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죽은 후 처음으로 동생과 싸운 날은 처음으로 동생이 울며 소리 지른 날이기도 하다. 그때 동생은 열여섯 살이었다. 싸움의 원인도 끝도 기억나지 않지만,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던 빨간 얼굴과, 화를 참지 못해 쾅쾅 구르던 발과, 악에 받쳐 갈라지던 변성기 남자애의 목소리는 언제나 생생했다. 내가 죽고 싶을 때 누나가 해준 게 뭔데. 가족 노릇 하려 들지 마. 걔가 뭐 때문에 죽고 싶었는지는 몰랐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고작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애가 죽고 싶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현상만이 중요했다. 그 후 평소 말이 없던 동생은 싸움이 시작될 때마다 눈물로 서러움과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계기가 생기면 그간 쌓아 두던 감정이 함께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내게는 열여섯 살의 동생이 겹쳐 보였다. 그러면 어느새 싸움의 이유는 뒤편으로 사라지며 동생의 눈물만 남곤 했다. 동생에겐 늘 힘든 이유가 있었고, 나는 늘 그걸 몰랐다. 동생이 서럽게 흐느끼며 이유를 늘어놓아도 대개 공감하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하는 만큼 미안했다. 학업, 진로, 인간관계, 연애. 동생이 힘든 이유는 매번 달랐다. 어쩌면 그건 피상적인 이유였을지 모른다. 엄마를 잃은 후 우리는 한 번도 서로의 마음을 나눠본 적 없었으니까. 늘 자기 인생이 버거운 애에게 뭘 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힘든데 왜 가족까지 날 힘들게 하냐’는 단골 대사에도 할 말이 없었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 싸우다 동생이 울면 사과하는 상황만 반복되었다.
동생이 지역에 있는 국립대에 입학하며 싸움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주말에만 집에 오는 동생은 매번 빨랫감을 들고 왔다.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학교로 돌아갈 때 챙겨 가곤 했다. 간혹 동생이 빨래를 할 때도 있었다. 횟수는 6년 동안 열 손가락이 채 안 접힐 만큼 손에 꼽았다. 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데려 온 강아지는 동생이 대학에 간 뒤로 나와 둘이 사는 셈이 되었다. 주말에 집에 오면 동생은 평일에 못 본 만큼 강아지를 예뻐해 주었다. 꼭 강아지와 함께 잤고, 종종 산책을 시키거나 씻겨 주었다. 강아지의 배변 패드를 갈거나 똥을 치우는 일은 예뻐해 주는 일과 별개였다. 동생은 하루에 한 번만 그 일을 했다. 그 뒤로 내가 하지 않으면 주말이 지날 때까지 절대 하지 않았다. 동생에게 평일은 없는 요일이었으므로, 평일에 내가 강아지를 돌봤다는 이유로 주말에 자신이 돌보는 건 공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강아지가 배변 패드가 아닌 곳에 똥을 싸도, 이불에 오줌을 싸도 그대로 두었다. 주말이 갈 때까지 그대로 두다가 집을 떠났다. 그러면 강아지의 배변 패드도, 오줌 싼 이불도, 바닥에 싼 똥도 내게 남겨졌다. 다 돌리지 못한 빨래, 먹고 남은 음식과 설거지 거리, 쓰레기, 먼지 쌓인 바닥과 함께. 치우는 동안 쌓이는 화는 일주일이 지나며 희석되었다. 그런 주의 반복이었다.
동생과 나는 둘 다 대학생이었지만 우리의 본분은 달랐다. 공부가 본분인 동생과 달리 내 본분은 가사노동이었다. 아무도 내게 그러라고 하지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그랬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나는 어느새 집 자체가 되어 있었다. 이 집에 사는 한 나는 집을 가질 수 없어.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면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고인 물이 되어버린 바다에 들어가 두 손을 놓았다. 깊게 가라앉을수록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은 희미해졌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일 년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다 털었다. 두 달 여의 여행 일정에 맞춰 아빠와 동생에게 최소한의 집안일 목록을 공유했다. 나 없는 동안 잘 치우고 살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의무를 저버린다는 배덕감도 있었다. 돌아왔을 때 집은 깨끗했다. 동생은 그동안 혼자 어떻게 다 했냐며 엄살을 부렸다. "누나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어." 집을 떠날 때의 해방감이 무색하게도 그 말이 존재 이유를 단숨에 채워 주었다. 나는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이구나. 뿌듯함과 안도가 몰려왔다. 몇 개월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잊은 채 기꺼이 본분을 다했다.
