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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Oct 09. 2023

6. 잉여 인간의

    난 잉여 인간이다. 이 생각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시발점이 아니라 끝이다. 엄마는 가사를 책임지고 아빠는 가족을 부양하며 동생은 남자라는 의미를 갖고 태어났으므로 나만 이 가족 구성원에서 아무 역할이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내가 죽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데 엄마가 죽고 나는 살아 있다. 이 논리가 마침표를 찍은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죽음이 나의 삶으로 치환되며 가족의 불행은 곧 나의 삶이 되었다. 왜 내가 살아 있을까. 불행은 이토록 비합리적이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2007년. 일기에 매일 미친년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엄마를 죽여달라고 기도한 미친년. 엄마의 죽음이 아니라 엄마의 빈자리를 슬퍼하는 미친년. 살아있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안도하는 미친년. 내 슬픔에는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없이 나만 있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누구 앞에서도 울 수 없었다. 갈 길을 잃은 슬픔이 고여 혐오가 되었다. 흐르지 못해 웅덩이가 된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다. 물에 잠기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다. 소리야, 네가 잘해야 돼. 이제 집안에 여자는 너뿐이니까. 네가 아빠랑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해. 뇌리에 박힌 글자들이 꾸물꾸물 새어 나왔다. 장례식에서 따라온 것들이었다. 점도가 높아 흘러가지 못하고 끈적거렸다. 글자들은 쥐는 대로 터져서 내게 엉겨왔다. 그 끈적임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해 주었다. 수면에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보살핀다는 건 뭘까. 엄마가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아프기 전에는 뭘 했더라. 동생은 밥을 할 줄 몰랐다. 걔는 내가 없으면 밥도 못 먹을 거야. 수업이 끝나면 대체로 칼 같이 집에 갔다. 같이 놀자는 친구들에게 동생 밥 해주러 집에 간다는 말을 할 때마다 뿌듯했다. 그럴듯한 요리를 해준 적은 없었다. 아빠는 내게 생활비 카드를 주었다. 그걸로 배달음식을 시키는 날은 저녁이 그럴듯했다. 뭔가를 만들면 대체로 그냥 그랬다. 종종 동생이 요리를 했다. 요리는 동생이 더 나은 것 같았다. 그래도 밥은 꼭 내가 했다. 동생이 밥을 할 줄 몰라서 다행이었다.


    2008년. 일주일에 한 번씩 파출부가 왔다. 집도 치워주고 음식도 해 주었다. 동생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난 과외를 시작했다. 과외가 없는 날엔 독서실에 갔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제시간에 학교에 가는 날이 잘 없었다. 아빠가 출근길에 깨우면 일어나는 시늉만 하고 다시 잤다. 학교에 가도 대체로 잠만 잤다. 그래도 반에서 5등 밑으로 떨어지진 않았다.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더 높았다. 아빠는 내가 학교를 착실히 잘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어떤 교사도 나를 크게 혼내지 않았는데, 성적이 괜찮아서인지 포기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뭐든 상관없었다. 학교는 언제나 관심사 가장 바깥이었다. 수험생이 가득한 교실 분위기는 갈수록 예민해졌지만, 나는 그 분위기에 속하지 않았다. 너는 학교 왜 다녀? 밥 먹으러.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야자도 안 하면서 석식을 먹었다. 가끔은 친구들과 나가서 즉석떡볶이나 대패 삼겹살 같은 걸 먹었다. 소화를 시킨다며 놀이터에서 놀았다. 아파트 주민이 아닌데 왜 들어오냐며 쫓겨나면 다른 놀이터로 가곤 했다. 그러다 보면 금세 밤이 되었다. 어디든 바깥에 있으면 난 평범했다. 그래서 좋았다.


    그해엔 FTA 문제로 매일 뉴스가 시끄러웠다. 온라인은 더 했다. 친구들과 놀지 않는 날엔 집회에 갔다. 공부하기 싫은 애들이 놀러 나온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수능 대신 FTA를 공부했다. 광장은 신세계였다. 넓고, 정신없고, 온갖 사람이 가득했다. 제각기 다른 사람들 사이를 떠돌 때면 편안했다. 모르는 사람들을 따라 걷고 달리고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아빠 엄마가 부르던 노래들이 많았다. 늘 중간이나 뒤에 있었지만 차벽은 잘 보였다. 괜히 실제보다 거대해 보였다. 전경은 나를 때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항상 무서웠다. 물대포가 등장하면 사람들을 따라 도망쳤다. 맞을 위치가 아니었는데도 그냥 도망쳤다. 그렇게 달릴 때면 해방감이 들었다. 그때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얼굴도, 종종 같이 집회에 갔던 친구의 이름도 잊어버렸지만 달리던 순간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12월은 복잡한 달이었다. 엄마의 기일 다음 날 아빠의 생일이 있었다. 소고기를 사다가 미역국을 끓였다. 고기 핏물을 빼지 않아 국물 색이 탁했고 텁텁한 맛이 났다. 아빠도 동생도 맛있다며 먹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더부룩했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마친 뒤 방에 들어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불이 모두 꺼진 뒤에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서 먹은 것을 다 게워냈다. 핏물을 빼야 했는데. 미역을 충분히 불려서 볶아야 했는데. 다시다를 좀 넣을걸. 맛이 없었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망했어. 속이 쓰리고 눈물이 났다. 그래도 게워내고 나니 잠들 수 있었다.


