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닷가 언덕길
비가 그친 거리에 갑자기 안개가 짙게 피어오르며 정적이 흐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안갯속에서 부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버스 불빛이 다가온다. 안개를 헤치고 달려온 파란색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춰 서더니 출입문이 열린다. 마치 어서 올라타라는 듯 열린 버스 출입문 앞에서 여린은
탈까 말까 망설이다 무엇엔가 이끌린 듯 버스에 오른다. 여린이 올라타자 버스의 출입문이 닫히고 시동이
걸린다. 눈처럼 새하얀 머리와 수염에 붉은 셔츠를 입은 버스기사의 모습이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여린은 버스기사가 정류장에서 복숭아를 건넨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안에는 대여섯 명의 승객들이 있었는데, 저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버스 의자에 기대어 조는 사람, 일행과 수다를 떠는 사람등 제각각이었다. 여린은 버스기사의 좌석 바로 뒤 창가의 빈 자리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기대자마자 피로와 함께 졸음이 몰려와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버스는 안갯속을
하염없이 달리며 마을 몇 개를 지나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깜박 선잠이 들었던 여린은 안내 방송이
울리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이번 정류장은 수성(壽星) 마을, 수성(壽星) 마을입니다."
버스가 멈춘 곳은 바다가 인접한 처음 와보는 낯선 마을이었다. 승객들이 모두 버스에서 내리자 여린도
따라 내렸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바위에 철썩 철썩 부딪히는 파도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여린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함께 마을 어귀쪽으로 향하는데, 물기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휙 하고 스치듯
불어왔다. 갑작스럽게 옷깃 안으로 스미는 한기에 여린은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마을 어귀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에 '수성(壽星) 마을'의 지명 유래와 함께 붉은 도의를 입은 차림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그려져 있고 설명이 적혀있었다.
두루마리 책을 들고 있거나 혹은 불로초나 복숭아를 들고 있기도 하고 사슴이나 학, 선동자와 함께 그려져
있는 이 노인은 '수성노인(壽星老人)'으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인 남극성南極星)을 의인화하여
일컫는 말이며 수노인, 또는 남극노인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여린은 복숭아를 들고 있는 수성노인이
정류장에서 만났던 붉은 옷을 입은 할아버지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풍경도 서귀포 시내와는 다르게 낯선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귀포 토박이인 여린이지만 한 번도 이런 마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을 따라
여린은 천천히 걸어간다. 해안가 근처의 언덕길에 접어들었을 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올드팝이 들려온다.
I left my heart in sanfrancisco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온 내 마음)
토니 베넷
파리의 아름다움은 어쩐지 슬프도록 빛나고
로마의 영광은 이미 오래 전 하루...
지독한 외로움에 빠져 맨하탄에 있다는 것 마저 잊었네..
언젠가 만을 지나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
내 마음을 두고 온 곳.. 샌프란시스코..
언덕 저 위에서 나를 부르는
작은 전차(케이블카)가 별을 향해 오르는 그 곳
아침 안개가 차갑겠지만, 그래도 좋아
내 사랑이 있는 곳.. 샌프란시스코,
바람 일렁이는 푸른 바다가 있는 그 곳..
샌프란시스코여 네가 그리워 돌아갈 때,
빛나는 금빛 태양을 날 위해 비춰주렴
여린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사람들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갔다. 안개가 짙게 깔린 언덕길을 올라갈
수록 노랫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안갯속에서 지붕도 벽도 온통
하얀빛의 건물이 홀연히 눈앞에 나타났다. 은은한 가랜드 조명으로 둘러싸인 건물 앞에 세워진 나무로 된
입간판에 하얀 글씨로 ‘라이브 카페 화이트 나잇’이라고 써져 있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의 하얀빛
라이브 카페는 여린의 마음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