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른 지역으로 떠난 뒤엔 가족이 모여 산다는 느낌이 확실히 옅어졌다. 동생은 여전히 주말마다 빨랫감을 들고 왔고 방학 때면 함께 살았지만, 일상을 공유하는 느낌은 없었다. 종종 서울에 오는 아빠는 더더욱 손님 같았다. 아빠가 집에 오면 다시 돌아갈 때까지 주로 방 안에만 있었다. 아빠가 떠난 뒤로 집안일은 반쯤 포기했다. 최소한의 것들만 하며 살았다.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죄책감을 외면하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집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존재는 동생이 데려 온 강아지뿐이었다. 나는 강아지를 내다버리고 싶어하면서도 강아지에게 의존했다. 강아지가 불쌍하면서 미웠고, 미우면서 사랑스러웠다. 가장 큰 마음은 미안함이었지만, 미안한 만큼 잘해주진 못했다. 어쩌면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가도 엄마가 나만큼 나쁜 보호자는 아니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을 다녔다. 여행 갈 날만 기다리며 일상을 버티다, 다녀온 후엔 그 추억을 곱씹으며 다시 여행 갈 준비를 했다. 집회 정도에만 나가던 사회참여는 단체 활동을 시작하며 조금 더 본격적으로 변했다. 만나는 사람들의 폭도 넓어졌다. 이때쯤 양성애자라는 것을 확신했으나, 연애로 이어지진 않았다. 할 때도, 안 할 때도 연애는 언제나 가장 뒷순위였으니 취향의 자각이 오히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보다는 졸업이 다가오며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남들보다 늦은 입학에 늦은 졸업이니 조바심이 안 들기 어려웠다. 그때도 아르바이트는 쉬지 않았다. 평일엔 과외를 하고 주말엔 박물관에서 일했다. 열심히 산다는 감각은 없었지만, 정신없이 살기는 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생활을 그만두고 정규직 일자리를 얻었을 때였다. 외면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던 쓸모의 증명이 경제력의 획득과 함께 완전히 부서졌다.긴 세월에 비해 허무한 끝이었다. 부서진 의무의 잔해는 고인 물이 된 바닷속으로 금세 가라앉았다. 부서지면 뭐가 남을까 두려웠던 마음이 우스울 만큼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을 바라보는 시간이 제법 오래갔다.
스무 살 언저리부터 시작된 유언 쓰기는 꾸준했다. 때마다 갱신하는 유언장에는 대개 비슷한 내용이 적혔지만, 꾸준히 다시 썼다. 죽음을 떠올리면 시끄러운 것들이 가라앉아 고요해졌다. 고요함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었으나, 여전히 죽을 용기는 없었다. 시끄러움도 고요함도 살고 싶은 마음에서 뻗어 나왔음을 알고 있었다. 살아도 되는지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공허가 된 의무감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희미하다. 살아있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던 끝만이 뚜렷이 남아있다.
의미를 부여하든 말든, 살아있는 현상은 그대로였다. 가족을 잡아먹은 불행에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다면 내가 살아있는 데도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거였다. 쓸모라는 명분을 주든 안 주든 삶이 이어졌듯이. 그 모든 버둥거림이 내 자의식 외에는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듯이. 그래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아빠와 동생이 부여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던 쓸모의 증명을 완전히 그만두려면 집에서 나와야 했다. 그게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리고 취업 일 년 차에 드디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준비를 마쳤다. 대학 졸업과 군대까지 마친 동생이 강아지를 데리고 자취를 시작한 뒤였다. 원룸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내 짐과 나머지 짐을 구분해 정리하며 이사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이삿날엔 마음이 꽤 벅찼다. 휴가를 내고 서울에 온 아빠는 오피스텔에 들러 내 짐을 같이 나른 뒤, 나머지 짐을 실은 이사 트럭과 함께 아빠 집으로 떠났다. 혼자 남아 음악을 틀고, 새 집을 청소하고, 짐을 풀어 하나하나 정리했다. 정리는 하루 만에 끝났다. 5평짜리 공간은 금세 내 짐으로 꽉 찼다. 모텔을 개조했다는 원룸 오피스텔에는 불법 개조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현관 안 쪽에서 비상구가 초록빛으로 빛나고, 완강기가 거꾸로 달려 있는 따위의. 그래도 아늑했다. 내 초대 없이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집. 아빠 방도, 동생 방도, 엄마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는 거실도 없이 내 방만 있는 집. 왜 엄마가 아닌 내가 살아있는지 묻지 않아도 되고, 내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온전한 나의 집이었다.
첫날밤엔 조금 울었다. 엄마가 죽은 날 태어나 흘러들어온 바다는 여전히 내 안에 고여 있었다. 공허도 여전했다. 가족을 향했던 쓸모의 증명이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물리적이고 경제적인 삶의 무게가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랫동안 어딘가에 묶여 있던 삶이 비로소 풀려난 느낌만으로도 숨통이 틔었다. 오래도록 고여 있던 물이 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로 흘러갈진 알 수 없었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감각이 생경했다. 삶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