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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효진 Jun 09. 2024

#16 소중한 내 삶, 언젠가 날아오르리

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마지막화)


  꿈을 꿨다. 까마득할 정도로 낯선 얼굴의 남자와 여자. 기억 속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어엄-마, 압-빠'

  '하하하하하, 여보 봤어? 우리 성태 말하는 거?'

  '아빠가 매일 얼마나 잘 놀아줬는데, 엄마 먼저 말하네~ 성태 요놈 자식!!'

  '꺄르르르, 압-빠 압-빠']


부모님 앞에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조그마한 아기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잘생긴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나인가 보다. 아아- 우리 가족도 저럴 때가 있었구나.. 엄마.. 보고 싶다.. 아빠는.. 삐리리- 삐리리-


 '아.. 엄마 꿈 진짜 오랜만이었는데..'


 아침을 알리는 소리에 단란하던 세 사람은 사라지고, 베개에는 눈물 자국만이 선명했다. 끊겨버린 꿈에 아쉬워하며 몸을 뒤척이던 성태의 볼에 축축한 베개의 감촉이 닿았다. 침인가 눈물인가.. 킁킁 냄새 맡기 바쁘던 그에게 중호가 물었다.


 "다 울었냐?"

 "에? 울긴 누가요!?"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한 아빠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중호는 아들의 소란에도 가만하게 눈을 감고 누워서 말을 덧붙였다.


 "아들이 아빠 엄마 부르는 게 이상한 거도 아니고 뭘. 오랜만에 아들 입에서 엄마란 말 나오니까 좋네~ 어떻게.. 엄마는 좋아 보였어?"

 "아.. 응.. 다 같이 웃고 있더라."

 "그럼 됐네."


이른 새벽, 중호는 성태의 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평소 의식적으로 꺼내지 않던 엄마를 하염없이 부르는 것도 모자라, 아빠까지 불러대니 마음 한편이 뭉클했다. 그리고, 중호 역시 아내가 그리웠다.


 띵-동

 "나가요!"

잠결에 울었다는 민망함은 성태의 발을 빠르게 현관으로 튀어나가게 했다.  


 철-컥

 "아저씨, 엄청 빨리 오셨네요? 8시도 안 됐어요!"

 "여즉 자고 일어나 겨? 아이고, 후딱 움직이게~"


자신을 위아래로 훑으며 혀를 끌끌 차는 김 씨는 어딘지 모르게 기세가 당당해 보였다.


 "저~짝에 그, 1시간만 쓰고 갖다 줘야 혀~"

 "네? 뭐가.. 와! 진짜 빌려오셨어요!?"


며칠 전, 이삿짐센터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던 성태에게 걱정 말고 자기만 믿으라며 호언장담한 김 씨였다. 성태는 신나게 달려 나가 계단 쪽을 내려다보았고, 시선 끝에는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하얀 트럭 한 대가 서있었다.


 "아저씨 최고야 진짜."

 "다 큰 게 덥석 덥석. 어이~ 최 씨! 일어났는가?"

김 씨는 쑥스러운지 자신을 부둥켜안은 성태를 떼어내고, 집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차가운 이른 아침,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나기 위한 삼박자가 시작되었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계단 밑으로 짐을 내리는 성태와 팔을 후들거리며 트럭으로 올려 쌓는 김 씨. 입으로 거들기 바쁜 중호까지. 완벽했다.


 "이제 출발할까요? 근데.. 이거.. 3인 의자 맞죠...?"


김 씨가 빌려 온 트럭은 3인용이었지만, 성인 남자 셋이 타기엔 한참 비좁아 보였다. 몸을 욱여넣고 다닥다닥 붙어 있자니, 땀과 땀이 공유될 지경이었다.


 "나는.. 짐도 안 날랐는데, 차 안 공기가 습한 게.."

 "최 씨, 혹시 한 겨울에 지팡이 짚고 걸어올텨?"

 "하하하하 김 씨, 사람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건조한 겨울 촉촉하고 아주 좋아~"


냉큼 태도를 바꾸며 후끈한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중호의 행동에 세 사람은 한바탕 웃음 지었고, 그 모습은 마치 단란한 가족 같았다. 성태의 엄마이자 중호의 아내가 떠난 이 현실에서 더 이상 지난밤의 꿈같은 즐거움은 느낄 수 없겠지만, 그들에게는 또 다른 행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김 씨는 트럭을 돌려줘야 한다며 떠나고, 성태는 부지런히 정리를 했다.


 "아들, 무거운 거 옮길 때 조심해. 내려놓을 때 발 찧지 않게 하고. 아빠가 할 수 있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안 되겠다 아빠. 잔소리 그만하시고, 먼지 털고 방에 들어가서 눈 좀 붙이셔."


아들의 움직임마다 귀를 쫑긋하며 끊임없이 조심하라 다그치는 아빠가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다. 성태는 아빠를 일으켜서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히고 아침부터 고됐으니 푹 주무시라는 말과 함께 슬며시 문을 닫았다.


