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배위의 파일럿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데 왜 평범한 이에 머무르려 하는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전체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사관 휴게실에 당직 항해사를 제외한 전 선원이 모여 무사히 오만에서 회항한 것을 축하했다. 저녁은 식사류가 아닌 안주류로 준비된다. 부족한 탄수화물은 평소보다 더 많은 맥주로 보충하였다. 이 날은 평소보다 일도 적고 갑판부에서도 일을 도와줘서 폼이 덜 든다. 조리부는 모든 선원과도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맺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일 배우기 바빴고 심적 여유가 없어 사관은 물론 부원과 대화를 많이 못했다. 이런 회식 시간을 통해 사관, 부원들과 조금이나마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배에 타기 전 매체에 출연해 빚을 갚고 내 원래 꿈을 되찾기 위해 배를 탄다는 말을 했었다. 밖에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내가 향해야 할 곳은 배였기에 많이 불안했다. 원양상선은 선원들에게 각자만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생활을 하며 그 대가로 가족을 부양하고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다. 자칫하면 사기당해서 배를 탔다고 비약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선배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그날은 주방 뒷마무리를 하고 조금 늦게 회식에 참여하니 선장이 자신의 비어있는 옆자리에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내게 궁금한 게 있다며 요즘은 괜찮냐고 물었다. 해운회사에서 준 월급을 받아 빚을 다 갚았다고 하니 기뻐하면서 모든 선원들에게 박수를 달라고 했다. 파일럿 훈련비용을 다 모은 것도 아니고 단지 빚을 다 갚았을 뿐인데 멋진 선배들의 축하를 받으니 송구스럽고 기뻤다. 모두가 나를 욕할 거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대부분의 부원들은 각자만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사관들의 프라이드는 나의 인터뷰 따위에 흠집이 되지 않은 만큼 견고했다. 또한 뱃사람들은 모두 비범한 배포를 지니고 있다.
선장은 자신의 꿈도 파일럿이라고 하였다. 파일럿이란 명칭은 배를 이끄는 도선사에서 처음 유래되었다. 도선사는 항구에서 대형선박의 입출항을 인도하는 직업을 가리킨다.
나도 파일럿과 접점이 있었는데 근해에서 파일럿이 탑승하여 항구로 도선할 때 식사시간이 겹치면 도시락을 배달하곤 했다. 그들은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선사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직업만족도가 높고 평균 연봉이 1억 이상으로 국내 전문직 연봉랭킹 3위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행복하게 일한다는 분위기와 여유가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은 힘들다. 도선사가 되려면 우선 15년 이상의 승선 경력을 가져야 한다. 도선사 시험에서는 베테랑 선장들끼리 경쟁을 해야 된다. 시험을 합격하기 위해 선장이라는 부와 명예가 약속된 자리에서 내려와 절에 들어간 뒤에 오롯이 시험공부에 전념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합격 후에도 실습기간을 거치며 배정된 항구의 조류와 수심의 변화, 각종 선박의 조종술을 꿰뚫어야 한다. 얼마나 힘들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길이다. 도선사는 항해 관련 직종의 끝판왕으로 ‘해기사의 꽃’이라고 불린다.
선장은 한 번 도선사 필기시험의 커트라인을 넘겼는데 경력과 기수에 밀려 탈락했다고 한다.
나중에 꼭 둘 다 파일럿이 되자며 건배했다. 회식 자리에서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서로를 더 잘 알아가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부상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항차가 끝나고 약 10명의 인원이 교대되었다. 조타수(선교에서 항해사관의 지시 하에 조타와 신호기를 운영하는 갑판수.)도 한 명 바뀌었는데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반무테 안경을 끼고 앞머리가 눈썹까지 오는 생머리에 약간의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그는 다른 부원들과는 다르게 이지적인 느낌이 있었다. 주황색 작업복이 아닌 정장을 입혀 놓으면 빠르게 부장으로 승진한 성실한 직원처럼 보일 듯했다. 다른 선배들에게는 물론 내게도 존댓말을 하며 ‘인품’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우아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는 매사에 반듯했다. 허리도 곧게 서 있었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선원들처럼 거북목도 술배도 없었다. 승선 삼일 차에 갑자기 그가 절름발이처럼 걷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허리가 휘어 있었고 등은 꼽추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의사들이 방송에서 허리 관리 잘 하라며 보여주는 중증 척추층만증 환자의 사진과 유사해 보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의 이면에는 깊은 불편이 수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태의 원인을 물어봤고 그는 기침이라고 대답했다. 기침을 세게 한 순간 경추 속에서 번개가 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뜨거운 통증에 거울을 보니 자신의 몸이 피카소의 형이상학적인 그림처럼 꺾여있었고 큰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항해를 시작한 지 겨우 이틀 차에 부상을 당했다. 이번 항차에서 그는 파도의 울렁임을 남들보다 더 강하게 받을 것이다.
한 번은 내게 베개를 달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창고에는 베개가 떨어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망망대해에서 물리치료는 물론 근육이완제나 주사도 맞지 못하고, 배게마저 구할 수 없는데도 아무 불평할 수 없는 그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다. 사실 오너룸이나 파일럿, 도크마스터 등의 항해 중에는 비어있는 방을 뒤지면 배게 하나 정도는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귀찮다고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던 게 아직도 미안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조타수는 몸을 크게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포지션으로 무리 없이 업무를 소화하였다. 이주가 지나서야 증상이 완화됐고 적어도 겉으로는 걷는데 이상이 없어 보였다.
