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직후 자책하고 있을 당신을 위해
조금 전, 그와 헤어졌다.
화장실 거울 앞에 나란히 꽂혀 있던
분홍색과 파란색 칫솔을 보니,
문득 울컥한다.
함께 양치하며 낄낄대던 우리,
거울 속에서 마주 보며 웃던 그 순간들.
그 웃음들은 이제 다시 비칠 일은 없다.
여러 번의 이별 끝에,
칫솔을 치우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실수였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다.
의지이고, 결정이고, 끝이다.
그리고 그 순간 덮쳐오는 질문들.
"내가 너무 예민했나?"
"내가 좀 더 참았으면"
결국 또 나를 탓한다.
늘 그렇듯, 익숙하게.
상대를 탓하는 것보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좀 더 정리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책, 이 감정은 날카롭지만 익숙하다.
우리는 슬플 때 “슬퍼”라고는 쉽게 말하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 외로움이 고개를 들 때
‘혼자 남겨졌을 때의 마음’
‘연락이 오지 않는 날의 허전함’
‘기대했던 말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의 쓸쓸함’은
잘 말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그냥, 이렇게 말한다.
“내가 뭘 잘못했나 봐”라는 말로
슬픔과 울분의 감정을 꾹 눌러버린다.
자책은 어쩌면—
슬픔을 슬픔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상처받았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자존심,
그리고 여전히 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마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런 자책은 조용히 시작된다.
무심한 메시지 하나,
기다리다 놓쳐버린 통화,
밥 먹었냐는 말 한마디 없는 하루.
그러다 어느새
'그 사람이 나를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본능처럼 자책을 꺼내 쓴다.
‘내가 너무 기대했나 보다.’
‘애초에 내가 더 좋아했지.’
‘이 정도는 그냥 참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건 감정이 아니다.
그건 감정을 가리기 위한 말이다.
자책이란 이름의 그 말들 속에는
사실 이런 속마음이 숨겨져 있다.
“나도 외로웠어.”
“나, 그날 너무 힘들었어.”
“그냥 너한테 다 털어놓고 싶었어.”
이런 말들을 꺼내는 게—
강해 보이려는 압박 때문인지,
거절당할까 두려워서인지,
나약해 보일까 자존심이 가로막는 건지,
아니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감정이 진짜가 될까 무서운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너무도 익숙하게 나를 탓한다.
자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건 마치 이해받지 못한 감정들의 거친 포장지 같다.
그 속에는 날카로움에 찔릴까
웅크리고 있는 진짜 마음들이 숨어 있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
“나도 참 많이 힘들었어.”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조금만 더 알아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꺼내는 대신,
스스로를 먼저 탓해버린다.
“내가 잘못했나 봐” 같은 말은
상대의 잘못도, 내 아픔도 부정한 채
관계를 어떻게든 매만져 보려는
안간힘일지도 모른다.
자책,
그건 아직도 내 안에서
이해되지 못한 감정들이 속삭이고 있는 작은 신호다.
“나는 그때 정말 외로웠어.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사실은, 그냥 더 사랑받고 싶었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자책은 서서히,
조용히
그 본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잃는다.
그 감정들을
마침내 들여다보고
이해되지 못한 감정의 언어를 이해해 주는 순간,
그때야말로
그 시절의 나를 부드럽게 놓아줄 수 있는 시간이다.
자책을 멈춘다는 건
더 강해지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더 부드러워지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이 부드러움이야말로
결국엔 나를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나처럼
그 마음의 언어를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