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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Oct 12. 2024

화이트 나잇(White Night)4

[단편소설]

#4. 라이브 카페 「화이트 나잇」


여린은 하루 종일 걸어 피곤한 데다 비까지 와서 추위에 떨다 보니 안으로 들어가서

언 몸을 녹이고 따뜻한 차도 마시고 싶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서서 인사를 건네며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아마도 카페 사장인 듯했다. 레오파드 무늬가 그려진 두건을 쓴 삼십 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키는 

작지만 어깨가 넓고 몸집이 단단해 보였다. 여린은 레오파드 두건을 쓴 카페사장에게 인사를 한 후 안쪽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았다.  카페 안은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테이블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놓여있고, 안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한라산 능선 모양의 무대 위에서는 호리호리하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가수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통로 오른편에는 단체 모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큰 다인용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주전부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왁자지껄 뒤풀이를 즐기고 있었다.

통로 왼편의 창가 커플석을 차지하고 앉아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커플과, 식은 찻잔을 앞에 두고 홀로 감상에 젖어 있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도 보였다. 카페 안을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던 여린은 마침 비어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뭇결이 선명한 원목 테이블과 의자는 앉기에 편안하고 운치가 있어 보였다.

여린은 맞은편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밀크티와 피칸파이를 주문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밀크티와, 고소한 피칸파이를 먹고 나니 피로와 추위에 지쳤던 몸이 노곤해졌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가수의 공연이 끝나고 이어서 인디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평소 록을 좋아하고 즐겨 듣던 여린은 록밴드의 공연을 라이브로 보게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한다. 화이트 나잇의 라이브 

무대에 처음 서 본다는 무명의 인디밴드는 연주는 나름 괜찮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베이스와 보컬이 어우러지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기대에 못 미친 밴드 공연에  아쉬워하던 여린은 맞은편의 창가  테이블  

앉아있는 두 명의 남자에게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간다.

두 남자 중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훤칠하고 체격이 건장했으며 빈티지한 청바지에 헐렁한 

검은 셔츠를 받쳐 입고 색이 바랜 라이더 재킷을 걸친 후줄근한 차림새였지만, 언뜻 보기에도 매력적인

미남이었다. 살짝 컬이 있는 목덜미를 덮는 갈색머리에 선 굵은 이목구비와 하얀 얼굴,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의 부드러운 갈색을 띠는 눈동자가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 옆의 검은 가죽코트를 입은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남자는 갈색머리 남자만큼 체격이 컸는데, 체인이 달린 스키니 가죽바지에 징부츠를 

신고 곱슬곱슬한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남자 옆에 기타 케이스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밴드에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인 듯했다. 두 남자는 차를 마시며 공연을 보는 간간이 서로  담소를 

나누었다. 여린은 두 남자를 처음 보는데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전설의 밴드 보컬인 재이와 베이스 기타 레오, 두 사람과 너무나 닮은 것이다. 인터넷 영상에서 본 모습과 거의 흡사해서 혹시 

진짜 재이와 레오가 아닐까 싶었지만, 여린은 이내 그럴리가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재이 밴드는 이미 30년 전에 해체되어 멤버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3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재이와 레오는 

현재 환갑이 넘은 나이일 것이기에 아직 삼십 대 청년들로 보이는 저 두 남자는 그저 재이와 레오를 닮은 

것일 뿐이라고 여린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가슴 부근에 반짝이는 펜던트 장식을 본 여린은 흠칫 놀라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세히 보니 은빛 카노푸스 장식이 달린 펜던트였다.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펜던트의 은빛 카노푸스도 춤을 추듯 흔들거리며 반짝였다. 재이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카노푸스 펜던트를 착용한 재이를 닮은 남자를 보고 여린은 자못 혼란스러웠다.

인디밴드의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카페 사장이 갈색머리 남자와 가죽코트를 입은 묶음머리 남자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자연스레 합석하더니 한 참을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앞서 기타를 치며 공연을 했던 

호리호리하고 예민한 눈빛의 남자가수도 어느새인가 자연스레 합석해 있었다. 갈색머리 남자는 간간히 엷은 웃음을 띄우며 한 마디씩 거드는 느낌이었고, 묶음머리 남자는 카페사장 얘기에 연거푸 맞장구를 치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카키색 야상 점퍼 차림의 예민한 기타리스트는 까칠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그들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인디밴드의 공연이 끝나자 카페사장이 무대로 가서 사회자에게 무언가 얘기를 한다. 

카페사장의 얘기를 들은 사회자는 다음 순서로 국내 최고의 록밴드인 재이밴드가 <화이트 나잇> 오픈 축하

연을 하기 위해 왔다며 멤버들을 소개한다. 사회자의 소개에 담소를 나누던 네 명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린이 재이, 레오와 닮은 사람들이라고 여겼던 두 남자가 진짜 

재이와 레오였던 것이다. 카페사장은 재이밴드의 드러머인 운표, 예민하고 까칠한 기타리스트는 메인 기타 

이글이었다.