그해 연말에는 이사를 하기로 했다. 엄마가 죽은 후 첫 이사였다. 아빠는 일 년 뒤 직장을 따라 타지로 갈 예정이고 동생은 방학과 주말에만 집에 오므로, 집이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였다. 기말고사 기간이었지만, 공부보단 집을 알아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어떤 집이 좋을까, 어느 동네로 갈까, 생각하면 즐거웠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든 어떤 집도 아빠와 동생의 마음엔 들지 않았다. 나는 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고 둘은 머물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새로운 집은 아빠의 뜻에 따라 정해졌다. 돌이켜 보면 아빠가 정한 집이 확실히 더 좋았다. 하지만 당시엔 한 달여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분했다.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집을 정한 다음 날부터 기말고사와 본격적인 짐 정리가 시작된 덕에, 분함이 오래갈 틈은 없었다. 각자 자기 짐을 정리한 후 남은 공용의 짐은 내 몫이었다. 주방과 거실, 베란다에 있는 모든 물건이 공용 짐이었다. 거기엔 방치해 둔 엄마의 흔적이 많았다. 엄마의 취향, 엄마와 아빠의 역사, 엄마가 만들고 가꾼 집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몇 주 동안 그걸 정리하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엄마의 레시피를 적어둔 요리 책을 발견했을 때, 엄마가 꾸준히 만들어 둔 성경 해석본을 정리할 때. 천 권이 넘는 책 사이사이에서 엄마와 아빠가 남긴 메모와 편지를 봤을 때, 있는 줄도 몰랐던 사진 앨범을 여섯 권이나 발견했을 때. 스무 살부터 꾸준히 적은 엄마의 일기를 발견했을 때. 누렇게 바랜 종이에 또박또박 쓰인 엄마의 글자들이 전혀 몰랐던 이야기를 전해줄 때. 그 안에서 간혹 내 과거를 찾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더라. 훔쳐본 엄마의 기억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그러나 나에 대해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는 흐릿하다. 그 일기들을 모아뒀는지, 버렸는지도.
공용 짐 정리를 가장 많이 도운 건 아빠였다. 주말이면 아빠 차에 엄마의 옷을 가득 실어 아름다운 가게를 찾았다. 이 정도 양이면 아름다운 가게가 기증한 엄마의 옷으로 가득 차도 이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오래된 책 중 가져갈 책과 버릴 책을 고르는 일에도 어느 정도 참여했고, 이삿날 아침에도 함께 했다. 이런저런 정산과 계약을 마무리하고, 새 집까지 나를 실어준 뒤 회사로 돌아갔다. 이사는 늦은 오후쯤 끝났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보내고 나니 새 집엔 짐이 가득한 박스와 먼지, 나만 남았다. 포장이사였지만 자잘한 짐이 너무 많아 다 정리해 줄 순 없다고 했다. 가구마다 오래 묵은 먼지와 이사 중 새로 생긴 먼지가 뒤섞여 하나하나 닦아야 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청소와 정리는 자정까지도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일주일 내내 집을 치우고 물건을 정리하며, 엄마는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다 했을까 생각했다. 어린 시절 이사 기억이라곤 내 방이 생겼다며 기뻐했던 것뿐이니, 엄마 혼자 이걸 다 했을 텐데. 그때 엄마는 암이 재발한 후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종일 집구석구석을 닦고, 치우고, 채워 넣다 보면 눈물이 났다. 이유는 모호했다. 밤이 되고 아빠가 오면 신이 났다. 이 역시 이유가 모호했다. 어디를 어떻게 정리했는지 하나하나 늘어놓은 뒤, 잘했다는 칭찬이 돌아오면 뿌듯함과 안도를 느끼며 잠에 들었다.
햇살이 느껴지면 반사적으로 울던 낮과 퇴근한 아빠를 붙잡고 칭찬을 갈구하던 밤의 반복이 끝날 때쯤 동생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돌아온 동생을 맞이한 새로운 집은 동생 방을 제외하고 완벽히 깨끗했다. 동생의 짐이 든 상자는 동생 방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자기 짐은 자기가 정리하기로 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상자에 공용 짐이 섞여 있었다는 점은 문제가 되었다. '내 방이 창고냐'는 질문에, '주말에만 온다고 가족 취급 안 하냐'는 빈정거림에 서러움이 넘실거렸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싸우고, 동생이 울고,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동생에게 미안하지 않았다. 서러워하는 동생을 보며 처음으로 열여섯 살 동생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반복되던 나의 낮과 밤이 떠올랐다.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다 사람이 아니라 집이 되었다고 느끼던 하루들이 떠올랐다. 소리야, 네가 잘해야 돼. 장례식에서부터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말을 처음으로 거부하고 싶어졌다. 왜 나만 잘해야 하지?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쓸모를 입증하느라 아등바등 거리는 게 다 무슨 소용이지? 방을 정리해 주지 않았다며 서러워하면 그만인데. 동생이 생득적으로 부여받았다고 생각한 권리,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한 아빠의 역할이 내 안에서 삐걱대었다.
그날 동생의 서러움은 내 화에 묻혔다. 그러나 아빠도, 동생도, 화의 근원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 죄책감이나 쓸모에 대한 강박 따위를 입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말할 수 없었고, 말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그래도 아빠와 동생은 한 동안 집안일을 열심히 거들었다. 거들 때마다 ‘오늘은 이걸 했다’며 보여 주었다. 퇴근한 아빠에게 오늘은 이만큼이나 짐을 정리했다며 칭찬을 바라던 내 모습과 닮은 꼴이었다. 둘에게 칭찬과 감사를 전할 때마다 마음이 침잠했다.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챗바퀴를 돌며 이어졌다. 왜 저들은 고작 저 정도로 뿌듯해하지? 그동안 나는 뭘 한 거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내 삶이 엄마의 죽음 위에 놓여 있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이 집에 사는 한평생 이래야 하는 걸까? 답답함에 숨을 잘 쉬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다. 가끔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면 머릿속의 내가 나 대신 소리를 질러 주었다. 쓸모의 증명을 그만둘 용기는 없었으나, 견고했던 의무감은 부서지고 있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의무감과 끊임없이 부딪혔다. 의무감이 다 부서지고 나면 뭐가 남을지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