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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 나무 Feb 19. 2024

우수에 쓰는 입춘 날 단상

입춘첩을 붙이다가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내가 젊었을 때는 입춘 날 대문에 '뭐 이런 걸 다 붙이나' 싶었다. 사극에서 보는 것처럼 솟을대문에 고풍스러운 느낌 물씬 나는 튼튼한 나무 대문에나 어울릴 법한 것을 일반 주택 철제 대문에 붙이는 게 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왠지 촌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미신 같이 느껴지는 데다가 어느 이웃집도 붙이지 않는데, 해마다 입춘첩을 정성 들여 챙기시는 엄마의 모습이 마뜩잖았다.


추운 겨울 지나 새로운 봄을 맞이하여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인다고 해서 없던 좋은 일이 생길 것도 아니고, 붙이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도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통계를 굳이 찾지 않더라도(실제로 찾을 수도 없겠거니와), 뭔가 조금 올드하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마저 들었지만, 입춘첩에 들이는 정성을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올해는 기꺼이 나도 입춘첩을 챙겼다. 본가 일반주택 철제 대문에 붙이는 것도 마땅치 않아 했던 일이 무색하게, 스스로 아파트 현관문에 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것은 여전하고, 입춘첩을 붙인다고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확신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면 아마도 내 마음일 것이다.


엄마의 병원 진료가 있던 날이기도 한 입춘 전 날, 엄마는 입춘첩을 받으러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셨다. 병원 진료는 오후였는데, 오전에 나에게 외부 일정이 있어서 함께 이동을 할 수 없으니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사이 엄마는 입춘첩을 받으시려고 집에서 서둘러 나오셨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입춘첩에 이렇게 진심이시라니...


생각해 보니, 엄마가 편찮으시기 전에 해마다 붙였던 입춘첩은 요 근래 몇 년 간은 붙이지 못했다. 때맞춰 박물관에 가셔서 받아 오셨지만, 지난 3년 간은 외출도 여의치 않을뿐더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을 일부터 피해야 했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은 어려워도 좋아하시는 경복궁엔 한 달에 두 번쯤 가실 만큼은 회복하셨으니 올해의 입춘첩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해마다 입춘이 되면 세시 행사로 현장에서 서예가가 직접 붓글씨로 쓴 입춘첩을 나눠주곤 했다. 서예가의 멋진 서예 솜씨를 보는 즐거움도 있어서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가 받아 오신 입춘첩은 모두 같은 필체였다. 서예가 한 분이 쓴 것인가 자세히 보니 모두 화선지에 인쇄한 것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뭔가 조금 아쉬웠다. 문외한의 눈으로나마 서로 다른 필체를 비교하면서 선호도를 품평하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같은 손글씨라 하더라도 펜이나 연필과는 또 다르게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써 내려간 글씨가 주는 힘과 온기를 느낄 수 없어서일까?   


AI에 명령어만 입력하면 복잡하고 어려운 그림을 1분 남짓 만에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굳이 서예가가 공들여 쓴 것이 아니더라도, 줄을 서서 오랜 시간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글씨체로 멋진 글귀를 얼마든지 출력할 수 있다. 분명히 편리하고 기호에 맞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인데, 편리함과 정확함이 숙성과 개성 같은 미덕을 대체하는 것은 아닐까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담임 선생님은 24 절기를 순서대로 외우도록 하셨다. 도대체 24개나 되는 것을 순서대로 어떻게 외우란 말인지... 지금 생각해도 어려운 숙제였다.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숙제를 포기할 뻔했던 때 선생님은 암기 비법을 알려주셨다. 담임 선생님은 음악을 무척 좋아하시는 분이었는데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동요에 맞춰 가사를 24 절기로 바꾸면 쉽게 외울 수 있다고 하셨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으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를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 식으로 바꾸면 24 절기와 가락이 딱 맞아떨어진다. 수십 년 전이었다고는 해도 농경사회 시기에나 중요하게 여겨졌을 법한 24 절기를 굳이 아이들에게 외우도록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기교육이 역시 무서운 것인지, 아직까지 24 절기를 순서대로 빠뜨리지 않고 외울 수 있는 것은 그때 선생님의 숙제 덕분이다.


종이 달력보다 컴퓨터나 휴대폰 캘린더를 더 많이 보고 사용하는 요즘엔 날씨 뉴스에서나 듣게 되는 24 절기이지만, 숫자로 표시되는 시간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이 있다. 단지 글자로 표현된 것이라 그런지, 흙과 물과 자연이 담긴 단어라 그런지 묘하게 푸근함이 느껴진다. 자연의 변화에 대비하여 미리 적절한 준비를 하도록 알려주는 것이라 그럴까? 24 절기라는 시간의 구분에서 알 수 없는 다정함 마저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감상이려나?


날씨 뉴스에서나마 언제까지 24 절기를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숫자와 기계, AI가 자연을 압도하는 시대에 시간을 표현하는 또 다른 문법과 언어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간 개념을 갖게 될지도 모르고... 새로운 문법이나 언어도 좋고, 이전과는 다른 가치가 묵은 것을 대체하게 되더라도 부디 그 새로움은 성숙한 변화였으면 좋겠다.      






현관문에 입춘첩을 붙이면서 생각했다. 엄마가 해마다 입춘첩을 챙기시던 것은 오직 바람이나 기대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힘든 일도 궂은일도 있겠지만 그래도 웃는 일, 기쁜 일이 더 많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테니 멋진 글귀를 대문 앞에 붙인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얼마든지 빌어볼 수 있을 테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세시 풍속이라는 것에 기대서라도 좋은 날들을 만들어가려는 바람과 다짐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헤아리게 된다. 어쨌든 기왕 바라는 마음이니 좋은 일, 경사스러운 일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려면 작은 일에 정성을 하는 것부터 시작이겠지. 아... 엄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역시 조기교육이 무섭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하루 실망하더라도 며칠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몸이 고단해도 하루 이틀 지나면 금세 회복이 되었다.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아쉬울 뿐 뭔가 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뭔가 뜻대로 되지 않아 상심하는 일이 두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뭔가 새로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조금만 무리해도 제 컨디션을 회복하기까지 일주일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까지. 요즘은 소모품인 배터리가 된 기분마저 든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보충하는 시간은 길어지고 소모되는 시간은 짧아진다. 기껏 컨디션을 찾았나 싶어도 좀처럼 예전 같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충전도 금방 되고 한 번 충전하면 오래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불필요한 웹서핑이나 영상 보기를 꺼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성능이 떨어진 지금은 제한된 것을 최대한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나이가 드는 게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몸이 쉽게 지치는 것은 반갑지 않지만, 전보다 조금은 더 여유 있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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