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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Oct 12. 2024

화이트 나잇(White Nihgt)7

[단편소설]

#8. 안개비


여린은 순간 햇빛에 눈이 부셔 손으로 해를 가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지금의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여린은 혹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가 하고 다시 남자의 얼굴을 봤지만 틀림없이

재이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대답 없이 여린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남자는 의아해하며 재차 되물었다.


  "저기요, 왜… 그러시죠?"


  "아, 아니.. 죄송해요.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요. "


여린은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아, 그러시구나. 제가 그분과 많이 닮았나 봐요?"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뭐……."


남자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여린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봄 햇살 아래 빛나는 남자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여린은 남자의 부드러운 눈빛과 싱그러운 미소에 가슴이 설렜다.

  

"돔베낭길 가신다고 하셨죠? 마침  돔베낭길로 가려던 참이거든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요? 그래주시면 제가 감사하죠. 정말 고맙습니다."


여린은 돔베낭길까지 남자와 동행다. 그리고자신의 지식과 기억을 동원해 남자에게 외돌개에 얽힌 설화 주변의 식물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남자와 함께 여린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돔베낭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누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서로 이름을 모르고 있네요. 전 남은성이라고 합니다."

    

     '은성'


여린은 남자의 이름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되뇌며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카노푸스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카노푸스와 은성..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작은 떨림이 일렁거렸다.


은성이 여린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여..여린이에요. 진여린."


여린은 살짝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여린.. 예쁜 이름이네요."


은성은 여린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관광객 같지는 않은데, 육지에서 오신 거 맞죠? 혹시 서울분이세요?"


  "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토박이예요. 관광하러 온 건 아니고요. "


  "역시, 제 짐작이 맞았네요. 그럴 것 같았어요."


  "근데 신기하네요. 제가 관광객이 아닌 것과 서울사람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은성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일단, 제게 돔베낭길을 물어봤을 때부터 알았죠.  서귀포 사람은 돔베낭길을 모를 리 없고, 제주시 사람은 모를 수 있지만 말씨와 억양이 제주인이 아닌 게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제주도 남자들은 이렇게 나긋나긋하지가 않거든요.

그리고, 관광객들은 일반적으로 단체 관광이나 가족단위 관광객들, 올레꾼들이 많고 혼자 관광 다니는 경우도 있지만 흔치는 않죠. 더구나 이런 정장 차림으로는요."


   "아, 그런가요?"


은성은 연신 신기해하면서 여린의 말을 진중하게 경청했다. 여린은 서울 남자인 은성이 제주도에 어떻게 오게 된 건지,

무슨 이유로 혼자서 돔베낭길에 오려한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자못 궁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린은 은성에게 조심스레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 궁금해서 그런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주도엔 어떻게 오게 되신 거예요?"


그러자 은성은 차분한 어조로 여린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네.. 전 바리스타예요. 제주도에는 2년 전에 내려왔어요. 지금은 서귀포에 카페를 오픈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은성의 직업이 바리스타라는 말에 여린은 깜짝 놀라며 반색했다.


   "메깨라!(어머나!) 바리스타시라고요? 정말요?"


은성은 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메깨라'라는 제주어가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메..깨라? 그게 무슨 말이죠?"


  "메깨라는 제주어로 깜짝 놀랐을 때 쓰는 '어머나' 같은 감탄사예요."


  "아, 그렇군요. 제주어는 참 신기해요. 같은 한국말인데도 외국어 같아요. 하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신 거예요?"


은성이 되묻자 여린은 자신의 그동안 품어왔던 꿈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워낙 커피를 좋아했던 여린은 바리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건강을 회복하면서 그동안 내려놓았던 꿈을 다시 이루고 싶어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실은 제가 요즘 바리스타 자격시험을 준비 중이거든요.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예전부터 바리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건강이

안 좋아져서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가 이제 다시 도전해 보려고 공부하고 있어요."


  "그래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모습이 멋지시네요. 바리스타의 꿈을 꼭 이루시길 바라요."


  "고마워요."


여린은 빈말일지라도 자신의 꿈을 응원해 주는 은성의 말 한마디가 진심으로 고맙고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공통의 관심분야인 커피와 바리스타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은성은 파리 유학 중  우연히 커피에 빠져 바리스타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바리스타 강사로도 활동하는 등 바쁘게 살아가던 은성은 펜데믹으로 인해 카페운영이 어려워지고 강사활동도 힘들어지자 모든 것을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 제주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지인의 권유로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지인의 카페에서 일하던 은성은 현재 서귀포에서 카페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데, 개업 준비를 마무리하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돔베낭길을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돔베낭길 산책을 마치고 외돌개 입구 쪽으로 다시 되돌아 나왔을 때,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쾌청했던 하늘이 어느새 먹물이 번지듯 먹구름으로 가득해지더니 이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었다. 당황한 여린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종종걸음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은성은 입고 있던 푸른색 재킷을 벗더니 여린의 머리 위에 씌워 비를 막아주었다.

입구를 벗어나 주차장 근처에 이르자 안개까지 뿌옇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날씨가 왜 이러죠? 방금 전까지 맑았는데..."


  "그러게요. 제주도는 섬이다 보니 특히 서귀포는 더더욱 종잡을 수 없이 날씨가 변화무쌍하긴 하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좀 당황스럽네요."


두 사람은 당황해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안갯속에서 '부르릉~!' 하는 엔진 시동 소리가 들리더니 택시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마침 택시가 오네요. 다행이에요.

같이 타고 가시죠, 여린씨."


은성의 제의에 여린은 망설이다가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의 제의에 따르기로 했다. 둘이 탄 택시는 외돌개를 벗어나 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천천히 달리고,

차 유리창에 빗방울이 방울방울 맺히다

또로록 흘러내린다. 차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성은 여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비가 많이 오네요. 안개도 심하고.. 날씨가 궂어서 이대로 시내까지 가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요."


  "네, 그렇네요. 비도 비지만 안개가 너무 많이 껴서 걱정되긴 해요."


여린의 대답에 은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오픈 준비 중인 카페가 여기서 멀지 않은데 거기에 가서

비가 그칠 때까지 커피도 마시고 얘기 나누면서 쉬었다 가는 것이 어때요?"


은성의 제안에 여린은 잠시 고민하다 그의 제안에 응했다.


    "네, 좋아요."


은성이 택시기사에게 자신의 카페가 있는 동네의 이름을 말하며 그곳으로 가달라고 말하자 택시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 페달을 밟았다.

안갯속을 달리던 택시는 어느 바닷가 동네에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여린은 왠지 이 동네 풍경이 눈에 익었다. 은성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 하얀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예요. 저기 언덕 위에 하얀 건물이 제가 오픈할 카페예요."


택시는 두 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여린은 은성을 따라 언덕 위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언덕길을 올라가서 카페 앞에 다다른 여린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붕도 벽도 온통 하얀빛의 건물.

여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화이트 나잇>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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