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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Feb 23. 2024

1) 방 한 칸

집의 의미

1) 방 한 칸


빚에 허덕이다가 20억 자산을 만들었다. 나에게 집과 돈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꿈에 그리던 파이어족이 되었고 다시 빚을 내고 일개미가 되었다. 삶이 계획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좋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버라이어티 한 부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나는 직업을 크게 세 번 바꾸었다. 직장인에서 추심원 그리고 영업맨. 그리고 싸이드잡으로는 이것저것들을 경험했다. 그중 가장 오랫동안 경력을 쌓은 일은 보험영업이다. 그러나 파이어족이 되었다가 다시 돈을 벌어야 했을 때 영업으로 손을 뻗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온전히 내어 그 일에 종사할 마음을 내는 게 싫었다.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하다가 얼떨결에 작은 언니 소개로 다시 추심업을 시작했다. 일하면서 금융과 부동산에 관심 갖기 편할 것 같았다. 마음 한 편으로는 부동산경기가 호황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때만 오면 아름답게 다시 은퇴하겠다고 야심 차게 마음먹는다.


사람마음이 간사하다는 걸 자주 느낀다. 마음먹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왜 이렇게 달라지는 걸까? 절대적인 사실이 있다. 일개미로 사는 일상은 몸을 고단하게 한다. 과로, 피로, 과몰입, 과식등은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마음가짐 하나로 예전과 달라진 것들이 있다. 상황에 떠밀려서 부초처럼 떠도는 게 아니고 내가 선택했다는 점이 만족을 가져와서 그런 것 같다. 백조처럼 아름답게 하루의 시간을 채울 때와 일개미의 일상은 아침 시작부터 다르다. 매일 아침 6시 40분 알람소리에 깨서 출근준비를 서두르고 일터로 향한다. 꼬박 6시까지 일하고 어떤 때는 야근을 하기도 한다. 백조일 때는 하루 일과 중 운동이 가장 큰 스케줄이고 노는 게 일이었다. 반면 일은 곧 노동이고 노동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인지 일하는 일상에서도 즐거운 일들을 느낀다.


나에겐 감각 버튼이 있다. 하루에 일어나는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 위해 오감을 작동시키는 버튼이 수시로 작동된다. 출근시간 집을 나서며 바깥공기를 들이마신다. 햇빛이 좋으면 기분이 더욱 좋아진다. 비가 오면 운치 있고 눈이 오면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져서 감성이 폭발한다. 회사로 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신난다. 전철을 타면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꺼내 글을 쓰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한 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듯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전철에 내려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향한다. 9시부터 업무가 시작되지만 회사에는 보통 8시 30분 전에 도착한다. 알람소리를 한 번만에 완벽하게 잘 끄고 일어나면 8시쯤 도착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화장을 살짝 고치고 물을 떠 오고 커피를 타온다. 그리고 오전업무를 하다 보면 즐거운 점심시간이 된다. 매일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고 선택된 점심을 먹으며 맛을 음미한다. 소화도 시키고 잡담도 할 겸 식사멤버들과 커피를 마시고 사무실에 들어가서 다시 일에 열중한다. 퇴근하면 저녁밥을 짓고 쉬다 보면 씻고 잘 시간이다. 하루가, 한 달이, 1년이 빠르게 지나간다.


서울로 출퇴근하게 되고 전철을 타게 됐다. 20대 초반에만 전철을 탔었다. 이후 30대부터는 자가용을 주로 이용하다가 오랜만에 영접한 만원 전철은 낯설고 힘들었다. 그나마 1년의 시간 동안 어느 정도 내공이 생겼다. 내가 타는 전철은 악명 높은 1호선이다. 1호선이 예전엔 단연코 1등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1,2,3,5호선 모두 출퇴근시간에 사람들이 사람이 아닌 콩나물이 되어 콩나물시루 속에 갇힌 채 부동자세로 박혀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짐이 되어 옮겨지므로 딱히 1호선만 특별하진 않다. 최근 1년 동안 내가 만난 지하철 똥매너는 치한도, 잡상인도 아니다. 신기하게 예전엔 많았던 치한을 2023년엔 한 번도 못 봤다. 출퇴근시간에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많다. 밀리고 밟히고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은 일상이라서 특이할 점이 없다. 복잡한 곳에서 화를 내거나 예민하게 구는 사람을 몇 번 봤는데 모두 여자였다. 뒤에서 밀려서 어쩔 수 없이 떠밀려온 사람을 팔꿈치로 치거나 밀거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최근에 무례한 사람에게 일침을 가했다. 같은 여자인데도 밀착된다고 신경질 부리고 계속 아프게 공격하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참지 않기로 했다. "이런 게 싫으면 전철타지 마세요, 내가 일부러 밀리고 붙는 게 아니잖아욧!" 참으면 모든 병이 될 수 있다. 할 말을 하고 나니 기분도 상쾌해졌고, 이후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전철로 인해 깜빡이는 행복버튼을 다시 켜는 건 간단했다.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돈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돈을 좋아한다. 부자가 되고 싶다.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기 때문이다. 돈과 친해지고 돈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 돈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공, 돈에 대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자기 계발서나 성공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돈을 버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에 성공하거나, 투자에 성공하면 된다. 다방면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았다. 그중에 현재까지 가장 좋은 기대수익을 준 것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나에겐 부동산부문이다. 물론 돈을 꾸준히 벌게 해 준 건 꾸준하게 지속해 온 노동(일)이었다. 꾸준한 일이 없었다면 돈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일과 투자에 성공하기 위해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성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투자에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 나에겐 돈과 집의 의미가 꽤 오랜 시간 동일선상에 있었다.


