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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두아이와 엠페르도르를 마시다가

끈기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by Daga Oct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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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리핀의 대중적인 술, 탄두아이와 엠페르도르를 좋아하게 되었다. 탄두아이는 필리핀에서 생산하는 럼이고, 엠페르도르는 컷 브랜디다. 두 술 중에 나는 엠페르도르를 더 좋아하는데, 나에게는 더 맛있게 느껴져서다. 그래서 오늘은 이 엠페르도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원래 브랜디는 포도 원액을 증류하여 만드는 술이라,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필리핀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주정을 혼합해 대중적이고 저렴한 대안, 컷 브랜디를 탄생시켰다. 엠페르도르는 한 병(750ml)에 200페소, 약 6천 원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술이다. 단순히 알코올 농도를 낮춘 술이 아니라, "완벽함의 독점"을 거부하며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술 문화를 만든 혁신이다.


한 모금 맛볼 때마다 나는 이 술에 담긴 필리핀 사람들의 실용적이고도 창의적인 정신을 느낀다. 세상이 오직 장인정신과 50년 숙성된 완벽함만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곳이라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엠페르도르는 가볍지만,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술을 마시며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사실 한국의 소주도 비슷하다. 참이슬, 처음처럼, 한라산 같은 소주는 고운 쌀을 원료로 한 증류 소주 대신 주정을 물에 희석해 대중화한 술이다. 우리나라가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시킨 희석식 소주처럼, 필리핀도 스페인의 브랜디를 재해석해 자신들만의 술 문화를 만들어냈다.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대중의 삶에 맞춘 실용적인 가치를 우선시한 술들이다.

엠페르도르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이는 술잔 속의 인류학이자, 새로운 문화적 태도의 상징이다. 전통적인 브랜디가 오크통 속에서 수십 년간 숙성되는 귀족적 술이라면, 엠페르도르는 그 격식을 과감히 해체한다. 컷 브랜디 한 잔은 마치 더운 밤 노점상에서 내놓는 예술과도 같다. 한국의 포장마차에서 소주와 삼겹살이 어우러지는 즉흥적 즐거움과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장인의 경지에 도달한 완벽함을 숭배한다. 그러나 엠페르도르는 그런 완벽함보다도 "맥락을 만드는 힘"을 보여준다. 필리핀 거리의 노동자들이 컷 브랜디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듯, 술의 진정성은 오래 숙성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손에 닿고 입술에 닿는 데 있다.

엠페르도르의 라벨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이 아니라 철학이다. 일본의 ‘와비사비’처럼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미학을 담고 있다. 이 술은 영원히 완벽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습한 공기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맛으로 오늘을 적시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곁에 머문다.

잔을 드는 순간, 삶은 교차한다. 엠페르도르를 마시는 필리핀의 노동자와 한강에서 참이슬을 나누는 한국의 청년은 다른 재료로 삶을 증류하며 같은 우주를 공유한다. 삶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한 잔의 술로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오늘 이 컷 브랜디 한 잔을 마시며 나는 나 자신을 조금은 명예로운 필리핀 사람이라 자처하고 싶다. 엠페르도르는 단순히 값싼 대중주가 아니다. 이는 제국주의의 유산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정체성을 빚어낸 필리핀 사람들의 창의적 태도를 담고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탄두아이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덜어내듯, 우리도 소주 한 잔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삶을 축복하자.

"당신의 삶은 오크통 속 50년 산 명주인가요, 아니면 오늘밤 누군가와 부딪히는 컷 브랜디인가요?"

정답은 없다. 중요한 건, 잔을 드는 그 순간이 우리의 역사와 교차한다는 사실이다. 오늘을 적셔줄 한 모금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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