아시아 담당자가 직접 서울까지 날아왔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었습니다.

터키 이스탄불 상공회의소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3년째 되던 2001년에는 이런저런 성과들과 함께 투르키예에서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횡단해서 한국까지 이어지는 사전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출정식 관련 협조를 위해 이스탄불 상공회의소 사무총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고 오히려 그의 요청을 통해 보스프러스 대학교 학생들이 참여하고 청소년 시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열매를 얻었습니다.

키르기스탄에서는 오쉬에서 수도비쉬케크까지 650Km 구간을 말로 이동하고 유르트를 지원해 줄 수 있다는 내용으로 국영방송사와 만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다사에서 만든 로봇, 아시모와 함께하자는 프러포즈도 이루어지게 되었고요.

국내에서는 계명대와 전남대에 동아리가 만들어져 실크로드 구간에서 이루어질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8월 30일,

사전답사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을 했습니다. 그리고 12일 뒤에 9.11 사태가 터졌죠. 3년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곧바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고 이후 이 전쟁은 2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 돈을 버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짐을 싸서 돌아왔습니다. 전업 탐험가로서의 삶을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n. 실크로드 대장정에 다시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외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단체와 사회 선배들입니다. 돌아오는 소리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무슨 학교 나왔냐 그리고 지방에서는 안된다라는 말 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날부터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내는 나라는 흥하고 성을 쌓는 자는 쇠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물 안에서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잘 산다. 이게 올바른 일이냐라고요. 그 누구보다 새로운 길에 앞장섰던 분들이 이제 사회의 중심이 되었는데 돌아오는 소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요. 시끄럽다며 하나둘씩 떠나갔고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잖아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말씀 공부를 통해 남이 아닌 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움츠러들게 되었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에 도전한다는 구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n. 실크로드 대장정도 결국 제 욕망을 위해 또 다른 성을 쌓으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2013년 12월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카스 이브 예배를 드리고 숙소로도 사용하고 있던 학교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바닥에 깔려있던 이불 위에 누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저는 실패한 인생이라고요. 한국에 돌아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결국 헛시간을 보냈고 이젠 사무실 비용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고요. 그러다 일어났습니다. 저에게 탐험가라는 명함을 만들어주었던 시베리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다시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트랜스 유라시아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유라시아 대륙횡단 계획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나 수에즈 운하를 통한 뱃길과 비행기 길에 대해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자료화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배경은 2010년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러시아 연방도로의 완공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지나가는 시베리아 횡단도로의 완공으로 아시아와 유럽이 하나의 길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2014년에는 한. 러 무비자 협정이 발효되어 양국을 오가는데 더 이상 비자가 필요 없어졌습니다.

이것을 토대로 계획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시 비용을 만드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상태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 경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손을 내민다는 것 참 어렵더군요.

며칠을 고민하고 찾아갔지만 거절받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겨울, 양말을 신지 않고 뛰어다녔지만 경비는 잘 모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5번의 출발연기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연기하게 되면 돌아오는 길에 겨울 시베리아를 만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발해야만 했습니다. 돌아올 수 있는 비용이 없이 편도비용만을 가지고 시베리아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았습니다.

7년 된 중고 모터바이크를 하나 구입해서 출발을 했고 길에 대한 자료를 만들면서 대륙을 횡단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은 겨울 시베리아를 만나 모스크바에서 모터바이크와 함께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전시회와 방송 인터뷰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를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2017년,

다시 대륙을 횡단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팀을 꾸려 누구든지 우리 일상의 이동수단을 사용해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유라시아 마실 가기 1’이지요.

하지만 팀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결국 저 혼자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차량을 가지고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동해시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2023년 11월부터는 속초에서도 가는 배가 있습니다.)

동해시에 도착을 했고 그곳에서 자발적으로 대륙을 횡단하려는 차량 여행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터바이크 여행자가 7명 차량 여행자가 2명. 이들을 보고 우리 사회를 이루고 이는 다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보고 유라시아 대륙횡단이 대중화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위해 주유소에서 2년 동안 일을 하면서 바이크를 구하고 경비를 모았다는 대학생.

대학 졸업한 젊은이. 30대 청년들 그리고 50대 조기 퇴직자. 마지막으로 65살의 바이크 여행자.

65살 되신 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면서 쿨하게 카드 한 장과 모터바이크로만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더니 그는 자신과 함께할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은 단지 바이크와 카드 한 장만으로는 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생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온 이분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이 가지고 온 바이크는 1,200 cc 배기량으로 대학생이 몰고 온 125 cc 바이크와는 성능에서 너무나 큰 차이가 났습니다.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이 토끼와 함께 달리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륙횡단 하는 방법을 아저씨에게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750km 정도를 함께 달리면서 인터넷을 연결하고 주유하는 방법과 숙소 그리고 식당에서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바롭스크에서 혼자 출발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절대 못 가겠다고 하셨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응원을 해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카톡을 연결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서로 연결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혼자서 바이칼 호수까지 달려가게 되었고 오는 길에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다시 혼자서 즐라디보스토크까지 가게 되었고 배를 타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아저씨를 모델로 대한민국의 샐러리맨들이 연차 휴가 기간 동안 자신의 차량으로 지구의 배꼽 바이칼 호수까지 다녀올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귀국을 했습니다.

2018년에는 이비에스 방송국에서 섭외가 들어와 아시안 하이웨이 7호선을 배경으로 세계테마기행을 찍게 되었습니다.

