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외출

엄마가 엄마를 보러 가는데

by 시월아이

어릴 적 우리 집은 때때로 웃음꽃이 피기도 했으나 대체로 조용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부터 엄마는 일을 나가셨다. 그 전까지는 결혼 후 한 번도 부업을 놓지 않으셨다. 아직도 엄마가 거실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를 끼우고 그 옆에서 엎드려 숙제를 하던 장면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엄마는 항상 오빠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앉은뱅이 밥상에 밥과 국, 몇 가지 반찬을 차린 후 밥상보를 덮어놓고 나가셨다. 그 당시 초등학교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수업을 나눠서 했는데 연년생이었던 오빠와 나는 항상 반이 달랐다. 자연히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혼자가 둘보다, 넷보다 둘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가끔 오빠가 친구를 데리고 오면 겁도 없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해가 질 때까지 작대기 하나만 들고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모든 가족이 다 있는 날에는 혼자 다락방에 올라가 구부정하게 앉아있거나 전기장판 속에 들어가 밥때가 될 때까지 한없이 누워있곤 했다.


조선소에 다니시던 아버지의 월급과 미싱 시다를 하셨던 엄마의 월급으로 우리 네 식구는 밥은 굶진 않았다. 하지만 신혼때 부터 시작한 셋방 살이는 10년이 넘어서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유치원에 입학한 이후에는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2년마다 한 번씩 옮겨 다녔고,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일정 금액을 떼어서 은행에 꼬박꼬박 넣느라 월말이면 엄마는 여기저기 돈 1,2만 원씩을 이웃에 빌리곤 했다. 당시엔 무상교육이 아니어서 학교에 육성회비도 갖다 내야 했기에 우리는 사교육은 커녕 책 한 권 제대로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그게 가난인 줄 몰랐던 것은, 비교할 대상도 없었고, 엄마와 아버지 두 분이 돈 때문에 다투시는 모습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분이 아주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 차이가 무려 열 한살이나 나다 보니, 엄마는 아버지의 보수적이고 독재자적인 성향에 억지로 맞추어 사실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한마디 대꾸라도 하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밥상을 엎어버렸다. (옛날 아버지들은 왜들 그렇게나 밥상을 엎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단칸방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던 빨랫줄에 빨래라도 널려있는 날엔, 퇴근해서 오신 아빠가 빨래를 다 끌어내리셨다. 그냥 보기 싫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결혼 후 8년 동안 단 한 번도 엄마를 친정에 보내주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엄마의 두 번의 출산 후 집에 오시기는 했지만 엄마는 결혼 후 한동안 직접 고향 땅에 가보지 못했다.


여덟 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출근을 했던 엄마는 평소 귀가 시간에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퇴근할 시간에 집으로 전화를 건 엄마는 내게, 산청 외할머니집에 가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에 왔고, 하룻밤 자고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당연히 아버지가 허락하신 건 아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한 엄마의 일탈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끓여 놓은 된장찌개를 아버지가 오시면 데워 먹으라고 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엄마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아침에 엄마는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한 후 출근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말 엄마가 그리 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을테지.

불안했던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어둑해질 무렵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현관에서 문을 두드리는데 아버지가 급하게 안방에서 뛰어나왔다.


“문 열지 마. 누구라도 문 열면 가만 안 둬."


아버지는 그 당시 우리를 체벌할 때 쓰던 효자손을 들고는 식탁 의자를 현관 앞으로 끌고 와 신발장 앞에 앉았다. 그때 오빠랑 내가 쓰던 방 창문에서 마당이 보였는데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엄마는 우리를 보며 연신 괜찮다, 괜찮다고만 반복하셨다. 그때 엄마는 환하게 웃고계셨다. 미소를 넘어 정말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건 진짜였다. 내가 언제 엄마의 저 웃음을 봤던가 하는 그런 생각이 어린 나이에도 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우리는 모두 지쳤다. 엄마는 마당 한쪽에 쭈그리고 앉았고, 아버지는 식탁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당연히 안방에 있던 집 전화였다. 아버지는 화들짝 놀라더니 3, 4초간 망설이다 안방으로 뛰어가셨다. 그 사이 엄마가 우리를 다급히 불렀다.


“문 열어, 지금 열어. 괜찮아, 아빠랑 안 싸워. 걱정하지 마.”


후폭풍이 두려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오빠가 쏜살같이 달려가 중간 손잡이 쪽에 잠금과 바닥으로 고정되는 잠금장치를 딸깍하고 풀고는 다시 얼른 방으로 달려왔다. 아버지는 여전히 전화를 받고 계셨지만, 바깥 사정을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는 침착하게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아버지는 잠시 아예 나가버리라며 큰소리를 치는가 싶었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30분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듯했다. 그날 밤 우리는 엄마가 외할머니댁에서 가져온 무말랭이와 취나물 반찬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아버지가 엄마를 외할머니댁에 보내주지 않은 이유를 아버지에게 묻지 않았다. 질문으로 시작해 원망으로 끝날 대화가 너무나도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아버지는 그날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다. 그리고 엄마에게 역시 그날 일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결혼 후 문득 이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날 엄마의 행방을 상상속에서 쫓아보았다.

엄마는 여느 때처럼 고된 공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지 않을 최종 결심을 했을 것이다. 언제 그 결심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면서, 또 고속버스에 오르면서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상상해 보았다. 설레었을까, 두려웠을까, 무서웠을까... 그리고 7년 만에 고향 집에 간 엄마의 심정도 상상해 보았다. 마음 한편과 코끝이 동시에 시렸다. 그날 엄마는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에, 전매특허인 무말랭이로 저녁을 먹었을 것이다. 외할머와 밤새 대화도 하고, 그러다 눈물도 지었을 테지. 아버지 몰래 엄마가 왔다는 걸 엄마가 얘기하진 않았겠지만 눈치 빠른 외할머니는 짐작했을지 모른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그 자유가 본능을 억제하는 행위로 침해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부모가 자식을,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고 보고싶어 하는 마음은 본능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부둥켜 안고 온기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다.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아이들의 뜨거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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