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수험생활은 시간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까지도 망가트리는 일이었다. 반복되는 불합격을 몇 년 동안 때려 맞고 정신을 차리기란 쉽지 않았다. 지키고 지켜온 내 자존감은 불합격 앞에 굴복해 완전히 K.O. 당해버렸다.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해 녹다운되어 있지만 폴 카운트를 세어주는 주심이 없었기에 경기는 끝이 없는 것 같이 계속되었다. 수험 생활 끝자락에는 정말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까지 자존감이 내리쳤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존감이 가장 높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대학생 때였다. 그때 내 자존감을 채워주신 두 분의 교수님이 있었다.
광고 수업을 진행하시던 교수님이었는데 당시에 광고회사도 운영하셨던 현직자였다. 교수님 눈에 들면 졸업과 동시에 취업까지 해결되니 적극적으로 어필하던 학생들이 꽤 여럿 있었는데 그 취업자리를 교수님이 나에게 제안하신 것이다. 우리 회사에 막내로 들어와서 일해 볼 생각이 없냐고. 그전부터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교수님께 여러 번 말했던 터라 들어와서 일 배우면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갖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나는 광고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하였고 이런 제의를 하셨던 것은 비밀에 부치기로 하였다. (그 뒤로 일이 안 풀릴 때마다 이 날을 떠올리며 그때 제안을 수락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 보는 구질구질한 짓을 자주 했다.)
다른 한 분은 내가 굉장히 존경하던 교수님으로 다수의 책을 발간한 작가였다. 그분의 글을 굉장히 좋아하고 닮고 싶어서 과제도 더 신경 써서 열심히 했고 외부 강연까지 찾아가서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팬이었다. 그런 교수님께서 “내 자리를 위협할 제자가 나온다면 그건 얘야.”라며 나를 가리키셨는데 그날 기분은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물론 술자리에서 흥이 올라 나온 말이라 진정성이 의심되며 정작 당사자는 기억도 못할지 모른다는 함정이 있지만 말이다.
공부하면서 자존감이 내려가고 자신감이 바닥칠 때 과거의 이 일들을 떠올렸다. 주머니에 꼭꼭 접어 고이 보관했다가 힘든 날 펼쳐 들어 상기시켰다. 그러면 사회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에서 잠시의 고난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래 이렇게 못난 사람이 아니고 언제든 얼마든지 내 역량을 펼칠 수 있고 그만한 역량도 가진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긴 시간 너무 자주 펼쳐보니 너덜너덜해져서 제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그랬던 기억은 너무 오래되어 그 시절 나와 지금의 나는 분리되어 버렸다. 자존감을 충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교수님들이 지금의 내 처지를 본다면 뭐라 생각할까 싶은 걱정이 밟고 올라섰다. 나란 존재가 두 분의 안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니 말이다.
나에게는 꽤 오랫동안 성취감을 느낄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잘' 또는 '대단' 따위의 단어들과 나는 거리 두기가 되었다. 공시를 그만두고 나서 어떤 것이든 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고 막연히 뭘 할까 고민하다가 시작한 것이 먹스타그램이었는데 먹는 것도 좋아하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당장에 이만큼 흥미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니 칠천 명 가까운 팔로워를 가진 계정이 되었고 이것으로 네이버 푸드인플루언서까지 승인받을 수 있었다. 지인들은 본인 주변에 인플루언서는 처음이라고 신기해하며 어떻게 그렇게 계정을 키울 수 있는 건지 대단하다는 반응들을 보였는데 그때마다 나는 한결같이 너도나도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대답했다. 한 친구에게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똑같은 답을 했었는데 그 친구의 반응에 나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얼얼해져 버렸다.
너는 왜 네가 잘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거야.
정말 시간만 들여도 되는 일이라면 너는 그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했잖아.
다들 생각만 하거나 도중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은데 이렇게 해낸 거면 충분히 잘한 일이고 대단한 일이야.
그 말을 듣는데 정말 순간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겸손 떨려고 그랬던 것도 아니고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시간이 차고 넘치는 백수라 남아도는 시간을 갈아 넣었기 때문에 쉬웠던 일이라고.
생각해 보면 브런치에 작가로 승인이 났을 때도 비슷했다. 한 번에 합격 메일이 온 것을 보고는 이상하다 싶었다. 내가 이렇게 쉽게 된다고? 그 길로 나는 바로 포털사이트에 ‘브런치 한 번에’라는 검색어를 적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브런치 작가가 되려 노력하고 있는지보다는 한 번에 합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가 내 관심이었다. 한 번에 합격했다는 여러 명의 후기만을 보고서는 그제야 나는 결과를 이해했다. 역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합격 혹은 불합격만이 중요했던 시기를 겪는 동안 나는 무언가 큰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닌 이상 그 외의 것들은 잘해봤자 별 의미 없는 것들로 치부하게 되었다. 작은 성취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질 않고 인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팔로워 많은 사람들도 천지삐까리인데.
브런치 작가 승인만으론 별 일도 아닌걸. 책을 낸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 이렇게 내 노력과 내 성취를 내가 앞장서서 폄하하고 있었는지.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쫓아다니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악플 달고 있었다. 내가 해낸 일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일인지 그런 나는 얼마나 가치 없는 사람인지 구구절절 스스로와 남에게 설명하면서 말이다. 자각이 든 순간부터 꽤 큰 슬픔이 몰려왔다. 정말이지 나 꽤나 망가졌구나 싶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아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