2019년,

다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횡단에 도전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신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인브리지라는 구체적인 사업을 내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무기가 자원이 되는 세상입니다. (현재 우크라이나를 앞세운 서방세계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독일로 들어가던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경제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

아홉 개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사업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연결된 사업들이 북한과의 관계 혹은 국제 정세에 따라 요동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북방사업의 메인이 되었던 시베리아 철도 연결 사업도 그렇습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미 평일에도 한국인들이 100미터 넘게 줄을 서서 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굳이 변수가 많은 북한과의 철도 연결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것에 대해서도 저는 회의 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시베리아를 지나는 러시아 횡단도로의 완공으로(2019년에는 도로 포장률도 거의 100프로센트)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독점하고 있던  물류운송이 다변화되어 있었고 오히려 도로를 토한 물류운송에 부가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점들을 알리고자 다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2019년,

 부산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가 다른 운송수단에 대한 경쟁력이 있는가를 자료화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였던 2019년의 유라시아 대륙횡단 중에는 뉴욕에 있는 더 익스플로러스 클럽으로부터 정회원으로 승인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탐험단체로 남극점의 아문센과 달 착륙의 닐 암스트롱, 에베레스트의 힐러리 등이 멤버로 있었고 현재는 민간인 우주선 시대를 열고 있는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 등이 현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바타 등의 영화 등을 통해 해저탐사에 관한 많은 노하우를 가진 제임스 카메룬 감독도  멤버입니다.


2022년에는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은 UN ESCAP에서 주관하고 있는 아시안 하이웨이 프로젝트의 일부분입니다. 또한 아시안 하이웨이 6호선은 제가 반복적으로 자료화하고 있는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도로와 많은 구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유라시아 문화교류라는 이름으로 기획 전시와 국제 포럼, 청년 아카데미로 구성된 국비사업도 대표로서 감당을 했습니다.

2023년,

 이루어진 여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 횡단 계획은 뉴욕의 탐험가 클럽에서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뉴욕 탐험가 클럽과의 네트워크를 제대로 만들어보자라는 취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2023년 여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감당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겨울 환경에서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도로에 대한 자료를 만든다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의 저의 반복된 행위에 의해 모든 환경에서 시베리아를 지나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 도로에 대한 자료가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남과 북의 분단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400km라는 제한된 선택의 범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광주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4,000km로 확장되는 것을 반복해서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실현하고 선진국이라 불리는 OECD회원국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의 분단의 환경으로 400km라는 제한된 선택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제 성장은 더 이상 한계라고 말합니다.


유라시아 대륙은 인구 45억 이상의 거대 시장이자 자원의 보고로서 지구촌의 시선을 받고 있고 바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대륙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또 매일의 뉴스에서 나오는 각종 사건 사고를 보면서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이 건강한 사회인가 걱정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좁은 국토 많은 사람 그리고 치열한 경쟁의 결과라고 말을 합니다.

유라시아 대륙 14,000km로의 일상의 확장은 막혀있던 우리의 숨구멍을 틔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두 번째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유산인 바이칼 호수 보존을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위해 러시아 정부에 제안을 했고 러시아 연방, 천연자원 및 생태부로부터 초청을 받아 바이칼 자연보호구역 센터 직원들과 바이칼 호수 보전을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누구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거나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메타버스(가상세계)를 활용한 게임과 증강현실 아바타를 만들기 위한 바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14,000km 유라시아 횡단 도로를 시각자료화 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의 탐험가 클럽과 러시아와 베를린의 언론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메타버스를 활용한  게임에 대한 사업 아이템을 평가해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2024년을 맞이했고 현재 저는 고국에서 다시 새로운 여정 중에 있습니다.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면

저는 남과 북이 분단된 환경에서 한반도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연결되는 길에 대한 자료를 만드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유라시아 대륙과 29년째 인연을 맺어오고 있고 모두 여섯 번의 대륙횡단을 마쳤습니다.

이를 통해 서울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4,000km x @가 되는 유라시아 대륙횡단도로에 대한 자료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대륙을 가로지르는 간선도로로부터 지선으로 연결되는 각 각의 지점에 1천 km 단위로 12개의 베이스캠프를 세웠습니다. 이것은 유라시아 대륙과의 네트워크를 의미합니다.

2023년의 여섯 번째 유라시아 대륙횡단 계획안은  미국 뉴욕, 탐험가 클럽에서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 러시아 연방 정부로부터 초대를 받아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바이칼 호수 보존을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독일 방송 및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의 작업들을 알리고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2024년에는

2023년의 자료 정리와 함께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수 있도록 가상세계를 활용한 게임과 증강현실 아바타를 만드는 작업을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유라시아라는 단어를 특화시킨 여행자 복합공간을 유라시아 콤플렉스라는 이름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툴(연장)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이 14,000km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보다 구체적인 작업들을 해보겠습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시베리아에 가면 타이가라 불리는 침엽수림 지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제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면서 배운 것은 현재 제 눈으로 보고 있는 것들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외눈박이의 삶이 아닌 두 눈을 가진 싦을 지향해 봅니다.

탐험가김현국-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청년문화포럼 주제강연

**

소개- 탐험가 김현국  

-뉴욕 The Explorers Club 정회원

-사) 세계 탐험문화 연구소 소장

-남과 북의 분단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Km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의 일상이

광주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암스테르담까지

유라시아 대륙 14,000Km로

확장될 수 있음에 도전해 온 탐험가

탐험가김현국-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청년문화포럼 주제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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