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할 나이가 되면, 어린 시절 마음 한편에 묻어 두었던 어떤 한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기를 꿈꾸게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와 운명처럼 함께할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지만, 부부의 삶은 생각처럼 녹록하지 않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인연임에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피눈물을 흘리게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파뿌리 인연’ 또한 그러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쩌면 그들은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수 씨가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뛰어보았지만, 세찬 빗줄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걷고 있을 때, 한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네요. 우산 같이 쓰고 가요.”
그 순간, 경수 씨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천사처럼 아름다울까.’
그때가 바로 경수 씨에게 찾아온 운명의 순간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행복에 가슴이 쿵쾅거렸고, 그도 모르게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결혼하셨어요?”
“결혼 안 했으면 프러포즈하려고요?”
뜻밖의 대답에 경수 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몇 해 후, 두 사람은 실제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딴 딴딴 따~ 딴딴딴~ 신랑 입장, 신부 입장!”
성실한 청년 경수 씨는 아리따운 여인과 결혼하여 삼 남매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회사가 위기를 맞자 경수 씨는 명예퇴직을 해야 했습니다. 다시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생계의 끈이 끊기자 부부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습니다.
“이혼해요. 아이들은 내가 책임질게요. 제발 이혼만 해줘요.”
언젠가 사랑이라 불렀던 말이 냉정한 이별로 변했습니다. 생계 능력을 잃은 경수 씨는 결국 집을 떠났고, 외로움과 자책 속에서 술에 의지하던 그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 병원에 입원한 경수 씨는 긴 치료 끝에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경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울 ㄱ동에 사는 친구 승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승호야, 나 경민이야. 병원에서 퇴원했는데 갈 데가 없어….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경민의 모습에 승호는 놀랐습니다. 왼쪽이 마비된 채 입이 비뚤어져 있었습니다. 승호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쉬게 하고,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와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LH공사의 보금자리 아파트 신청까지 해주었습니다. 기적처럼, 경민은 아파트에 당첨되었습니다.
“승호야, 나 아파트 됐어. 정말 고맙다….”
그날의 벅찬 감격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경민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힙니다.
주거는 해결되었지만, 혼자 일상을 꾸리기는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승호는 이상한 복지센터를 찾아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 친구가 64년생인데, 뇌경색으로 쓰러진 지 5개월 됐어요. 요양등급을 받을 수 있을까요?”
“65세 미만은 어렵지만, 다른 질환이 있으면 가능해요.”
결국 경민은 4등급 판정을 받고 요양보호사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지센터에서는 돌봄 요양보호사를 구하기 위해 구인광고를 냈고, 곧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구인광고 보고 전화드렸어요. 11시부터 2시까지 근무 가능해요.”
면접 약속을 잡고, 그 요양보호사와 함께 경민 씨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현관문이 열리자, 요양보호사는 경악하며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저 사람, 제 전 남편이에요. 저 안 할래요.”
순간, 저는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까.
“선생님,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설마 같은 경주 출신이신가요?”
“네… 맞아요.”
운명은 이렇게 다시 두 사람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복지센터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 중 다시 만난 건 하늘의 뜻일지도 몰라요. 물론 쉽지 않겠지만, 아이들의 아빠이기도 하잖아요. 남편이 바람을 피운 것도,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코로나 때문에 무너진 거잖아요. 미움보다 남은 정이 있다면… 이번에는 요양보호사로, 한 사람으로서 다시 품어주세요.”
요양보호사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싫다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돼요.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는 인연이란 게, 이런 게 아닐까요.”
사람은 죽어서 다시 자신이 살던 시끄러운 곳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걱정 없이 사는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고, 상처를 견디며, 다시 마주하는 순간들 속에 진짜 행복이 숨어 있습니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다시 함께 걷는 그 길이,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파뿌리 인연’ 그 이름처럼, 희고 질긴 인연의 끈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함께 만들어 갈 내일은, 분명 지금보다 따뜻할 것입니다.
*메인화면: pinte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