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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소나 Sep 21. 2024

처음 해 보는 마음 털어 내기

고백, 그 후

마음을 토해냈다. 적어도 내 상황에서는 고백보다는 토해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평소 이것저것 좋아한다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 대상이 “너”가 되는 순간, 말이 목구멍에 막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몰랐다. “너 좋아해”라는 이 단순한 네 글자가 그리도 어려운 말인지. 그 동안 나에게 마음을 표현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머리 숙여 인사하고 싶을 정도다. 큰 절이라도 올리고 싶다. 용기 내어 표현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어요, 하면서.  


참 우스운 상황이었다. 고백에 서툰, 서른이 훌쩍 넘은 한 여자가 만들어낸 황당한 상황이었다. 일하는 도중 그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 충동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래, 오늘이다! 퇴근 후 집에 와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버튼을 정말 어렵게 눌렀는데 받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짰다. 왜 안 받는 거야..그냥 하지 말까? 정말 도망가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친구로 지내도 되지 않겠냐고 합리화하면서 오늘도 그냥 일상적인 얘기나 할까 싶었다.


몇 분 후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용건을 말해야 했다. 평소에 전화도 카톡도 먼저 하지 않는 내가, 무슨 용건이 있어 먼저 통화를 하자고 한 건지 입을 떼야 했다. 내가 말했다.


네가 섭섭해 할 수도 있는 말이야.
내가 앞으로 너랑 연락이 안 될 거야.

왜냐면, 너를 차단할 거거든.


응? 휴대전화 너머로 당황해 하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통화 너머로 들리던 게임 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친구가 이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연락 차단을 통보하는 사람이 어딨냐면서, 보통은 그냥 자연스럽게 차단하지 않냐고 웃었다. 나도 이 상황이 어이없어 실없이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분명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카톡을 잘 주고받던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해서 자신을 차단하겠다고 말한다니. 황당할만했다.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각한 건 카톡 차단이었다. 나는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하지 않고, 그 친구의 계정도 모른다. 그 친구가 문득 생각날 때 가장 먼저 들여다봤던 건 카톡 프로필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한 일이 별로 없는데, 그 중 몇 번의 동기가 모두 프로필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 계기도, 잘 바뀌지 않던 프로필이 계속 업데이트되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런 감정 소모를 없애기 위해 카톡 차단이 필수였다. 매일 사용하는 카톡에 그 친구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원상복구 되겠지,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차단하는 건 성격 상 불가능했다. 싸운 적도 없는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나라면 나의 잘못부터 의심할 거 같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친구에게 네가 차단당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해줘야 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황당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내가 서툴렀다는 걸 인정한다. 다행스럽게도 친구는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해줬다. 이렇게 먼저 통보 받고 차단당한 적은 없지만 주변에 종종 아무 말없이 자신을 차단한 친구들이 있었고, 본인도 그럴 때가 있었다면서. 웬일로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차단 통보에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 친구는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서. 친구가 계속 궁금해 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차단을 하면서까지 감정을 정리 해야 하는지. 너를 좋아해서,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단순한 말을 담백하고 진심을 담아 얘기하고 싶었지만 턱 끝까지만 차고 입 밖으론 도저히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엔, 나에게 어쩌다 이런 상황이 닥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실없이 웃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번지점프하기 직전의 감정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되는데, 잠깐의 무서움만 참으면 결국 해냈다는 성취감과 후련함이 남을 텐데, 떨어지기 직전 발을 내디딜까 말까 하며 전전긍긍 대는 두려운 감정과 가슴 떨림. 그 순간에 그런 감정을 느꼈다.


결국, 네가 좋아 같은 만화책에서나 나올법한 말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에둘러 표현했다. 너한테 더 이상 친구 감정이 아니라고. 알아들은 그 친구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머리가 어지럽다고 표현했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감정을 그 친구가 알았을 리 없다. 친구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어쩌면 가해자 입장인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엔. 말을 하고 나니 정말로 번지점프 하고 난 후의 후련함 같은 걸 느꼈다. 심장도 미세하게 두근거렸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카톡과 연락처를 차단하겠다고 전했다. 이 통화를 끝으로 연락할 일도, 만날 일도 없이 안녕이라고. 그래도 길가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면 인사는 하자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휴대폰에서 그 친구의 흔적을 지웠다. 그 친구와 알게 된 지 1년. 급격하게 친해진 건 반 년도 안 된다. 40분 정도의 통화로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이 끝이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했나 싶기도 하다. 친구의 감정은 어떤지 물어보지도 않고 너무 내 감정만 앞세운 건 아닐까.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지, 물어봤어야 하나. 그 친구에겐 찰 기회를, 나에겐 차일 기회를 주지도 않고 오로지 내 통보 만으로 이 관계를 끝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사실 그 친구의 감정은 알고 있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나를 이성으로 보진 않았지만 친구로는 좋아했다는 걸 단언할 수 있다. 그 친구가 좋아하던 이성친구가 있는데, 그 둘을 이어주려 했던 게 나다. 그 친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 때였다. 둘 사이가 안 좋아지고,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어쩌면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이 이 미안함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나는 그 친구가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행동을 하는지, 어떤 이성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 친구에 대한 내 감정을 확인하고 인정한 순간부터 차인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게 불과 한 달 만에 일어났다.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고백하기까지. 이런 감정이 낯설어 나는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던 거 같다. 어차피 친구 이상으로 발전한 수 없는 관계인 걸 알았으니 시간을 끌어 불씨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 친구는 통화를 마무리 하면서 상처 받았다고 말했다. 더 친해지고 깊어지기 전에,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 전에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친구를 잃은 것에 대한 상처 쯤은 훌훌 털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즐거운 나날을 보낼 친구다. 미안한 마음을 금방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기적인 고백이라며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도 나의 이번 선택이 성숙하지 못하고 충동적이며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욕먹을만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조심스레 고백했어야 하는데, 나는 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감정을 툭 내던졌다. 나는 홀가분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대방은 당분간 혼란스러울지 모른다. 비워낸 마음에 다른 사람이 채워지면 그땐 좀 더 성숙하게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다.


욕먹어도 할 말 없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내 모습을 봤다. 30여년 평생 한 번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 본 적 없는데, 나도 이렇게 마음을 열고 용기 내서 먼저 고백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외모, 성격 등 어느 하나 내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 사람 있는 그대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항상 수동적으로 누군가가 다가와야지만 시작했던 관계를 내가 먼저 다가가 시작해 볼 수 있겠다는, 아주 조금의 용기와 자신감도 얻었다.


연락처 차단으로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이 바로 정리되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나에게 차단 행위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다. 당분간은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하며 틈이 생길 때마다 불쑥 튀어나올 거란 것도 안다. 억누르지 않으려 한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둘 예정이다. 일상을 차곡차곡 바쁘게 채워 나가면서 정리하면 새로운 사람이 들어 올 공간도 생길 거라 확신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짝사랑 중인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짝사랑 진통 중인 모든 이들이 언젠가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채울 수 있는 인연을 만나 찐 사랑을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에게도 곧 그런 인연이 찾아오길. 그땐 놓치지 않고 좀 더 성숙한 자세로 대처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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