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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20. 2023

옷장 속이 빛날수록 나도 빛난다

옷을 고르며 삶을 배우다

어떤 옷을 걸쳐도 시원 찮았다. 

분명 이 블라우스만 입으면 꽤나 러블리 해지는 것 같은데. 어떤 재킷을 겉에 입어도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옷의 구색을 맞추는 데 제법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노카라 재킷을 입어도 네이비 컬러의 점잖은 트위드 재킷을 입어도 꽃무늬 블라우스만 혼자 살아남아 내 얼굴 주변을 동동 떠다니는 것 같았다. 


쿨톤인 내게 잘 어울릴 것만 같아서 구매한 소라 색 니트도 그랬다. 내가 소장한 어떤 재킷도  이 옷을 소화시키지 못했다. 잊었다 하면 아름다운 가게에 가서 옷을 이것저것 사 입으며 코디에 대한 감각을 꾸준히 길렀다고 생각했는데. 

망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레이 색 머메이드 치마가 생각났다. 딱 들러붙는 티를 입으면 똥배가 두드러지는 그 치마와 함께 할 상의를 못 찾아 쩔쩔맸다. 소라색 니트와 그레이 치마 둘의 조합을 거울로 보았을 때 감이 왔다. 


‘이거다.’


옷의 배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청으로 만든 백팩을 메었더니 젊은 척하고 싶은 아줌마가 거울 속에서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검은색 숄더백은 어떨까? 생각보다 너무 점잖았다. 머리도 몽실이처럼 잘라서 내게 귀여운 모습도 있는 것 같은데. 

검은색 크로스 백을 다시 어깨에 메고 흰색 스니커즈를 골라 신었더니 설레기 시작했다. 여성스러우면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입고 빨리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내일 입을 옷은 너로 정했다. 













옷을 내 입맛에 맞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비용이 들었던가. 어떤 부분에 있어 충동적이고 중독의 성향이 있는 나는 아름다운 가게에서 저렴한 옷을 맛보고 거길 끊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와중에도 옷들이 어른어른 거렸다. 참지 못하고 버스를 타고 가게를 가서 이상한 옷들을 하나 둘 사 와서는 집에 돌아와 입었다가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잡았다 하면 몇 천 원 밖에 하지 않는 옷들이지만 그것도 소비의 하나였다. 몇 천 원이 쌓이니 몇 만 원이 되었다. 집에서 입어보니 구닥다리 같아서 헌 옷 수거함에 버려버린 옷도 얼마나 많았던지. 환경을 생각한다고 구매했으면서 말도 안 되게 옷을 버렸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Unsplash의Verne Ho




사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게 어렵다면 생각을 달리하자고 마음먹었다. 안 입는 옷은 다시 반품하고 정말 나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찾는 여행을 시작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옷을 사니 가볍게 소비하던 무게의 중심이 다르게 여겨졌다. 



하나를 사도 그냥 구매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핏이 나올 때까지 여러 번 입고 벗었다를 반복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옷이 없는 날이면 빈손으로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너무 자주 가서 내 얼굴을 익히는 게 아닐까 하며 주위를 의식했지만 이 참에 그런 눈치 보는 일들도 고쳐 보자며 더 부지런히 가게에 들렀다. 

그렇게 몇 년을 드나들었을까. 점점 내 스타일의 옷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었을 때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은 남의 눈에도 예뻐 보였던 모양이다. 명품 가방을 들고 나타나서 완전 멋있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아름다운 가게 옷에 대한 찬사는 듣기 좋았다. 내 안목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아서  옷 고르는 일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났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뀔 때마다 높아진 자신감은 확 떨어졌다. 작년의 옷들이 올해에는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또 계절에 맞게 옷장을 다시 채운다는 게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다시 매장 봉사자님들의 눈치를 혼자 살피고 또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시간들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렇게 노력을 거듭할수록 옷장 속은 다시 나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가 도전하고 실패하고 경험해서 쟁취한 나만의 옷장은 내일을 설레게 만들 어 줄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옷처럼 삶도 마음에 드는 것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과연 내가 원하는 입맛대로 삶을 꾸릴 수는 없는 걸까.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옷장을 채우며 삶의 많은 부분을 배워 나갔다.



Unsplash의Melissa Askew


옷장 속에는 작은 나만의 우주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옷을 고르며 깨 달았다. 

나에게는 옷을 사며 실패한 것에 대한 좌절을 견딜 단단한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필요한 일에는 때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는 것도 만족스러운 옷을 찾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백화점에 파는 값비싼 옷들이 아닐지라도 나를 빛 낼 수 있는 것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불한 옷에 대한 대가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게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름다운 가게라는 이름만큼 아름다운 소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 아름다운 가게를 빛내는 봉사자님들의 너른 마음을 배우고 여기에 모인 이웃들이 자신을 가꾸는 일에 소홀하지 않다는 것을 보며 나도 나를 꾸미고 돌보는 일들에 소홀하지 않으려 애썼다.



몇 년 전, 모피가 달린 코트를 입고 백화점 문화센터를 활보하던 그 엄마 곁에서 느꼈던 좌절감은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릴 수 없었다. 나도 내가 가진 것으로 원하는 스타일을 추구하며 나만의 작은 우주를 만들고 있었던 까닭이다. 


옷장 안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채워질수록 나는 더 빛나고 있었다. 

몇 천 원짜리 옷들의 조합은 내게 몇 만 원 이상의 값어치를 해 주었다. 그 앞에서 옷 입기를 즐기며 웃고 있는 내가 서 있었다. 

그건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나를 위한 선물과 같은 것이었다. 


Unsplash의Joshua L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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