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가정, 재혼가정 그것은 언제 끝나나요?
서른의 중반에 서있지만, 나는 아직 내가 생각할 때 스무 살? 열아홉 살쯤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생각도, 마음도, 행동도, 말투도 모두. 어쩌면 더 어릴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나는 나보다 조금 더 나은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을 동경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힘들다. 아주 조금 티끌 하나 차이로 나와 다르게 생각을 하는 타인일 뿐인데, 나는 어떠한 부재로 인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동경하고 그 사람을 치켜올린 후 고개를 한껏 들어 올려 동경의 대상으로 삼는다.
2년제 대학을 나왔기에 나는 또래들보다 사회생활을 좀 더 빨리했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빨리했으니 나는 그들보다 빨리 어른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달랐다. 느리게 출발한 친구도 선두주자로 달리던 친구도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어른이 되어간다. 그걸 깨닫기까지 조금 오래 걸린 듯하다.
이렇게 서두를 길게 쓴 이유는 며칠 전 양아버지의 아들 1살 어린 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 후 몇 번 얼굴을 본 것 외엔 몇 년 만에 얼굴을 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빠! 아빠! 부르며 컸던 지난 21년 정도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건인 즉 엄마와 아빠는 사이가 소원해졌고, 별거 아닌 별거를 하며 대면대면 지내고 있던 시간도 있었던 데다가 자식이 서로 다른 엄마아빠는 서로 네 자식, 내 자식 편 가르기를 하며 지낸 지 시간이 꽤 오래됐기에. 동생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엄마를 엄마답게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화가 났다.
결혼하고 나는 그들과 그리고 엄마가 있는 지역에서 3시간 정도 떨어져 산다. 혼자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엄마한테 무척 죄스럽고 미안했지만, 내가 살아야 했기에 나는 엄마로부터도 떨어져 살겠다는 것이 내 선택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집에서 그따위 대접을 받고 있다는 모습이 화가 났다.
자세히 짧게 말하자면, 내 입장, 내 시선이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빠를 아빠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나 그들은 엄마라는 부‘모’를 어떻게 생각했기에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했을까 싶다. 결혼식에도 순서가 있지 않는가. 그런 절차들 없이 통보식이었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5년의 시간 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하는 훈련들을 계속했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양아버지와 그 밑에 자식 둘과 살았던 21년의 시간이 나를 또 한 번 시끄럽게 만들었다. 분개했고, 마음 같아선 잔칫날을 망가트리고 싶을 정도였다.
보여주기식의 사과,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는 그 집안사람들을 상종하기 싫었지만 나는 ‘도리’. 내가 해야 할 그놈의 ‘도리’를 다 하고 집으로 내려왔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입바른 말을 했다. 토할 것 같았다.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결혼식을 마치고 내려와 집에서 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노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고 살고 있던 내가 싫어서 잊고 또 잊었는데, 인생이라는 시간은 나를 또 한 번 시험에 빠트리는 것 같았다.
산책을 하고 걷고 또 걸었다. 마음이 계속 시끄러웠다. 운동을 하고 몸을 쉬지 않고 움직여도 똑같았다. 나를 키워준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자식으로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네가 참 못났다고 한다. 네가 싫어하는 그 계집과 다를 거 없다고 한다. 무조건 내편이었던 할머니마저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시끄러운 감정은 언젠가 또 가라앉을 것이다. 그것 또한 분하고 서글프지만 이것 또한 내 몫이겠지. 세상에 도가 튼다거나 부처의 마음처럼 그런 큰 그릇은 못 될 것 같다. 사람 사는 세상 사연 없는 집 없다는 말처럼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어린 생각은 접어두고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 내겐 너무 어려운 영역이다. 품지 못할 버거움이라면 잊고 살아야 하는데 건드려질 때마다 개복치처럼 고슴도치처럼 한껏 방어태세를 하게 되는 내 인생의 한 구석은 언제쯤 괜찮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