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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유 Oct 27. 2024

혜유와 향 2편

  혜유는 속내를 잘 말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쌓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맞벌이인데 왜 엄마만 집안일을 하는지’, ‘차별을 당한 엄마가 왜 나와 남동생을 차별하는지’가 삶의 숙제였다. 설날과 추석,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제사가 다가오면 혜유는 달력을 보면서 자꾸만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삿날을 음력으로 외우고 있는 손녀는 흔한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설날과 추석 연휴는 차라리 짧은 게 혜유에게 나았다. 길면 길수록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해야 하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혜유에게 굳이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종종 이야기하곤 했지만 얼마 전 혜유가 남자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한다고 하자 크게 기뻐했다. 혜유는 기뻐하는 엄마를 보면서 뭉클해졌다. 엄마는 혜유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게 사랑을 아예 포기하거나 결혼하지 않는 방식은 아니었다. 혜유는 엄마가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하고 사랑을 믿기를 바란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전은 장녀인 혜유가 초등학생 때부터 담당해오던 것이었다. 그래서 혜유는 다른 사람이 부친 전, 특히 아빠가 부친 전을 보는 기분이 생소했다. ‘내가 안하니까 아빠가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아빠도 전을 부칠 줄 아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평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퇴근하여 쇼파에 앉아있는 삼촌을 보는 순간 혜유는 다시 출근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 엄마의 부탁으로 모조지를 사러 다시 신발을 신어야 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모조지를 사러나가는 것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향을 사러 뛰쳐나가는 것도 이 집안에서 딸로서 살아온 자신의 역할이니 ‘평생 퇴근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혜유는 했다.

  마치 야근 후에 퇴근한 것처럼, 조용한 밤거리에 혜유의 숨소리만 들렸다. 집을 나선 혜유는 포털사이트에 ‘향 파는 곳’을 검색했다. ‘샤브향’이라는 샤브샤브집과 ‘가향’이라는 중식당이 나오고, 쇼핑 간에는 인센스 스틱과 디퓨저가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스크롤을 크게 내렸을 때 2010년에 ‘제사에 쓰는 향을 대형마트에서 파나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쓴 사람도 향이 똑 떨어졌는데 사는 걸 잊어버렸다며 미리미리 안 해놨다고 혼나게 생겼다는 푸념을 덧붙였다. ‘우리 집 같은 곳이 또 있구나!’라는 생각에 혜유는 서두르던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에 집중했다. 답변에 불교용품 파는 곳에 가면 많은 향 종류를 판다고 적혀있었지만 혜유의 동네에는 불교용품을 파는 곳이 없었다. 지식인에 ‘제사 향 파는 곳’이라는 질문에 어지간한 마트에서는 전부 판다는 우주신의 답변을 보았다. 큰 길가로 나와서 혜유는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잠시 고민을 했다. 왼쪽언덕으로 올라가면 동네에서 꽤 큰 대형마트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아파트 상가에 붙어있는 작은 마트가 있었다. 이 시간에 대형마트는 열지 않았던 기억이 난 혜유는 간혹 새벽에 맥주를 샀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파트 상가 마트로 뛰어갔다.

  아파트 상가 마트가 어지간한 마트에 속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간 것은 아니었다. 마트 아줌마는 사람이 와도 반기지 않았고,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또 화장실에도 자주 가고 오래 걸려서 그때마다 혜유는 익숙하게 문에 기댄 채 웹툰이나 드라마 클립을 보곤 했다. 마트는 작고 갖추고 있는 종류가 많지 않았지만 신상은 없어도 찾는 과자는 있었고, 냉동칸에 대패삼겹살도 있었다. 뛰다가 힘이 풀린 혜유는 터덜터덜거리며 마트에 향이 없으면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보다는 ‘그래도 아파트 상가 마트잖아! 다 사람 사는 곳인데 향이 있겠지, 있어야지!’라며 마트에 향이 있어야만 하는 명분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선 ‘어쩐지 이번 제사는 평탄하더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 아무 일이 없으면 그것도 이상하지.”라고 혼잣말을 한 혜유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야에 보이는 마트 간판의 환한 불빛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혹시 향이 있나요?”라고 혜유가 묻자 마트 아줌마가 생각에 잠긴 듯 느리게 “향?”이라며 혜유의 말을 따라했다. 혜유는 재빨리 “그 제사상에 올리는 향이요.”라고 덧붙였다. 마트 아줌마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구석을 가리키며 “저 쪽에 가면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혜유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치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잃어버린 지갑이나 휴대폰을 발견한 것처럼 현실적이지 않고 낯설어서 내 것이 맞는지 얼른 확인하고 싶었다. 구석에 털면 먼지가 나올 것 같은 큰 박스에 한 뼘 크기의 작은 박스가 하나 있었고, 그 박스에는 크게 ‘향’이라고 적혀있었다. 혜유는 믿지도 않던 신을 외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카드 돌려주기를 기다리다 목례정도 하고 나왔을 혜유는 마트 아줌마의 손이 아니라 눈을 보았다. “오늘 제삿날인데 향이 없어서 지금 집이 난리가 났어요.”라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너스레도 떨어보았다. 아줌마는 대수롭지 않게 “향이야 사면되는걸.”이라고 대답하며 묵묵히 카드 승인을 기다렸다. 혜유는 불현듯 카드한도가 초과되는 건가 불안해하며 다급히 “향이 얼마죠?”라고 물었고, 아줌마는 승인이 난 영수증을 주며 “2200원”이라고 하였다. 혜유는 2200원만큼의 허탈함을 느끼며 “향을 팔아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마트 문을 나섰다.

  아줌마가 “아이고, 그게 뭐라고.”라고 혼잣말하는 걸 뒤로 하고 걸음을 재촉할 때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남동생이었다. 멈칫하며 받을까 고민하던 혜유는 발에 못 박힌 듯 서있던 남동생을 떠올렸고, 그가 계속 그렇게 서있는지 봐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화면은 꺼졌다가 바로 다시 켜졌고 이번에는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 지금 사서 가고 있어!”라고 혜유가 받자마자 외쳤고, 엄마는 소녀 같은 웃음으로 호호호 웃으며 “어머, 그러니”하며 속삭였다. 엄마 옆에 막내 여동생이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유가 그 웃음들에 다시 힘을 내 뛰며 괜히 퉁명스럽게 끊으라고 하자 엄마는 조심히 오라며 다 큰 딸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엄마가 조심히 오라는 건 자신의 놀란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혜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곳곳에 불이 켜진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혜유는 혹시 향이 부러질까봐 걱정하며 계주 달리기 때 바통을 쥐듯 팔을 90도로 하고 짧아지고 있을 양초를 향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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