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로 보이는 흐린 잿빛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하다.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은 단풍이 들어
가을빛이 완연하고, 떨어져 쌓인 낙엽이 흙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들을 덮고 있다.
방 안에 켜둔 TV에서는 날씨 예보가 나오고 있다. 올해 서귀포의 11월 기온이 높아 단풍이 늦게 시작되었는데, 11월 말에 이른 지금 한라산 백록담에는 이미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 멘트와 함께 백록담에 하얗게 눈이 쌓인 한라산의 전경이 TV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한라산의 설경으로 가득 채워진 TV화면을 바라보는 여린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무덤덤할 뿐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노란 머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파트 화단주변에 쌓인 낙엽들이 바람결에 흩날린다.
여린은 집을 나서기로 결심하고 외출준비를 한다.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우울감이 밀려와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이 조각조각 찢겨 흩어지고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목이 늘어난 어두운 베이지색 셔츠에 회갈색 코트를 걸쳐 입은 여린은 같은 색깔의 니트 비니를 눌러쓰고
낡고 큼직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맨 채 집에서 나왔다.
딱히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지독한 우울과 불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위로와 힐링이 필요했다. 여린은 발길이 닿는 데로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오후인데도
흐린 날씨 때문에 일찍 어두워져 가는 서귀포의 거리는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차량들, 가게마다 경쟁하듯
밝히고 틀어대는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 요란한 호객하는 소리들이 뒤섞여 북적였지만, 여린의 마음은 스산하기만 했다.
낙엽이 쌓인 보도블록 위를 흐느적거리듯 걷던 여린은 여성복 가게 앞을 지나다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푹 눌러쓴 비니 밑으로 삐져나온 가늘고 힘없는 머리칼은 끝이 엉켜 있고, 생기라곤느껴지지 않는 파리하고 푸석한 얼굴에 초첨을 잃은 눈빛은 공허하고 불안해 보였다. 여린은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항암 치료를 받았던 지난봄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
벚꽃이 만개하던 그해 사월에 항암제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기시작하다가나중에는 감당이 안돼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밀어야 했었다.
거울에 비친 민머리의 자신의 모습이 여린은 낯설고 어색하게느껴졌다. 벚꽃 잎이 바람에 날리던 봄날 오후, 머리를 밀고 나서 집에 돌아올 때의 그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말로는 설명할 길 없는 그때의 심정을
그나마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마도'을큰함(원통하고 서운하고 아픈 마음을 표현할때 주로 쓰는
제주어)'이지 않을까 하고 여린은 생각했다.
면역력 저하로 인해 병원에 갈 때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여린은 창 밖의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 잎을 바라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대니보이(Danny Boy)'를 듣다가
북받치는 감정에 못 이겨 꺼이꺼이 흐느끼며 울었었다.
여린은 지금도 그때의 그 '을큰했던 마음'과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물기를 머금은 축축하고 쌀쌀한 바람이 여린의 야윈 몸을 휘돌고 지나갔다. 코트가 얇아 한기를 느낀
여린은 너무 오래 입어 가장자리가 닳은 코트 깃을 세우고 헐거워진 코트 단추를 다시 제대로 채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십 년은 족히 신은 밤색 앵클부츠의 해진
앞 코를 무심히 내려다본 여린은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횡단보도 앞에 이르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보도블록 위에 빗방울이 점점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빗줄기가 굵어지며 시내의 거리가 젖어들어갔다. 여린은 우산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정신없이 집에서 나온 터라 당황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급한 대로 가까운 편의점으로 들어가 비닐우산을 하나 샀다. 푸른 물방울무늬가 그려져 있는 비닐우산은
보기에 그리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린은 그나마 비를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편의점에서 나와 우산을 펼쳐 쓰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우산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쓸쓸하게 귓전을
두드리고, 비에 젖은 거리를 걷는 발자국 소리와 엇갈리며 톡톡톡.. 또각또각.. 이어졌다.
비가 계속 내리면서 옷이 젖어 추위가 엄습해 왔다.
지난겨울, 암 수술을 받을 때도 오늘처럼 비가 왔었다. 수술을 받는 동안 비가 계속 내렸고, 늙으신 어머니는 수술을 받는 막내딸을 걱정하며 수술실 앞에서 내내 우셨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완전히 회복된 후 병실에 돌아온 여린은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를 보자 수술실과 회복실에서의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상황에안도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여린이 누워있는 침상으로 다가오는어머니는 두 눈이 퉁퉁부어있었다. 어머니는 물에 적신 수건으로 여린의 얼굴을 닦아주며 주저리주저리 말했다.
"느 수술받는 동안 난 혼짓내 저들멍 울멍 시루엇져. 느 어멍 혼자 수술실 앞이 앉앙 얼마나 애가
좆아신지 알암댜?"
"(너 수술받는 동안 난 계속 걱정하면서 울었어. 네 엄마 혼자 수술실 앞에 앉아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알고 있냐)?"
여린은 의식은 회복되었지만 마비가 풀리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어 하염없이 눈물만흘렸다. 어머니는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서 눈물로 범벅이 된 여린의 얼굴을 묵묵히 닦고 또 닦아주었다.
여린은 마른기침을 하며 상념에 젖은 눈빛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의 가로수 잎들이 비에 젖어 축 늘어졌다. 잎새에 미끄러져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서러운 눈물처럼 느껴진다. 거리에는 비가 서서히 잦아들고 안개가 끼기 시작한다. 여린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