다시 거실로 나와 정리를 재개하려는 성태의 눈앞에 아빠의 이름이 크게 적혀있는 박스가 보였다.

 '이런 건 좀 버리고 오시지..'


이제는 아빠가 두 번 다시 보지도, 읽지도 못할 책들이었다. 한 권씩 정리하던 중 평소 아빠 서랍에 손댈 일이 없어 보지 못했던 책이 눈에 띄었다. 자녀 키우기에 관한 책부터, 자녀와 친해지는 법. 사춘기 자녀를 대하는 방법까지.. 혼자 아들을 키워 온 아빠의 노력들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그 밑에는 아들을 향한 아빠의 관심과 애정이 담겨있었다. 자신이 어릴 적 쓴 일기장과 어버이날 전해드린 카네이션에 편지. 수많은 학창 시절의 사진들. 어느새 성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자연스레 박스 가장 안쪽에 있는 상자를 꺼내 들었다. 정관장이 적혀있는 직사각형의 빨간 상자였다.


 '영양제인가?'


상자 안을 열어본 성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은 세상에 혼자 남게 될 아들을 위한 아빠의 책임감, 사망 보험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는 종이 뭉치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딱 1년째 되는 날 가입되어 있는 서류에, 혹여나 아빠가 들을까 숨죽여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마주한 사망보험이라는 네 글자에 벌써부터 아빠가 사라진 것만 같고, 혼자 어떤 마음으로 이 서류를 작성했을지... 성태는 가슴이 퍽 답답해 얇은 종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정신을 차린 성태는 어젯밤 루나가 흘린 말이 떠올랐다.

[원래는 성태 씨가 원하던 거 크게 하나 해주고 싶었는데..  행복하다니까 이제는 필요 없어 보이네요.]


 '내가 늘 원하던 거는... 복권인데... 돈..? 에이 설마..'

항상 노래를 불러대던 복권 당첨. 루나가 말한 선물이 혹여나 아빠의 사망 보험금은 아니었겠지 싶은 생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포르투나가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신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이건 상관없는 존재. 만약 자신이 흘러넘치는 행운에 미쳐 김 씨 아저씨의 동생처럼 변해버렸다면, 포르투나는 그저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며 저 보험금을 타게 해 줬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1년 후, 작디작았던 품 안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르던 어느 봄날.

 

 "네..? 대표님 이거 꿈 아니죠?"

 "하하하, 자네 속고만 살았나. 운전만 하는 게 아까워서 그래요. 일도 잘해주고 있고."

 

대표는 퇴근하려는 성태를 불러 세우고, 회사에 들어와 일을 배워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해내야죠. 예비 사위한테 언제까지 내 운전기사만 시킬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나 설아한테 혼나요."

 "헙.. 예비 사위..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대표가 딸에게 입버릇 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라.' 설아에게 성태는 우연이 찾아온,  다시없을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학만 졸업하면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르던 설아였다. 성태는 아직 자신이 없었기에 귀여운 장난으로 넘겨왔었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빠! 아저씨! 대표님이 나한테 회사에 들어와서 일 배워보자고 하셨어. 막 다정하게 예비 사위라고 불러주시면서..!"

 "잘됐다.. 정말 잘됐다.. 우리 아들, 이제 정말 다 커버린 거 같네..."

 "아이고, 그럼 이제 최 씨는 나랑 살아야 겄네! 안 그래도 속만 썩이던 내 동생 놈이 제주도로 가버렸어~ 새로 시작한다나 뭐라나! 하하하하"

 

넘치는 욕심에 바닥으로 나뒹굴던 김 씨의 동생은 끈질긴 회유와 보살핌으로 다시 새 삶을 도전하게 되었고, 김 씨는 노력이 하늘을 이겼다며 기뻐했다.




 "요행을 바라며 살아오던 삶에 일어난 끔찍했던 악몽. 단비처럼 내려온 행운에 휩쓸리듯 끌려간 나날들. 그로부터 1년 여가 지난 지금까지 나는, 단 한 장의 복권도 살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인정승천이라며 노력으로 복권번호를 적으라 했지만, 아빠의 사망보험 서류를 발견한 후 대가 없는 행운은 실제 하지 않을 거라 믿기로 했다. 아빠가 내게 보여준 노력과 관심, 애정과 책임의 모습은 결코 행운이란 것에 빗댈 수 없었다. 다만 한 줄기 빛처럼 내 삶에 들어온 설아와 김 씨 아저씨. 그들은 선물이자 행운이었다. 이제는 아빠에게 배운 방식으로 그들을 지켜낼 것이다."

  



깜-빡-깜-빡


거리의 수없이 많은 간판 사이에 낡고 희미하게 깜빡이는 곳이 있다면, 필자는 문을 열지 않을 것을 권유합니다. 그 불빛은 지난날의 성태처럼 행복하지 않은 또 다른 누군가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


 벼락같은 행운에 기뻐하기보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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