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미용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15화)
'행복하세요?'
성태가 미용실에 갈 적마다 루나에게 항상 듣는 질문이었다. 행복하냐는 그 질문을 처음 들었을 땐,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친구사이에 흔하게 물어볼 수 있는 좋냐?라는 의미 정도. 하지만 행복을 묻는 루나의 의도가 갈수록 묘하게 거슬렸다.
왠지, "네! 행복해요!"라고 섣부르게 말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랄까... 오히려 더 큰 행운을 부어주길 바라며 아직은 행복하지 않은 척 꾀를 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그런 생각도 했다.
'혹시 내가 부린 꾀가 괘씸해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게 아닐까? 아빠가 계단에서 헛디뎌 떨어진 건, 포르투나의 벌이 아니었을까?‘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눈 후 여러 생각들이 성태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리고 문득 궁금했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는 과연 행복할까?
아저씨와 헤어진 성태는 다시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는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낡은 간판에 불빛이 환하게 반짝였다.
'간판이 원래 이렇게 밝았나?'
매번 지나쳐가던 불빛이 오늘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문을 열었다. 평소와 다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텅 비어있던 복도에 웬일로 한가운데 서서 액자를 바라보는 루나가 있었다.
"어! 안.. 녕 하세요, 선생님."
지난번 인사불성으로 다녀간 이후, 첫 방문이기에 괜스레 어색함이 감돌았다. 천천히 곁으로 다가간 성태에게 루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그림을 가리키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이 그림에서, 포르투나가 왜 공 위에 서있을까요?"
"글쎄요.. 한 가지는 알 거 같아요."
루나는 의외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성태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음.. 여기 그림에서 보면, 눈을 가리고도 중심을 잘 잡고 있어요. 그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포르투나는 돈이 많아도 가난해도, 좋은 사람이어도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행운을 주는 일에는 누구보다 공평해요. 근데 보기에는 좀 불안해 보이네요. 밑에서 사람들이 서로 부를 얻겠다고 싸워대니 공에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겠어요.."
정적이 흘렀다. 루나에게, 아니 포르투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인간은 처음이었다. 같은 신들 조차 그리 얘기 해준 적이 없었다.
"하하.. 하하하 신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극히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존재라고."
"어..! 제 친구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포르투나는 부정적이고, 변덕스럽다는 식의 말.. 그래서 포르투나한테는 모든 게 다 장난이고 놀이라고.."
"아하! 그 친구요~? 그 친구는 포르투나를 엄청 싫어하나 보네요. 나 참.."
루나가 말하는 신과 성태가 말하는 친구가 동일 인물임은, 그녀만 알고 있었다. 뒤에서 자기 험담을 할 줄은 알았지만, 부정적이고 변덕스럽다니.. 신의 행동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고 보니 성태 씨 머리 많이 길었네요. 얘기는 이쯤 하고 들어갈까요?"
"저.. 사실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요."
"흐으음, 나한테 뭐가 궁금할까.."
"루나 선생님은...! 행복하신가요?"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루나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우뚝 섰다. 덩달아 긴장한 성태가 침을 꼴깍 삼킬 즈음, 루나가 웃음기 가신 목소리로 되물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루나는 빙그르 돌며 어깨를 으쓱 올렸고, 성태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 씨아저씨의 동생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망가졌는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니.
"혹시 미용실 문 앞에 매번 서성이는 남자 아세요?"
"아~ 알죠, 그 사람. 아는 사람이에요?"
"네 뭐, 조금. 루나 선생님 찾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요. 뭘 그렇게 더, 더, 더! 더!! 바라는 건지.."
루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쉽사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애꿎은 성태를 잔뜩 쏘아봤다.
"그래요. 성태 씨는 꽤 마음에 드는 인간이니까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난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 지니가 아니에요. 행운을 원하는 인간들의 깊은 마음이 내 수레바퀴에 오르게 되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물질적으로든 행운으로든 보답하는 거죠. 포르투나는 인간의 물질적 부와 행운을 관장하는 신이니까."
그간 많이 시달렸는지,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하는 루나였다. 한편 그녀의 푸념을 듣던 성태는 마음이 뜨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막무가내로 찾아와 아빠가 다치지 않게 해 달라며 간절히 빌었던 전적이 있었다.
"어.. 힘드셨겠어요. 죄송해요. 저도 저번에 막 찾아와서 난리 쳤는데.. 하하"
"뭐.. 괜찮아요. 성태 씨는 꽤 좋은 인간이니까."
"아까부터 마음에 드는 인간, 좋은 인간.. 혹시.. 저 좋아.."
"미치셨어요?"
루나의 표정을 보아하니 성태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없었어요. 한 번도. 그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바라는 것만 많았지.. 고맙다고 선물을 가져온 인간은 성태 씨가 처음이에요."
"아.. 그때 그 디저트.."
"네 맞아요. 그 달달~한 디저트! 그날 성태 씨가 설아씨 갖고 싶어서 안 행복한 척, 씁쓸한 척 꾀부리는 게 괘씸하긴 했는데... 정말 달고 맛있었거든요 그 디저트가."
"하하하하 역시 다 알고 계셨구나.. 부끄럽네요.."
성태가 고개를 숙이고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루나가 바짝 다가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러면 이제는 어때요? 행복해요?"
"아! 저는 정말 행복해요. 더할 나위 없이요."
성태는 루나에게 하는 마지막 대답일 거 같은 기분에 조금 더 용기 내서 행복을 말하고, 왠지 모를 두려움에 한 발짝 뒷걸음질 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와... 행복이라.. 잘됐네요! 정말 기뻐요!"
질끈 감은 눈을 살짝 떠서 루나의 얼굴을 보니,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마냥 신난, 의미심장한 미소가 아닌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 순간 성태는 생각했다. 포르투나가 정말로 원했던 건, 그저 사람들이 행운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선생님, 감사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작별인사 같네요?"
"맞아요. 작별인사. 이제 안 올 거예요."
"왜요? 머리가 영 마음에 안 들어요?"
"하하 아뇨, 기대하게 돼요 행운이라는 거. 이제는 행복이든 뭐든 스스로 찾을 거예요."
"좋네요. 내 수레바퀴에서 제 발로 내려간 사람은 성태 씨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죠? 잘 가요."
밖으로 나와 그녀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뒤를 돌아본 성태는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온몸에 힘이 빠졌다. 미용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무수한 인간들에게 행운을 나눠주고, 때로는 외면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포르투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무서운 존재만은 아니구나. 그저 행복을 바라보기 위해 행운을 선물해 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