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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an 21. 2024

편지

    선생님께,


    잘 지내시나요? 저는 별 일 없이 지내요. 상담을 받은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네요. 종종 선생님께서 마지막 회기 때 하신 말씀을 떠올리곤 합니다.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다시 불안이 찾아와도 잘 받아들였다가 흘려보낼 힘이 있다던 말이요. 불안이 넘실댈 때면 그 말을 곱씹어 봅니다. 그러면 어느새 물이 잔잔해져요.


    그동안 이직도 해 보고, 새로운 취미도 가져 보고, 관계를 시작하거나 끝내 보기도 했어요. 한 해가 다양한 시간으로 꽉 차 있습니다. 많이 변한 것 같기도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해요. 뚜렷하게 그대로인 건 1인가구라는 점뿐인 것 같네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점은 여전히 큰 위안입니다. 그래도 이제는 누군가를 받아들일 틈이 생긴 것 같아요.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생겼거든요. 낯선 감각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타인과 공간을 공유할 마음은 아직 없지만, 마음의 방 정도는 열 수 있겠어요.


    가족과의 적당한 거리감은 제법 마음에 듭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나의 쓸모를 찾지 않고, 필요할 때 한 번씩 연락하는 정도의 관계요. 아빠가 재혼하고 동생도 결혼하면서, 거리감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이제 가끔은 가족을 통해 안정감을 얻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참 묘해요. 가족이란 뭘까요? 뭐였을까요? 저는 왜 그런 방식으로 저를 증명하려 했을까요? 왜 우리 가족은 한 번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을까요? 여전히 많은 질문이 떠다니고, 명쾌하게 답이 내려지지는 않아요. 이렇게 모호한 채로 살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눙칠 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잠은 잘 못 자요. 어느 날엔 다시 물속에 가라앉는 느낌이다가 다른 날엔 체한 것처럼 가슴이 꽉 막히곤 해요. 그럴 때마다 새삼스레 내 안의 덩어리를 느낍니다. 고체인지, 액체인지, 기체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가족과 얽힌 제 과거인지, 새롭게 부딪히는 어려움인지도요. 어렵고 괴로운 관계는 가족이 아니라도 많더라고요. 살아있는 한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할 테죠.


    그래도요, 선생님.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어요. 이 말을 하고 싶어 펜을 들었습니다. 변화도, 새로운 고민도, 물이 흘러서 느끼는 감각인 것 같아요. 다시 고이지는 않을 거예요. 다시 고인다면 또 흐르게 할 방법을 찾을 거고요.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거예요.


    새삼스레 쓰는 다짐의 편지가 조금 웃기지만, 새해를 맞아 선생님께는 얘기하고 싶었어요. 이 편지를 보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부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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