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el Mar 04. 2024

봄이 오는 소리

봄비.... 안녕!!

후드득후드득!!

침대 머리맡 창문 너머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늦게까지 게으름 피우는 잠을 막아 세운다.

밤새 내렸을 비였건만 빗소리가 이제 들렸다는 건 꿈속에서 빠져나온 내 귀도 이제 열린 모냥이다.

웬 봄비가 이렇게 내릴까? 며칠 째 놀리기라도 하듯 잠깐씩 햇살 틈을 줘가며 내리는 비가 얄밉다.

한여름 장마도 아닌 것이 장마 흉내를 내려는 모양인지 쏟아져 내린다. 

비마저도 긴 겨울을 힘들게 참아냈다는 한탄이기라도 한 걸까?

몸을 웅크리고 옷깃을 여미게 했던 추위가 저 멀리 달아나는 것을 눈치챈 봄비가 이렇게 사정없이 달려온다.

봄비라 이름하고 봄장마가 된 이 비가 지나고 나면 그 자리에 봄이란 놈이 성큼 다가와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동안은 도망가지 못한 추위와 비가 서로 엉켜서 사람들을 잠시 웅크리게 할 수는 있겠지만

이내 산이고 들이고 봄 색깔이 될 테지.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묘하다. 자연의 변화 말이다.

사람의 능력밖인 자연의 힘은 가로수 잎의 색깔 변화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그렇게 알록달록 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던 가을빛은

겨울의 폭설에 맥을 못 추고 낙엽 되어 사라져 버렸다.

영원할 것 같던 겨울왕국 또한 봄장마에 어느새 녹아버린다.

색깔 없는 봄비는 세상 속에서 다양한 색깔을 노출시킨다.

아이가 쓰고 가는 빨간 우산은 더 빨간색으로,

산등성이 상록수는 내리는 빗속에서도 상록수의 색깔을 잃지 않고 더 선명해지고 있다.

겨울왕국에서 누드화가 되어버린 가로수는 온몸으로 비를 맞이하는데도 누드 빛깔 그대로 서있다.


무색무취한 봄비는 논란의 중심에 서있을 때는 본인의 정체성이 모호하지만

그 논란이 잦아들고 나면 그의 정체성이 여기저기서 또 다른 시끄러움으로 우리를 일깨워 줄 것이다.

사람들의 칙칙했던 옷은 가벼워질 것이고 색깔은 비비드 해질 것이다.

땅 밑에서는 앞다퉈 땅 위를 나오려는 새싹들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누드가 되었던 가로수에서는 온몸을 긁어서 피멍 든 사이사이로 새순들이 먼저 나오려

경쟁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봄비의 역할은 그러하다.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일.

잠들었던 땅을 깨워주고 웅크리고 있던 산들을 흔들어 깨워주는 일.

나태해진 사람들에게서 그 나태함을 조금씩 빼주는 일.

그래서 봄비를 이해하게 된다.

봄비는 조금씩 걸음 하며 추위를 보내버리고 옅은 연두 보따리 보따리 이고 지고 달려왔을게 분명하다.

한꺼번에 보따리 모두 풀기 아까워

며칠째 모두를 빗속에 묶어두는 방법으로 그 연두 보따리를 풀어왔나 보다.

봄장마라고 오해했던 봄비가 이제는 이해되며 미안해진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완연한 봄이 되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귀여울 것이다.

문구점에서는 학생 인파로 분주할 것이고,

식당마다에는 추위 때문에 '배달의 민족'과 공생했던 사람들의 외출로

여기저기서 술잔 부딪치는 경쾌함이 식당주인을 웃게 만들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나태함을 가져갔으니 봄 한가운데서는

창문너머 빗소리를 듣기 전에 먼저 비를 보고 인사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었듯

봄비는 그렇게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게 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장(家長)의 고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