어린 시절 집은 그저 잠자고 밥 먹는 공간에 불과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으로 나갔다. 집을 나서면 밖은 온통 놀이거리로 넘쳐났다. 싸고 튼튼한 고무줄은 여자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도구였다. 동무가 있으면 함께하고 혼자 있을 땐 기둥에 매어놓고 하루종일 놀면서 운동하고 연습했다. 친구가 많으면 놀이거리는 더욱 다양해진다. 흙바닥이 넓은 공터만 있어도 놀거리가 넘쳐났다. 뾰족한 돌멩이 하나를 구해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면 놀이가 바로 시작됐다. 땅, 돌멩이, 자갈, 모래, 종이, 실든 쉽게 얻을 수 사소한 것들은 요긴한 장난감이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은 격변하고 있었기에 경기도 부천에 위치한 우리 집 주변도 계속 변하고 있었다. 나라 전체가 무언가를 만들기에 분주했다. 집 주변 어느 곳에서나 공사장현장에서 볼 수 있는 모래와 벽돌, 시멘트들이 있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도 놀이도구가 되곤 했다. 공사를 위해 마련된 모래언덕이 여기저기 많았고 집은 대부분 1층짜리 건물이 많았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면 모래더미가 안전장치가 되어주었다. 80년대에 어린이였던 라테는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에 비해 나가서 뜀박질하는 시간이 많았다.


초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가난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 한방에서 온 가족이 모여 자는 건 그저 당연한 일이었다. 좁은 집이 싫거나 불만을 가진 적도 없다. 한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모두 비슷한 형편이라서 비교대상도 없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엄마 찌찌를 만지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먹고,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면 충분했다.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나는 젖에 연연했다. 그리고 밖에서 노는 것에 진심이었다. 잘살고 못살고의 개념이 없는 무지는 불만족을 만들지 않았고 행과 불행이 절대적이고 단순했다. 머리가 크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집이란 공간에 내 공간이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방이 많고 집평수가 넓고 집값이 비싼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만 갖고 싶은 건 내 공간, 내방 한 칸이었다.   


부모는 1남 3녀를 두었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방 두 칸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방 두 칸에 막내인 내방이 있을 리 만무했다. 큰언니와 오빠가 이른 나이에 공장으로 가고 집에 부모와 작은언니 나만 남았을 때 처음으로 작은언니와 한방을 썼다. 부모와 떨어진 방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감격하고 감지덕지한 생활을 짧았다. 언니와 내방이었던 방은 오빠의 살림방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 방이 없어졌을 때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작은언니가 취업을 하면서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생에 처음으로 나에게도 방이 생겼다. 안락하고 안전한 내 공간은 만족이란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취업한 후 내 방은 다시 작은언니의 살림방이 되었다. 두 번째로 집을 떠나 몸을 기탁한 곳은 친구 심의 집이었다.
방 한 칸은 나에게 단순히 방이 아니었다. 쉴 수 있고, 안전한 곳,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집이라는 개념에 내 방 한 칸이란 공간은 절실고 절대적인 나를 지켜주는 안전지대였다.


부모는 1남 3녀를 두었고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방 두 칸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방 두 칸에 막내인 내방이 있을 리 만무했다. 큰언니와 오빠가 이른 나이에 공장으로 가고 집에 부모와 작은언니 나만 남았을 때 처음으로 작은언니와 한방을 썼다. 부모와 떨어진 방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감격하고 감지덕지한 생활을 짧았다. 언니와 내방이었던 방은 오빠의 살림방이 되었다. 고등학생 때 방이 없어졌을 때 독서실에서 생활했다. 작은언니가 취업을 하면서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생에 처음으로 나에게도 방이 생겼다. 안락하고 안전한 내 공간은 만족이란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취업한 후 내 방은 다시 작은언니의 살림방이 되었다. 두 번째로 집을 떠나 몸을 기탁한 곳은 친구 심의 집이었다.


방 한 칸은 나에게 단순히 방이 아니었다. 쉴 수 있고, 안전한 곳,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집이라는 개념에 내 방 한 칸이란 공간은 절실하고 절대적인 나를 지켜주는 안전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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