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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영 May 28. 2023

아니다 싶을 땐

방향 바꾸기


1. 거짓말 (박완서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사피엔스21)



초상집에 온 여자들이 성남댁 할머니 흉을 보며 깔깔댄다. 이 집 맏며느리인 진태 엄마의 친구들이다. 그들은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삼 년 동안 시중을 들었다며 진태 엄마를 칭찬한다. 진태 엄마는 연기 중이다. 이틀째 밥을 굶고 애통해하며 시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하고 있다.


중풍 걸린 영감님을 삼 년 동안 돌본 것은 성남댁이었다. 그렇게 하면 시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는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주겠노라고 진태 엄마가 성남댁에게 거듭 약속했었다. 행상꾼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던 성남댁은 평생을 일해도 사기 힘든 아파트를 단 몇 년만 고생하면 가질 수 있고 가난한 아들에게 집을 마련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바람이 났다. 일을 소홀히 하고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바란다면 죄받지 싶어 정성을 다했었다.  


성남댁은 그 열세 평짜리 아파트에서 영감님과 단둘이 생활했고 행복했었다. 영감님이 중풍으로 한쪽이 불편했지만 부축만 해주면 되었고 식성도 좋고 마음씨도 너그러웠다. 영감님은 며느리가 주는 생활비를 아껴서 성남댁에게 한 푼이라도 더 주려고 했다. 이 년 정도 그렇게 살다가 중풍이 다시 도진 영감님은 몸 져 누워서 의식이 오락가락했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되자 진태 엄마는 자식 된 도리를 내세워 합치자고 했고 성남댁은 정들었던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내놓고 영감님을 따라 진태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진태네로 들어가자 진태 엄마는 영감님에게 먹을 것을 조금만 주기 시작했다. 성남댁이 영감님께 진지를 조금만 더 드리자고 부탁할 때마다 진태 엄마는 성남댁이 고생한다며 성남댁을 생각해 주는 척했다. 영감님은 하루하루 말라갔고, 그렇게 일 년 정도 버티다 어제 돌아가셨다.


초상집에 온 진태 엄마 친구들은 어제부터 성남댁 과거를 들추고 흉을 보며 떠들고 있다. 성남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여편네들보다 그렇게 거짓말을 만들어 떠들고 다닌 진태 엄마한테 만정이 떨어지고 소름이 끼쳤다. 근데 더 기가 막힌 말이 들렸다. 그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영감님 죽기 전에, 중풍이 도져 진태네로 합칠 때 후딱 팔아치웠단다.  


성남댁은 기가 막혀 벌떡 일어났다. 그때 밖에서 또 다른 얘기가 들려왔다. 영감님이 살아생전에 죽거든 화장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 진태네가 미국에 가 있을 때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조상의 묘소를 돌볼 자손이 어디 있냐며 영감님이 우겨 화장을 치렀고 그걸 내내 후회하며 자기도 화장해 달라고 유언했다는 얘기. 그건 거짓말이었다.


진태네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오기는커녕 조의금 몇 푼 만 보냈고 아들에 대한 노여움으로 영감님은 마누라 화장을 했었다. 죽은 마누라한테 내내 미안해하며 영감 죽거든 집도 없는 마누라 혼백이라도 자기 무덤에 불러들여 사과하고 위로해 줄 거라 했었다.


성남댁은 진태 엄마의 거짓말을 보며 분노를 넘어 공포를 느꼈다. 진태 엄마 하는 짓을 보아하니 진태 엄마와 둘이서만 맺은 약속쯤이야 감쪽같이 없던 걸로 하는 건 문제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남댁은 분하기도 하지만 체념하기로 하자 맘이 편했다. 성남댁은 배에 차고 있는 전대를 생각하며 만족하기로 했다. 거기엔 영감님이 다달이 얼마간씩 챙겨준 목돈이 들어 있었다.


화장이 끝난 후, 혼자 남겨진 성남댁. 곧장 화장장을 빠져나온 성남댁은 영감님에게 받은 목돈을 아들에게 줄 생각을 하니 즐겁고 신이 났다. 곧 마늘장아찌 철이 되니 목돈을 조금 떼어 놨다가 다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길을 나선다.




2. 빠른 판단력과 실행력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을 더하는 진태 엄마. 진태 엄마의 목적은 분명하다.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지 않고 시아버지의 아파트를 챙기는 것이다. 그럼 답은 나와 있다. 우선 시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고, 이 일을 흔쾌히 하도록 만들 미끼가 필요하다. 진태 엄마는 그 미끼로 시아버지의 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걸었다. 이제 그 미끼에 걸려들 사람만 찾으면 된다. 미끼로 유인해 중풍에 걸린 시아버지를 돌보게 하면서 쓸모가 없어졌을 때 미끼를 주지 않고 내칠 수 있는 만만한 사람.


진태 엄마가 시장통에서 찾아낸 그 만만한 사람은 성남댁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 파는 일을 하는 성남댁은 검소하고 무던한 성격에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게다가 가족까지 없는 (혹시나 아들이 늙은 어미 고생시킨다는 욕을 들을까 싶어 성남댁은 진태 엄마에게 가족이 없다고 했다), 모든 조건이 진태 엄마가 찾던 바로 딱 그 사람이었다.


열세 평짜리 아파트라는 좋은 미끼로 성남댁을 유인하는 데 성공한 진태 엄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미끼(열세 평짜리 아파트)를 성남댁에게 주지 않고 내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온갖 거짓말로 성남댁의 흉을 만들어 성남댁을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 작전. 진태 엄마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성남댁은 영감님이 돌아가시자 그제야 진태 엄마의 음모를 알아채고 분노하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고 영감님의 장례식이 마무리된 후 조용히 제 갈 길을 떠난다.


너무 화가 나서 진태 엄마에게 따질 법도 한데 성남댁은 전혀 그러지 않는다. 분하고 괘씸하지만 전체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따지고 물어봤자 득 될 게 없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그런 판단이 서자마자 성남댁은 빠르게 체념하여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갖는다. 그리고 영감님이 챙겨줬던 목돈에 감사하며, 앞으로의 일을 준비한다.


성남댁의 일처리는 깔끔하다. 전체를 살피고 판단이 섰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을 준비한다. 그녀는 아니다 싶은 것에 그녀의 에너지도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감사하며 즐거운 맘으로 앞 날을 준비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빠르게 체념하여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갖는 성남댁'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녀는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건 바로 건강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 아닌 것에 매달려봤자 몸과 마음만 다친다는 것을. 그러면 본인만 손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 모든 분란은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나 작은 행동 하나가 감정의 불씨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한다. 더군다나 계획적으로 준비해서 작정하고 달려드는 상대를 어떻게 당해내겠는가.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답도 없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안 좋은 감정은 결국 내 몸과 마음을 해친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으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자. 내가 할 수 없다면 빠르게 방향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진정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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