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화)
25. 5. 7. 15. 16. 35 보너스 당첨 번호는...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옥탑방을 적시던 빗방울이 거세게 내리치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창을 두드리는 비바람과 당첨 번호를 놓칠세라 크게 틀어놓은 티브이는,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성태의 핸드폰 벨소리를 몇 번이나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떻게 숫자 한 개가 안 맞냐!"
성태는 두 손 모아 쥐고 있던 복권 종이를 힘껏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허탈한 그의 표정에 친구 재민은 복권을 주워 쫙 펼친 후 그의 손에 다시 올려 비아냥댔다.
"복권 살 돈 모아서 술이나 사라니까."
"기다려봐, 당첨만 되면 거하게 살 거야! 일단! 오늘은 너가 좀 사라.."
재민은 대박 나면 뭔들 못해주겠냐는 말을 밥 먹듯이 해대는 성태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태는 지독한 운명론자에 늘 허황스러웠다. 제대로 노력할 생각은 않고 운명에 맡기는 삶. 일이 잘 돼도 운명 탓, 안 돼도 운명 탓. 옆에서 보고 있자면 꽤나 골치를 섞게 하는, 마냥 꽃밭에 뒹구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 이거 이거 상습범이야 아주. 취업 준비도 안 해~ 맨날 복권만 맞춰~ 꼬락서니 보니까 슬슬 아버님한테 걷어차일 때가 됐는데.. 아직도 그냥 내버려 두셔?"
"그럼! 우리 아빠가 한 다정하시잖아. 나가자. 나 배고파."
당첨이라는 행복한 꿈이 깨져버린 성태는 재민의 한심한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재물의 운명이 나의 편이 아니겠거니..
삐리리리리- 삐리리리리-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고 집을 나서려는 찰나, 또 한 번 성태의 벨소리가 울렸다. 화면에는 아빠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성태는 재민을 흘긋 쳐다보고 자신의 아빠는 다정하단 걸 증명이라도 하듯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어, 아빠! 아~ 오늘도 망했어! 아니, 복권번호가~"
"소망 병원 응급실입니다!! 아버님 성함이 최중호 님 맞으시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다정하게 전화를 받아야 할 아빠가 아닌, 다급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성태와 재민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게 뭔 소리야?'
"병원이요? 네 네.. 저희 아빠 맞아요. 아빠가 왜요?"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로 실려오셨어요. 전화를 왜 이제야..! 후.. 일단 피를 많이 흘리셔서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보호자 동의가 필요해요! 동의 먼저 해 주시면..."
그녀의 말이 총알처럼 날아와 머리를 헤집었다.
"하.. 할게요!! 해주세요, 해주세요.."
다리에 힘이 풀린 성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최중호.
성태의 아빠이자 엄마가 일찍이 돌아가신 탓에 하나뿐인 가족 구성원이다. 아빠는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정성과 사랑으로 자신을 보살폈고, 밤낮으로 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지켰다.
지금 걸려온 전화 한 통은 성태의 그 사랑과 생계를 빼앗아 가려하고 있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넋이 나간 성태를 옆에서 지켜보던 재민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쪼그려 앉아 신발을 고쳐 신겨 주었다.
"최중호 보호자입니다! 수술실이 어디죠?"
"아 네네 잠시만요. 일단 서류 작성해 주시면 안내해 드릴게요."
간호사가 건넨 서류들은 수술 동의서와 입원에 관한 내용이었다. 아빠의 생사를 확인도 못한 채, 돈에 대한 압박이 종이 몇 장으로 들이쳤다. 동의하고 싶지 않은 내용 투성인 A4용지에 무거운 마음으로 서명까지 마칠 때쯤, 네모난 공무원증이 달랑 거리며 눈에 띄었다.
"최성태 님?"
"아 네.. 제가 최성태인데요?"
눈물자국이 볼을 타고 짙게 남은 성태의 모습에 경찰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버님 사고로 몇 가지 말씀드릴 게 있는데, 상황이 좀... 손님 태우고 운전하시다가 졸음운전으로 중앙선을 넘으셨어요."
"네!? 졸음이요? 그럼.. 아빠가 잘못하신 건가요..?"
"아 예. 아버님이 가해 운전자이시고, 반대편에서 오는 차랑 부딪쳤어요. 다행히 택시에 타고 계시던 손님은 찰과상 정도인데 반대편 차량 운전자가 아직 의식이 없어요."
이게 웬 날벼락일까.
가해 차량이라니.. 성태는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 졸음운전은 확실한 건가요?"
"타고 있던 손님이 눈 감기는 거 보고 몇 번이나 깜짝 놀라서 아버님한테 얘기했다고 진술했고, 블랙박스에도 녹음이 되어 있네요.."
“아...”
사고 전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의 아빠는 없었다.
세상사, 신과 더불어 운명에 지배된다고 믿으며 살던 성태였는데... 가혹하게도 모든 운명은 너의 편이 아니라며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치료비 보상은 언제쯤 되냐며 난리 치는 택시 승객과 의식 없는 반대편 운전자. 이런 까마득한 상황을 알지도 못하고 수술 중인 아빠까지..
성태에게는 처절히 '돈'이라는 생계만 남겨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