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未)文地帶 2

by 세강

6. 기승전 '쓰는 나'
모든 서사는 결국 ‘나’로 돌아온다. 주제를 이야기하다 말고, 맥락도 없이 갑자기 내 마음, 내 다짐, 내 후회를 말하기 시작한다.
결국 뭐든 써놓고는 “나로부터, 나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였다고 자기고백으로 대충 끝.
심지어 소설도 그렇다. 인물은 있는데, 다 ‘나’다.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이다. 아니, 자서전조차도 아니다. 그저 ‘나의 감정’이 서사의 목적이자 결과인 글이다. 그렇다면 굳이 인물과 배경을 왜 세웠는가? 설정은 왜 했는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것은 독자 설득용 장치가 아니라 나 자신만을 위한 프레임에 불과하다. 이렇게 쓰면 '내 기분'이 '내 취향'이 '내 감정'이 좋다라는 이상한 자기애. 구구절절 길어지는 대사는 내 개똥철학의 복제가 아닌지 돌아볼 때다. 덤으로 주인공이 내 분신 투영 투사 동기화 된 머시기가 아닌지도 살피면 더 좋고.


7. 연구 없는 실험실
어느 글이든 읽으면 쓴 사람의 깜냥이 바로 보인다. 칼럼, 평론 등은 더 하다. 얼마나 많은 최신 정보를 익히고 평소 깊이 있는 독서를 했는지 문장 하나하나에 새겨져있다.
신문사에 독자투고 하는 사람은 많다. 평범한 10대 학생부터 명문대 교수까지 투고한다. 칼럼이 안 실린 이유는 으레 하나다. 내용을 못 썼기 때문이다. 문장은 교정교열 보고 윤문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고쳐줄 방법이 없다. 넓게 쓸 필요도 없고, 그저 좁고 깊게 쓰면 되는데 평소 뭘 하기에 칼럼 쓰겠단 사람이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는 건지?!
소설과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쓰는 글에 나오는 중심소재를 철저히 연구해 녹여야 독자가 소설 주제에 제기하는 뾰족한 질문에 답을 내놓을 수 있다. 눈감고 고찰만 하지 말고 검색하고 또 검색하자는 말이다.


8. 까막눈의 만년필
어디서 본 듯한 장면, 대사, 클리셰가 가득한 이유는 하나다. 자기 글을 자기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 타인의 글, 타 장르, 타 문화권, 오래된 고전 등을 거의 읽지 않고 쓴 글은 닫힌 세계 안에서 맴돈다. 그래놓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니까요”라며 방어한다. 아니, 글 쓰겠다면서 왜 남의 글은 안 읽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읽지 않는 작가는 자기 복제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창작이 아니라 정서 낙서다.


9. 문학은 내 얘기하는 수단이라고 믿는 사람들
“글은 나를 표현하는 도구잖아요?”
아니. 그건 일기다. 그것도 자기검열 없고 무방비한 감정폭로형 일기. 문학은 ‘너’에게 ‘나’의 얘기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매체다.
‘내 얘기만 하면 문학’이 되는 줄 아는 사람, 전부 감정의 포로다. 감정을 타인에게 공유 가능하게 만드는 게 창작이지,
그대로 퍼붓는 건 그냥 정서 테러다. 내가 밥을 우유에 말아 딸기잼 바른 식빵과 먹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걸 '잼빵우유밥' 단일메뉴 식당을 열었다고 생각해 보자. 퍽이나 팔리겠다. 적어도 우유밥과 딸기잼 식빵은 따로 내놔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취향을 대충 내놓으면 누가 알아주나? 남이 알빠냐? 쓰메 소세키와 다자이 오사무가 지 이야기만 지껄이는 데도 유명해진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잼빵우유밥을 내놓지 않았다.




감정의 자기방출은 문학이 아니다. 감정과 문학을 분리하는 건 창작의 윤리를 묻는 게 아니라, 전달과 설득의 기술을 구분하는 일이다... 라고 하면 사르트르가 달려와서 내 뺨을 후릴까? 아니, 사르트르라면 내 옆에서 온갖 글을 불사지르며 춤출지도.

그리고 댁이 누군데 문학에 대한 개똥철학을 일장연설 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를 존나 잘 만들어서 평론 하는 거냐.....옹이다옹(Фω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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