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는 아이 - 다섯 번째 발걸음
세상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초등학교 4학년 아이 '윤현이'의 작은 하루를,
엄마의 시선으로 담아보았습니다.
움직이지 못한 마음,
참아야만 했던 순간,
그리고 끝내 꺼내어준 용기의 이야기.
잠시 천천히 걸어가듯,
윤현이의 속도로 함께 걸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3/20]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3월 20일, 수요일
나는 계단이 무섭다.
4학년 교실은 4층인데,
내려갈 때 다리가 이상하게 떨리고 숨이 막힌다.
예전에도 몇 번 미끄러질 뻔했었다.
그래서 항상 애들이 다 내려간 다음에,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
애들이 있을 땐 못 탄다.
“왜 너만 엘리베이터 타?
안 돼, 내리라고!” 하며 소리치니까.
그럴 때마다 무서워서, 그냥 안 탄다.
오늘도 애들 다 간 거 보고,
조심조심 버튼을 눌렀다. 1층.
근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키가 큰 반 애가 나타났다.
나보다 훨씬 크다. 나는 반에서 키가 제일 작다.
그 애가 나를 보더니 말도 없이
내 팔을 확 잡아끌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가 타는 거야. 너는 타면 안 돼.”
나는 “탈 거야! 나 무서워서 그래!”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 애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끌고 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냥 내려가 버렸다.
나는 거기 서서 멍하게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가 나서 소리 질렀다.
“왜 못 타게 해! 나 무섭단 말이야!”
그때, 선생님 한 분이 지나가다 들으셨다.
“왜 그래, 윤현아?”
그 애가 먼저 말했다.
“얘가요, 갑자기 소리 지르고 화냈어요. 이유도 없이요.”
나는 눈물이 나서 말이 잘 안 나왔다.
“아니야...
나 이유 있었어.. 내가 먼저.. 얘가 먼저..”
근데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보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냥, 조용히.
나는 그 눈빛을 알았다.
‘또 윤현이가 문제구나’ 하는 눈빛.
나는 그냥, 아무 말도 안 했다.
눈물이 자꾸 나왔다.
혼자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계단은 열려 있었다.
나는 그 계단을 내려다봤다.
아래는 아무도 없었고, 계단은 끝이 없었다.
내 발이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마음은 많이 떨렸다.
나는 그냥, 오늘도 참았다.
아무도 몰라줘도, 나는 참는 아이니까.
윤현이는 오늘,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나는 그 얘길 들으면서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계단이 무섭다는 것도,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래서 너를 조용히 기다려주기도 했고,
다그치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너의 말을 듣고서야
그게 너한테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게
그렇게 힘든 싸움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야 느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윤현이는 참는 아이가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였다는 걸.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참지 않고 말해준 너한테
나는 정말 고마웠다.
윤현아.
마음이 떨리면서도 말하려 했던 그 순간,
엄마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됐어.
무서워도 괜찮아.
그건 엄마가 곁에서 같이 걸어주면 돼.
오늘은 참지 않았던 너를,
엄마는 꼭 안아줄게.
오늘 아침에 윤현이가 어제 겪었던 일을 들었다.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네가 얼마나 참았는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용기 냈는지를
나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혼자였던 그 자리에서
엉엉 울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는 마음이 미안해졌고,
네가 너무 기특해졌다.
무서웠겠다,
서운했겠다,
억울했겠다.
근데 너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참았다”라고만 말했지.
윤현아.
아빠가 늘 옆에 있어준다고 말은 하지만,
그 말이 진짜로 닿기 위해선
네가 먼저 말해줘야 하는 거야
이제 아빠가 먼저 말할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참지 말고 얘기해 줘.
아빠는 네 편이니까,
말만 해도 괜찮아.
엘리베이터는
혼자 타지 않아도 되는 거야.
계단이 무서울 땐,
그냥 아빠 손 잡고 같이 타자.
그게 아빠가 있어야 하는 이유니까.
ADHD를 가진 아이들은 종종 불안감을 느끼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윤현이가 계단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높고 좁은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끄러짐이나 사고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윤현이의 위험에 대한
민감도와 불안정한 감정 조절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참는 존재가 아니라,
참을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무서워도, 떨려도, 억울해도
조용히 버티고 있던 작은 심장이
비로소 말을 꺼낸 오늘.
그 용기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한 걸음 더 다가가야겠지요.
오늘, 윤현이의 하루를 함께 걸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나는 참는 아이》는 브런치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1편부터 8편까지는 하루씩 만나실 수 있으며,
이후에는 매주 수요일, 윤현이의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