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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Mar 22. 2023

3.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환승연애2


규민은 지난 날 해은에게 받은 상처와 잃어버린 신뢰, 지쳐버린 마음 때문에 과거의 그 애틋했던 마음만으로는 해은을 편하게 대할 수 없다.

그 시절 내 마음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해은과 함께 했던 7년의 시간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와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민은 기를 쓰고 해은을 외면한다.

어쩌면 규민이 해은을 외면한 이유는, 사실은 과거의 모습을 마주하고 싶어하는 자기 스스로를 애써 외면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해은은 규민과 헤어진 후 아무렇지 않게 1년여의 시간을 보내왔지만 규민과 함께했던 그 과거에, 누구보다 행복했던 그때의 자신의 모습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

다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애써 그 때의 나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화장대 거울에 비친 해은의 우는 모습은 거울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다시 그 때로 돌아가는 그녀 스스로의 모습이다.


해은이 원한 것은 규민과 사랑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규민도 사실은 과거의 행복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나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싶었던 걸까.



「같이 저녁먹으러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끝나버렸네. 너무 아쉽네.」

「아쉬워?」

「다음에 가자, 다음에. 다음에 사줄게.」


계속해서 해은이 과거에서 벗어나 잘 지내길 바란다고 했지만, 끝에 가서야 규민은 오히려 결국 끊임없이 도망쳐왔던 과거를 추억하고 마주하는 자신을 만나고 만다.
이제 다시 둘이서 눈을 마주치고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지난 7년의 시간을 없던 일처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금 나의 가슴 한 켠에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한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해은을 완전히 떠나보내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에겐 저녁먹을 다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음에 가자고 말하면서.

해은도 규민 역시 나처럼 슬프고 아쉬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내가 과거만 그리는 슬프고 못난 사람이 아니라 웃으며 규민을 보내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7년이라는 시간동안 한 사람과 사랑을 한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르게 지나온 일생이 만나 7년의 시간동안 부서지고 또 부서졌을 것이다.

부서지면서도 다시 붙으며 서로 닮아갔을 것이다.

하나의 선으로, 면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 연애를 끝내는 건, 단 한 순간에 마을을 무너뜨리는 해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는 바람에 부서지는 파도를 온 몸으로 견뎌내는 일이다.

지난 날의 힘들었던 나와 너를 기억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때의 행복했던 나를 마주보아야 하는 일이다.


아직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이 미련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때의 향기는 너무 달콤하지만 씁쓸해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향기가 남아있던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런 내 모습조차 온전히 나의 일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 그를, 그녀를 떠나 보낼 수 있다.

앞으로 문득 떠오를 그 사람의 얼굴과 그때의 기억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할 부서짐이다.

그렇게 부서지기도 했을 나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다른 누군가를 방문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둘은 서로를 붙잡거나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겨내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들을 사랑해주려고 부단히 애썼는지 모르겠다.


퇴근하면 드라마보는 여의도 직장인. 두 손에 꼽아도 모자른 인생드라마들을 내 생각으로 채워보려고 합니다. 드라마의 한장면을 가지고 생각을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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