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체력이나 면역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 무리를 한 탓이었다.
동네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는데도 낫지 않아 결국 원래 다니던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여린은 독감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으며 꼬박 하룻밤을응급실
에서 지낸 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계절은 겨울에 접어들었다. 여린은 첫눈이 내리는 날 모처럼
집 앞의 공원에 산책하러 나갔다. 공원에는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떨어져 쌓인 가운데 퍼틀퍼틀 눈이 내린다. 가을이 머물러 있는 공원에 내리는 첫눈.
여린은 공원 벤치에 앉아 마른 잎이 드문드문 달려있는 은행나무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든다. 두 계절이 공존하는 공원의 풍경이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털모자와 머플러로 꽁꽁 싸맸지만 엄습해 오는 한기에 여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여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벤치에서 일어섰다. 공원에서 벗어나 연신 털모자를 눌러쓰며 걸음을 옮기던 여린은 추위를 녹일 겸 공원 근처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따스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안으며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여린은 생강라떼를 주문했다. 따뜻한 생강라떼를 마시며 잠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간을 보냈다. 카페 안에 흐르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고 있으려니 여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캐럴을 부르는 가수의 중저음의 목소리,
귀에 익은 음색이었다.
그 후로 몇 번의 계절이 바뀌면서 여린은 차츰 화이트 나잇의 기억이 옅어져 갔다.
#6. 완치
여린은 서른다섯 번째의 봄이 오는 길목의 2월 어느 날, 병원에서 마침내 완치 판정을 받는다.
완치 판정을 받고 병원을 나서면서 여린은 생각보다 기분이 무덤덤한 것에 놀랐다. 완치되면 펄쩍 펄쩍 뛸 듯이 기쁠 것 같았는데, 막상 완치되었다는 의사의 말을 들으니 안도와 해방감이 들면서도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병원에서 나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서귀포행 버스가 오자 무심한 얼굴로 버스에 올라탔다. 빈자리를 찾아 앉은 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여린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재이의 노래를 들었다. 재이의 목소리에 실린 멜로디가 귓가에 울리자 그 순간 무덤덤했던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버스가 서귀포에 도착할 무렵,눈을 감은 채 노래를 듣고 있던 여린은 눈바위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