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 A 요양보호사는 남편을 휠체어에 태우고 이상한 복지센터를 찾았습니다.
남편은 노인성 질환으로 많이 아팠지만 아직 장기요양 등급을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휠체어를 보고 ‘2등급쯤 되겠구나’ 짐작하며 물었습니다.
“사장님, 등급은 받으셨어요?”
“아직이요. 장기요양 등급은 없고, 장애 3급을 받았습니다. 장애 등급으로도 가족요양이 가능할까요?”
“장애 등급이면 활동보조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다만 가족은 활동보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가족요양을 하시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장기요양 등급을 받으셔야 합니다. 가능해 보입니다. 신청을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생각 좀 해보고요.”
A는 장기요양 등급 신청을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센터장이 “등급 신청에는 비용이 들지 않고, 등급을 받으면 복지용구를 대여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자 결국 신청을 맡겼습니다. 17일 뒤, 공단에서 등급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봉투를 열어보니 2등급이었습니다.
“요양보호사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1951년생입니다.”
“그럼 가족요양은 하루 1시간 30분씩 가능합니다. 가족요양은 등급과 관계없이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65세 미만일 경우 하루 1시간, 월 20시간만 가능하지만, 치매 4등급 이상이면 예외적으로 1.5시간이 허용됩니다.”
A는 계약서를 작성하며 물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 건강보험료만 냈는데, 퇴직하고 나니 지역보험료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이번 달만 47만 원이 넘어요. 다른 어르신을 돌보면 직장 보험료만 내도 된다던데, 맞습니까?”
“네. 월 60시간 이상 근무하시면 직장 건강보험만 적용됩니다. 자녀가 소득이 없으면 피부양자로 등록도 가능합니다. 주민센터에 가족관계증명서 1부만 제출하시면 됩니다.”
그 후 A는 남편과 4등급 할머니를 돌보며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1년 8개월 만에 남편은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을 잃은 뒤 A는 깊은 우울에 빠졌고, “사는 게 재미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마흔이 넘도록 일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아들 걱정이 컸습니다.
“센터장님, 우리 아들 중매 좀 해줘요. 아는 사람도 많고 발도 넓잖아요.”
“요즘은 소개팅으로 잘 만나 결혼하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나이 많다고 했겠지만, 요즘은 마흔이 넘어도 결혼을 늦게들 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착한 며느리 데려올 겁니다.”
얼마 후, A가 밝은 얼굴로 달려왔습니다.
“센터장님, 우리 아들 결혼 날짜 잡혔어요!”
“그것 봐요. 축하드립니다!”
A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며느리가 오면 살 집을 구하겠다며 부동산을 다니고,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닦아 며느리에게 줄 준비를 했습니다. A는 작은 슈퍼를 인수해 B가 운영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가게는 점점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A는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으며 지냈습니다.
“센터장님! 우리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어요!”
“축하드립니다. 집안에 큰 경사네요!”
하지만 얼마 뒤, A가 사직서를 들고 왔습니다.
“손자를 봐 달라고 해서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해 주신 덕분에 어르신들께서 좋은 돌봄을 받으셨습니다. 손자가 어린이집에 가면 꼭 다시 들러 주세요. 퇴사 처리 후에는 지역보험료가 바로 부과될 수 있으니 확인하시고, 며느리 직장 피부양자 등록도 검토해 보세요.”
그렇게 A가 센터를 떠난 지 4년이 흘렀습니다.
늘 싱글벙글 웃던 A는 어느 날,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운 채 다시 찾아왔습니다. 말을 붙이면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조용히 아이스커피를 내놓았습니다. A는 커피를 단숨에 비우고, 물도 연거푸 들이켰습니다. 종이컵을 ‘탁’ 하고 내려놓고는 말없이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잠시 후, A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저는 A가 진정되길 기다리며 잠시 화장실로 피했다가 한참 만에 나왔습니다. A는 여전히 화가 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A가 천둥 치듯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센터장님, 나… 어떡해요. 죽고 싶어요.”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A가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울게 두었습니다. 한참을 울던 A는 물을 마시고, 화장지로 코를 풀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A를 안아 등을 토닥였습니다. 긴장했던 몸이 서서히 풀렸습니다.
“휴… 자, 저 따라 하세요. 숨 들이마시고— 내쉬고.”
“휴— 으으… 휴—…”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A는 말했습니다.
“센터장님, 죄송합니다. 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2025년 어느 날 밤, 아들과 며느리가 센터에 찾아와 물었습니다.
“센터장님, 오늘 말고… 엄마, 여기 오신 적 있었나요?”
저는 놀라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혹시 엄마 오시면 이 번호로 전화 좀 주세요.”
그들이 번호를 남기고 돌아간 직후, C 요양보호사가 들어와 말했습니다.
“센터장님, 방금 나간 마트 사장님 B 말이에요. 며칠 전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렸대요. A 선생님이 그걸 B에게 말하자, B가 ‘맞을 짓을 했으니까 때렸겠지’라며 문을 닫고 나갔대요. 그래서 A 선생님이 너무 기가 막혀서 아파트도, 가게도 모두 정리하고 어디론가 떠났다네요. 지금 그 아파트 앞에 B의 살림살이가 쓰레기통 옆에 놓여 있어요.”
그날 아침, 아파트 쓰레기장 옆에 수없이 놓인 가구와 전자제품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 이사를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A는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다 갈등이 생겼고, 그 배신감에 결국 집을 팔고 떠나 버린 것이었습니다.
A가 떠난 후 팔린 집 새 주인이 들어오면서 아들과 며느리는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쓰던 살림살이는 한 달 넘게 비를 맞았습니다. 장롱은 갈라지고, 천 소파는 물을 머금은 채 축 늘어졌습니다. 관리인은 분실을 막기 위해 초록색 테이프로 주변을 막고 팻말을 붙였습니다.
“주인 있습니다. 손대지 마세요.”
그 뒤로 A의 소식은 끊겼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착하고 성실하던 A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B가 일자리가 없자 A는 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려고 작은 슈퍼를 차려 주고, 일하는 며느리를 도와 손주도 몇 해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잘되기만을 바랐던 엄마의 마음은 무참하게 짓밟혔고, 그 사랑은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남는 고통은
버림이 아니라,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A 요양보호사가 어디선가 건강히 살아가고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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