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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Oct 12. 2024

화이트 나잇(White Night)2

[단편소설]

#2. 골목끝의 버스 정류장


발길이 닿는 데로 걸으며 서귀포 시내를 배회하던 여린은 시내 외각의 후미진 골목에 이른다.

서귀포 토박이라 시내 방면의 길은 모르는 곳이 거의 없지만 지금 새로 발견한 이 골목은 왠지 모르게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아래 축축한 공기에 섞인 눅눅하고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좁고 어두운 골목은 비가 내리는 날씨에 더욱 음침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화려한 조명과 흥겨운 음악속에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내 거리와 시장과는 달리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골목의 분위기에 여린은 당혹스럽고 살짝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일었다. 

항상 익숙한 길을 걷다가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발견했을 때 여린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어디로 

길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지만 익숙한 길을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낯설고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강하게 일곤 했다. 

오늘 발견한 이 낯선 골목 역시 미지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여린의 발길을 끌어당겼다. 골목에 들어선 여린은 우산을 받쳐 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 골목 안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간판도 없는 허름한 국숫집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모텔, 촌스러운 컬러의 조잡한 그림이 벽과 출입문에 그려져 있는 다방, 옷가게와 수예점등이 있었는데, 건물들이 하나 같이 지어진 지 수십 년은 된 듯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골목을 벗어나자 환한 조명이 켜진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여린은 홀린 듯 불빛을 따라 버스 정류장에 들어갔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정류장의 버스 노선 안내를 확인하던 여린은 외돌개와 매봉 

방면의 버스 노선을 보고 문득 남극성(南極星)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남극성에 대해 검색해 본 적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카노푸스(Canopus)'라고 하며 동양에서는 남극성(南極星), 노인성(老人星),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수성(壽星)이라고도 부르는 평화와 장수를 상징하는 별. 별의 고도가 낮아 북위 37도 18분 이상에서는 수평선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는 서귀포에서만 관측되며 추분(9월 22~23일)부터 이듬해 춘분(3월 20~21일) 사이인 50일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만 관측이 가능한 별이다.

남극성을 보면 행운을 얻게 되고 건강과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설이 있다.]


 카노푸스라는 남극성의 영어 이름이 여린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카노푸스는 여린이 좋아하는 전설적인 록 밴드인 '재이 밴드'와 관련이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이밴드는 30년 전 짧은 활동 기간에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얻었던 전설적인 록밴드인데, 밴드가 해체된 후 지금은 영상으로만 노래와 공연을 접할 수 있음에도 여전히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올드팬들은 물론,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유입된 젊은 세대들에게도 영원불멸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이다. 여린 역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인해 우연히 알게 된 재이밴드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인터넷을 뒤져 리마스터 앨범을 구입할 정도로 열혈팬이 되었다. 재이밴드의 공연영상을 보면 리더이자 보컬인 재이가 항상 은빛 별 장식이 달린 펜던트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 은빛 별이 바로 카노푸스였다. 언젠가 몇 안 되는 희귀한 재이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다가 그가 늘 착용하는 카노푸스 펜던트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을 통해 카노푸스가 남극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남극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서귀포 앞바다에서만 볼 수 있으며 그마저도 추분과 춘분사이 50일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만 만남이 허락되는 별, 남극성을 여린은 절실히 보고 싶었다. 서귀포에서 나고 자랐지만 여린은 단 한 번도 남극성을 보지 못했다. 남극성을 보면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고 지금의 우울함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11월이라 남극성을 볼 수 없다. 남극성을 보려면 내년 3월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린은 정류장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 내년 봄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안하고 막막한 현재의 상황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렇게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있던 여린은 정류장 벽면에 붙여진 록밴드 공연 홍보 포스터에 눈길이 머문다. 평소 록과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여린은 자연스레 록밴드 공연 포스터에 관심이 끌렸다.

 '내가 좋아하는 재이 밴드의 공연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잣말을 뇌까린다.


특히, 밴드의 리더자 보컬인 재이의 팬인 여린은 병원을 다녀올 때마다 버스에서 이어폰을 꽂고 재이의 

노래를 듣곤 했다. 재이의 노래를 들으며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고, 그의 목소리가 위로를 

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린은 간절하게 보고 싶었던 남극성조차 볼 기회를 기약할 수 없는 지금, 서글픔과 절망감이 밀려드는 

마음에 위안을 얻고 싶어 휴대전화를 꺼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이밴드의 노래를 재생한다. 


 "단 혼번만이라도 남은 생(生)이 다 허기 전에 재이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이시믄, 재이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이시믄 얼마나 조코..."

 "(단 한 번만이라도 남은 생(生)이 다하기 전에 재이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다면, 재이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이의 노래를 들으며 여린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덧 내리던 비가 그치고, 비에 젖은 도로에 차들의 불빛이 뒤엉킨다. 흐려진 눈으로 거리의 불빛들을 

바라보던 여린은 어느샌가 기분이 몽롱해진다. 그때 붉은 외투를 입은 할아버지가 차롱(제주도에서 음식을 

보관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뚜껑이 있는 바구니)을 옆에 끼고 정류장으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왔다.

키가 작달막하고 왜소한 체격의 할아버지는 마치 콘헤드처럼 기형적으로 이마가 위아래로 넓고 어깨까지 

늘어진 긴 머리카락과 가슴께까지 길게 기른 수염이 눈처럼 새하얀데 눈빛이 형형하면서도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옆 의자에 앉은 노인은 여린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조캐, 비도 오곡 날도 어두근디 혼자 어디가젠 햄서?"

  "(젊은이, 비도 오고 날도 어두운데 혼자 어디 가려고 하나?)"


여린은 당황해서 딱히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 대답했다.


  "몰르쿠다."  

  "(모르겠어요.)"


노인은 지그시 여린을 바라보고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차롱 뚜껑을 열었다. 차롱 안에는 탐스러운 

숭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여린은 차롱 안의 복숭아들을 보며

'지금은 복숭개가 나올 철이 아닌디, 저 삼춘은 어디서 이추룩 큰큰허고 잘 여문 복숭개를 하영 사와신고?'

'(지금은 복숭아가 제철이 아닌데, 저 어르신은 어디서 이렇게  크고 잘 익은 복숭아를 많이 사 왔을까?)' 

하고 의아해했다. 노인은 차롱에서 가장 큼직하고 잘 익은 복숭아 하나를 꺼내 여린에게 먹어보라며 건넸다.


  "조캐, 어디 아파신가? 얼굴이 너미 유울어신게. 이 복숭개 호나 주크매 먹어봐. 호썰 베롱해질거라."

  "(젊은이, 어디 아픈가? 얼굴이 너무 야위었네. 이 복숭아 하나 줄 테니 먹어봐. 좀 나아질 거야.)"


얼떨결에 복숭아를 받은 여린은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삼춘, 이거 무사 나신디 줨수과? 영 받아도 될꺼꽈?"

  "(어르신, 이걸 왜 내게 주세요? 이렇게 받아도 되나요?)"


여린이 복숭아를 두 손에 받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심스레 묻자 노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기여,  기냥 먹어도 되난 어떵안하여. 이 복숭개 먹은 후젠 아픈 것도 낫곡 좋은 일이 이실거여. 

혼저 먹어보라."

  "(그래, 그냥 먹어도 되니까 괜찮아.  이 복숭아 먹은 후엔 아픈 것도 낫고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어서 먹어봐.)"


 "고맙수다예, 잘 먹으쿠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여린은 노인에게 감사를 전하고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복숭아를 베어 문 순간, 여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마치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붉은 옷을 입은 흰 수염의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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