재이와 레오는 둘 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피지컬이 남달랐다. 재이는 180이 넘어 보였는데, 재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레오는 키가 190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의 뒤를 따라 무대로 걸어가는 운표와 이글은 재이와 레오에 비해 훨씬 키가 작고 왜소해 보였다. 여린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재이 밴드는 해체되어 활동을 중단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지금 이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을 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재이와 레오를 비롯한 밴드 멤버들이 현재는 모두 환갑이 넘은 나이일 텐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재이와 레오, 그리고 운표와 이글 모두 30년 전 밴드활동 시절의 삼십 대 청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타 케이스에서 일렉 기타를 꺼내 든 레오와 이 글은 기타 조율을 하며 튜닝을 하고 드럼 앞에 앉은 운표는 드럼스틱을 들고 드럼을 두들기며 소리를 점검했다. 재이는 신중하게 

몇 번이고 음향체크를 하고 목을 풀며 공연 준비를 하는데, 그들이 무대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운표의 드럼 연주가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마이크를 쥔 재이는 톰 존스의 '고향의 푸른 잔디(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를 불렀다. 여린은 재이의 목소리로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심장이 뛰고 가슴이

뭉클했다. 재이밴드의 라이브 공연에서 재이의 목소리로 꼭 한번 듣고 싶었던 노래였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재이가 부르는 '고향의 푸른 잔디(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를 들으니 실로 감개무량했다.

윤기 흐르는 갈색 머리를 찰랑 거리며 열정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 재이의 모습이 환영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카페 안은 재이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영혼을 울리는 재이의

목소리에 카페 안 관객들 모두 감동에 젖어들고 노래에 심취한 것이다. 노래가 끝나자 고요하던 카페 안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두 번째 곡으로는 영국의 하드록, 헤비메탈 밴드 '레인보우(Rainbow)'의  대표곡인 '레인보우 아이즈(Rainbow eye's)'를 불렀다.




앙코르 요청이 쇄도하자 재이는 멤버들과 잠시 뭔가 의논을 하는 듯하더니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잠시후, 운표의 드럼과 레오의 기타 연주로 앙코르 공연이 시작된다. 묵직한 베이스 기타의 사운드로 시작되는 전주를 듣자마자 여린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여린이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재이의 목소리와 레오의 기타 연주로 듣고 싶었던  '뻔한 옛날이야기'의 전주였다. 폭풍처럼 

카페 안에 휘몰아치는 레오의 베이스 기타 사운드를 뚫고 터져 나오는 재이의 샤우팅에 관객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고 라이브 카페 화이트 나잇은 마치 스탠딩 록 공연장 같은 열기에 휩싸인다. 여린 또한 코트를 벗어던지고 록 스피릿의 열기에 동참한다.   

재이밴드의 공연 중 이 세 곡이 가장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큰 인기를 얻은 곡 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 곡만 라이브 공연 영상이 없어 전설처럼 팬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는데 이곳 화이트 나잇에서 이 세 곡의 공연을 라이브로 봤다는 것이 여린은 실감 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여린은 재이밴드의 

무대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동안 벅찬 희열과 감동에 휩싸여 있었다.

공연을 마친 후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갈채와 환호 속에 재이와 레오는 무대에서 내려온다. 기타를 멘 이글과 운표가 먼저 무대에서 내려와 통로를 지나 카페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뒤이어 재이와 레오가 뒤를 따르는데,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며 '재이밴드'와 멤버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들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졌다. 갈색머리를 찰랑 거리며 여린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스치듯 지나가던 재이는 여린을 보고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여린은 순간 자신이 잘 못 본 것인가 싶었다. 재이와 레오는 운표, 이글과 인사를 나눈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혼이 나간 듯 우두커니 그들이 카페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린은 문이 닫힌 후에야 황급히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고 따라 나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카페사장 운표는 이글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여린은 그들과 미처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재이와 레오의 뒤를 쫓아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둠이 내려앉아 캄캄한 카페 밖은 여전히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고, 재이와 레오는 점점 짙어져 가는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여린은 재이를 부르려 했지만 입속에서만 맴돌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린은 그 자리에 굳은 듯 선 채 안갯속으로 아득히 멀어져 가는 재이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린이 체념을 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안갯속에서 무언가 반짝하고 빛이 난다.  은빛 카노푸스였다. 카노푸스가 안개를 뚫고 점점 여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은빛 카노푸스를 보며 여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재이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의 카노푸스였다. 재이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돌아온 것이다.

여린의 앞에 선 재이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여린을 바라보던 재이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은빛 카노푸스 펜던트를 벗어 여린에게 건넨다. 

여린은 믿기지 않은 상황에 놀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여린이 카노푸스를 손에 든 채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재이에게 다가서려는 순간, 어느새 재이는 레오와 함께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여린은 재이가 준 카노푸스를 손에 꼭 쥐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해변의 파도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흐린 안개 너머로 "부르릉"하는 버스 엔진 소리와 함께 버스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린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지 뿌연 안갯속의 버스 시동소리와 불빛, 그리고  버스에 올라탄 것만 기억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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