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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현진 Dec 11. 2024

설경(雪景)

[고훈식 선생님의 詩 '설경' 감상문}

  함박눈을 맞으며

  사나이가 서 있다

  함박눈을 맞으면서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회상을 하며

  담배에 불을 당긴다


  밤이 깊어 캄캄하므로

  가로등이 켜 있는 부분은 밝다

  가로등불이 번지다 멈춘 곳은

  어둠이 짙어

  기차가 한 마리 다가온다


  기차가 지나간 시간에도

  함박눈은 내려

  가로등 밝은 곳만 눈꽃이 부풀고

  사나이가 서 있던 자리에

  짐승 발자국이 찍혀 있다.   


                            -고훈식 <雪景>-



 함박눈이 내리는 밤, 사나이는 담배에 불을 당기며 가로등불 밑에서 여인을 기다린다.

사랑했던 그 여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회상을 하며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밤새 서성이지만 끝내 여인은 오지 않는다. 여인과 사나이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여인은 나타나지 않고 사나이는 '짐승 발자국'만 남긴 채 떠나야 했을까. 여인은 어쩌면 먼발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나이를 태운 기차를 눈물 속에 담으면서 말이다. 여인과 사나이는 사랑하지만 엇갈릴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인해 서로에게 등을 돌려야 했던 것일까.

두 사람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을 것이다. 사랑하지만 이별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  무엇이 그들을 엇갈리게 한 것일까. 눈 내리는 밤, 마지막 사랑을 나눈 여인과 사나이의 가슴 시린 이별이 눈앞에 그려진다.


사나이가 눈을 맞으며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여인을 기다리던 곳, 그곳은 아마 여인의 집이었을 것이다. 사나이가 여인을 기다리던 곳에서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담배에 불을 댕기며 여인을 기다리던 사나이는 불이 꺼진 여인의 집 창문을 올려다본다. 성에가 낀 창에는 커튼마저 드리워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나, 사나이는 여인이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여인이 창문을 열고 얼굴만이라도 보여주기를 사나이는 바랐을 터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어둠이 드리워진 창문에는 불이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밤새 기다려도 여인은 오지 않고 고요한 정적 속에 가로등 불빛만이 사나이를 비춘다. 밤이 깊도록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가로등 불빛에 휘감겨 춤을 추듯 흩날리고, 불빛이 번지다 멈춘 곳은 더욱 어둠이 짙어간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눈이 하얗게 쌓인 거리를 무심히 바라보던 사나이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문다. 어둠 속에 빨갛게 피어오르다 사라지는 담뱃불처럼 사나이의 애끓는 심정이 타들어간다.

 어느덧 기적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사나이는 마음이 초조해진다.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한번 창문을 올려다보는 사나이.  불 꺼진 창은 여전히 냉랭하다. 사나이를 재촉하듯 기적소리가 다시 울린다. 사나이는 마침내 체념하고 돌아선다. 차가운 눈 위에 '짐승 발자국'을 남기며 사나이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야생 짐승 같은 기차가 눈보라를 뚫고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플랫폼에서 사나이는 혹시나 여인이 따라오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잠시 머뭇거린다. 기차를 타기 전에 몇 번이나 기대를 품고 뒤를 돌아보지만 사나이의 뒤에는 짙어가는 어둠과 기차의 불빛 속에 흩날리는 함박눈뿐이다. 사나이는 씁쓸해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천천히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사나이를 싣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사나이를 태운 기차가 떠난 후 눈보라 속에 여인이 서 있다. 멀어지는 기차를 젖은 눈으로 쫓아가는 여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사나이의 짐작처럼 여인은 불 꺼진 자신의 방 안에 있었다. 사나이가 밤새 여인의 집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서성일 때 여인은 불 꺼진 창문 안 어둠 속에서 숨죽여 울고 있었다. 희미하게 기적소리가 울리고 사나이가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여인의 집 창문에 불이 켜졌다. 조심스럽게 커튼을 젖히고 창 유리 너머로 멀어져 가는 사나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인.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눈물 어린 여인의 눈에 사나이가 남긴 '짐승 발자국'이 들어온다.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순수이다.

이윽고 여인은 집에서 나와 황급히 사나이를 뒤쫓는다. 연이어 울리는 기적 소리에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달려가지만 기차는 이미 사나이를 태우고 떠난 뒤이다. 멀어져 가는 기차를 하릴없이 바라보며  눈보라 속에 멍하니 서 있던 여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껴 운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목놓아 우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울린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 여인은 집 앞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걸음을 멈춘다. 사나이가 밤새 여인을 기다리던 곳이다. 불빛에 비친 눈송이들이 무심하게 흩날리고 있다. 여인의 눈길이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곳을 따라 이어진다. 사나이가 남긴 '짐승 발자국' 위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그 위를 가로등 불빛만이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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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시를 읽고 감상문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을 했다. 처음 어쭙잖게 감상을 쓰고 보니 너무 간략하게 써서 성의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부족한 실력에 무작정 길게 늘이자니 되려 스승님의 작품에 누를 끼치는 어설픈 감상문이 될까 봐 쉽게 펜을 들 수 없었다. 깊이 고민하던 끝에 스승님의 시 작품들은 소설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는 특징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감상문을 소설을 쓰듯이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소설 기법을 인용해 시도를 해 보았는데 아직은 습작을 하는 부족한 실력이라 스승님 작품에 누가  된 건 아닌지 염려가 되고 송구한 마음이다. 초고를 쓴 후 여러 해가 지나서야 수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 또한 스승님께 죄송스럽고, 게으른 나 자신을 탓하며 글을 마감하는 바이다.


                        - 2015. 4. 10.-



9년 전 나의 문학스승님이신 故고훈식 선생님이 운영하시던 문학회에서 활동할

당시 문예창작 수업을 받으며 썼던 글입니다. 문학회에서 막내 라인에 속했던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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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이 밤, 이제는 뵐 수 없는 선생님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학회 활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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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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