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시작했다. 유행의 틈에서 생겨난 의지는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마라톤과 등산은 매년 가을께쯤 생각나는 이벤트다. 나는 달리는 것보단 등산을 좋아하는데, 작년 가을엔 다리를 다쳐 가을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무릇 가을이란 등산 좀 다녀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하며 가을을 보내는 나는 올 해는 10년 전 했던 마라톤이 떠올라 결국 11월에 하는 늦은 마라톤에 등록했다. 그 힘든 과정을 참가비를 내가며 하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달릴 때의 고통을 이겨내고 완주했을 때의 성취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등산도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오를 때는 내가 이걸 왜 시작했지, 후회하면서도 올라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풍광과 선선한 바람, 흙냄새를 느끼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체력이 매우 약한 나는 마라톤이든 등산이든 주로 앞에서 이끌어 주는 친구가 있었다. 웬만하면 나보다는 힘이 좋은 친구들은 내 페이스에 맞춰가며 나를 독려한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나는 아무 말 없이 힘을 낸다. 마라톤과 등산은 결국 나 혼자와의 외로운 싸움이다.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없고, 내 발을 내 의지로 움직여야 원하는 목표 지점까지 다다를 수 있다. 자신과 힘겹게 싸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며, 그 존재로부터 독려와 응원을 받으면서 힘을 내고, 뛰고, 오른다. 낯간지럽게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늘 뒤처지는 나를 맞춰주며 함께 뛰고 오르는 친구들이 있어 얼마나 행운인지.
내가 해 본 건 고작 10km 마라톤이다. 여기서 ‘고작’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남의 기준에 빗대었을 때고, 나한테는 10km도 벅차다. 처음 마라톤을 했을 때 3km도 채 가지 않았는데 고비가 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도저히 달릴 수 없을 거 같아 포기할까 싶었다. 당시 러닝메이트였던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버티며 뛰었는데 놀랍게도 3km가 지나니 힘들긴 했지만 숨도 잘 쉬어지고 뛸 만해졌다. 그렇게 10km를 완주하게 됐는데 그 때의 성취감은 10년 후의 내가 그 때를 생각하며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게 될 만큼 꽤나 강렬한 감정이었다. 아직 러너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순 없지만, 살면서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마라톤의 경험을 떠올린다. 지금 이 힘듦의 ‘3km의 고비’는 어디쯤일지 생각하면서.
최근엔 동네에 러닝메이트가 생겼다. 낯가림이 심해 늘 친한 사람들과 뛰어봤던 내가 낯선 누군가와 함께 뛴다는 건 나로선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5km쯤은 가볍게 뛰고, 4분 페이스로 달리는 건장한 체격의 친구는 그 두 배의 페이스로 뛰는 나를 맞춰주느라 제대로 뛰지 못한다. 덕분에 나는 조금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목표했던 만큼 뛰게 된다. 혼자 뛰었다면 2km쯤에서 뛰기를 멈추고 걸었을 것이다. 한 번은 종합운동장의 큰 트랙에서 혼자 뛰었는데, 유행 때문인지 뛰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트랙 별로 하나씩 자리를 잡고 뛰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면,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고 말도 섞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없이 응원을 받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보다 잘 뛰는 사람들의 페이스에 맞춰 경쟁하며 뛰기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나에게 적당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원하던 목표치를 완주하면 나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 러닝 동호회가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SNL TV프로그램에서 동호회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재밌게 풍자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러한 유행과 풍자 때문에 정말로 함께 달리기를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은 특히. 그냥 아무 운동화나 신고 무작정 사람들이 많이 뛰는 곳으로 나가보는 건 어떨까. 러닝 동호회가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혼자 뛰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 틈에서 뛰며 마음속으로 러닝메이트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뛰다 보면 언젠가 정말 좋은 러닝메이트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