    2009년. 재수를 했다. 대학에 떨어져서는 아니었다. 대학에 큰 욕심도 목표도 없었으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모르겠다. 출근하는 아빠 차를 얻어타고 학원에 가며 뒤늦은 수험생 대접에 취했던 것 같다.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신경성 위염과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짜증이 부쩍 늘었다. 집안일은 엉망이었다. 어질러진 집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렸다. 실천 없이 죄책감을 면죄부 삼았다.


   2010년. 재수를 선택한 건 오만이었다. 망한 입시 결과가 그걸 보여주었다. 너 공부한다고 유세 떠니? 재수생 시절 아빠가 했던 말이 뒤늦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유세일지도 몰랐다. 굳이 대학에 갈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엄마의 장기 투병으로 빚을 갚느라 정신없는 와중 재수를 한 내게 들어간 돈이 많았다. 마침 그해는 동생이 고 3이 되는 해였다. 동생은 공부를 잘했다. 목표도 확실했다. 대학에 가는 대신 수험생이 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말에 아빠는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걸 대체 네가 왜 신경 쓰냐'는 말에는 어떤 다정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엔 그 다정함을 읽기 어려웠다. 그즈음 아빠와 매일 같이 싸웠으니 대학에 안 간다는 고집은 매번 바뀌는 싸움 소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에 가야 한다면 수험 기간 동안 자취하겠다는 말이 다음 싸움 소재가 되었다.


    집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기색을 보이면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아르바이트를 해 돈을 모으는 것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돈을 버는 동안엔 용돈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빠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싶다는 나의 주장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나도, 아빠도, 내가 경제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독립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2011년. 동생은 대학에 들어가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아빠는 집에 할아버지를 데려왔다. 할아버지를 데려오겠다고 선언한 날엔 크게 싸웠다. 거실에 엄마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집에 할아버지를 데려오냐는 말에 아빠는 곧 돌아가실 분이라고 답했다. 일 년도 채 같이 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떻게 나를 또 죽어가는 사람과 살게 해요?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마음이 물 아래로 깊숙이 내리꽂혔다. 고작 결혼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로 아들의 목을 조르고 버린 아버지를,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기꺼이 보살피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아 안쓰러웠다. 아빠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 했다는 증명과 아버지를 떠나보낼 시간이 필요한걸까? 그렇다면 그 결정으로 인한 내 상처는 내가 감내할 몫이었다. 어떻게 내게 그런 짓을 하냐는 물음으로 바뀌는 건 없을 터였다. 그러니 빨리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2012년. 아빠의 말대로 할아버지는 일 년을 못 버티고 죽었다. 사는 동안 내가 할아버지를 간병하는 일은 없었다.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갔고, 집에 있을 땐 대체로 투명인간 취급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모습은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아빠가 엄마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한탄하던 쉰 목소리, 치매에 걸려 내게 손가락질하며 소리 지르던 얼굴 같은 것들. 장례식에서는 조금 울었다. 평생 무섭고 싫었던 사람에게도 연민이 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아빠는 울지 않았다. 후회가 없어 눈물이 안 난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상처가 의미 없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안도였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집을 혼자 떠안는 감각에 익숙해졌지만, 잘하는 건 다른 영역이었다. 더러워진 집을 볼 때면 죄책감을 느꼈다. 아빠는 종종 한숨을 쉬었다. 그럼 몇 년 전 들었던 아빠의 말들이 머릿속을 울렸다. 누가 시켰니? 네가 하겠다고 했잖아. 재수한답시고 집안일을 내팽겨 쳤던 때, 너저분한 집안 꼴을 보다 못한 아빠는 분노를 터뜨렸다. 퇴근하고 돌아와 이런 꼴을 봐야겠냐고 소리지르던 아빠의 눈은 피로로 충혈되어 있었다. 집안일을 하는 대가로 용돈을 더 받던 시절이니 아빠의 화는 지극히 정당했다. 집안일로 용돈을 받지 않은지는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어질러진 집에 아빠와 동생의 책임은 없었다. 아마 돈을 받은 적 없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을 테다. 그게 나의 유일한 쓸모였으니까. 소리야, 네가 잘해야 돼. 이제 집안에 여자는 너뿐이니까. 네가 아빠랑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해. 그러니 견디지 못한다면 그건 내 문제였다.


    우리 가족은 부서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그중 가장 해로운 파편이다. 엄마의 죽음에 내 기도가 있었고, 엄마의 죽음 위에 잉여인 내 삶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모든 건 속죄이자 업보다. 매일 되새기는 의무감은 내구성이 형편없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으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지 못했다. 아빠와 동생에게 또다시 가족의 죽음을 안겨준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몰려왔다. 아니다. 죽을 용기가 없었으니 아빠와 동생은 핑계였다. 매년 유언장을 쓰면서 자살 시도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게 모호하고 모순되었다. 별 일도 아닌 것들을 왜 견디기 어려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화도, 슬픔도, 답답함도, 언제나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명확한 것은 남은 가족에게 쓸모를 증명하는 일뿐이었다. 거기엔 적어도 존재의 이유가 있었으니까. 도돌이표라도 별 수 없었다.





커버 이미지 Anton Kolig, Male Nude in Gray, Recl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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