50대 초반의 갑판수 형님은 대단한 술고래였다. 조리수와 친해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데 술만 여유 있었다면 매일 밤 한 짝씩 해치웠을 것이다. 나도 술 좀 마시는 편이지만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다. 나이도 어느 정도 찼고 이 생활을 오랫동안 했을 텐데 매일 고래처럼 술을 마시는 게 너무 신기했다. 과장을 좀 보태서 맥주 캔으로 탑을 쌓는다면 한 항차가 끝날 때 즈음이면 선교보다 높아졌을 것이다. 신기한 건 그렇게 술을 마셔도 다음날이면 항상 멀쩡했다. 매일 운동도 했고, 갑판장마저 의지할 정도로 일을 잘하는 에이스라고 한다.
그는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조리수가 청양고추를 가득 넣어 만든 번데기탕(빨간 고추가 빽빽하게 차있는 중국 사천요리만큼 사악한 비주얼이었다.)을 갖고 내려가는 게 그의 마지막 정상적인 뒷모습이었다. 다음날 그는 입술이 부어있었다. 필러를 과복용해서 부작용이 난 사람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의 재밌는 상황이었다.
다다음날은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정도로 입술과 입가가 부어있었다. 전혀 재미가 없고 인상이 써질 만한 정도의 붓기였다. 비가 온다면 삐져나온 입술이 우산이 되어 몸의 앞부분은 젖지 않을 정도였다. 진짜 문제는 삼일차부터였다. 얼굴의 반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얼굴 붓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는 붓기에 얼굴이 너무 무거워 보여 손으로 받치고 다녀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가 봐도 그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위성통신으로 의사에게 원격진료를 받았고 부은 얼굴을 터뜨려 물혹을 뺐다. 의사의 지시대로 선내에 있는 약을 복용했고 다행히도 일주일 후에는 완전히 가라앉았다. 완전히 회복된 그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그동안 소비하지 못해 쌓여있는 맥주를 무서운 스피드로 마시기 시작했다.
배의 높은 선체에도 코로나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었다. 일등기관사가 코로나를 어디서 갖고 온 지는 모르겠다. 승선 전 모두가 간이키트 검사를 했을 때 코로나 양성 반응이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로나의 잠복기는 최대 14일인데 그는 이미 배를 탄지 네 달이 지나있었다. 선체의 높이가 20m에 달하는데 고작 10cm 정도의 날치가 어떻게 갑판 위에서 죽어 말라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코로나가 선체를 넘어 배에 침투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유언처럼 했던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 춥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일반식을 가져다주었는데 목이 아파 삼킬 수 없다고 했다. 후에는 죽을 가져다주었다. 죽도 넘기는 게 힘들다고 하여 쌀을 갈아 미음으로 주었다.
그마저도 남긴 잔반을 통해 김치와 참기름을 뿌린 간장에는 손대지 않는 것을 보고 숟가락과 미음만 주었다. 방에서 칩거하는 기간이 일주일쯤 되었을 때 그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방문 앞에 음식을 내려놓을 때 이전 음식이 반쯤 줄어든 것만으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번은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 방 문 앞에 음식을 두고 노크를 한 뒤 세 발자국 떨어져서 그를 기다려 보았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아주 느릿느릿 일어나 문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방은 어둡고 더러웠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동굴에서 나와 오랜만에 빛을 본 곰처럼 그는 빛에 적응하지 못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방에 들어가고 10일이 넘어서야 그는 남들이 식사를 마친 후 식사를 하러 내려왔는데 마치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부 자연스러워 보이는 걸음걸이였다.
나는 배를 타며 두 번 아팠다. 처음 배를 탔을 때 히말라야로부터 가져온 감기. 그리고 마지막 항차에서 아라비안해에 이르렀을 때 즈음이다.
마지막 항차의 조리장의 유일한 단점은 저녁을 내 업무공간에 와서 서서 먹었다. 업무도 익숙지 않고 손도 느려서 쉬지 않고 일하고 싶었는데 업무 준비 시간에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밥을 먹어야 했다. 밥도 천천히 먹고 싶은데 조리장은 급하게 먹었고 음식을 씹을 때면 밥을 맛없게도 먹는다며 팍팍 먹으라고 했다. 저녁을 먹을 때면 체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싱가포르 도크에서 나와 오만으로 들어가기 며칠 전부터 위에 음식이 쌓여가더니 결국 체해버렸다. 체한 상태로 매일 저녁을 함께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술을 많이 마신 후에 앞으로는 평생 술을 마시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종종 한다. 비슷한 뉘앙스로 당시 기분은 먹는 거에 질려 앞으로는 평생 음식을 먹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저녁으로는 고기구이를 먹은 날 일하는 내내 속이 더부룩했다. 일을 마치고도 속이 늬들늬글거려 먹은 음식을 밀어내기 위해 라면과 김치를 먹었다. 멍청한 선택을 한 나는 고통과 함께 잠에 들었다.
내 배에서 나는 거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의 대장에서 시작된 무언가가 빠르게 아래쪽으로 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알코올 도수가 40%를 넘어가는 독주를 마시면 식도와 위가 그려지는 것처럼 대장의 생김새가 느껴지며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대장을 질주하며 무언가 들이 입구에 다달았을 때 나는 화장실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를 하였고 동시에 입에서도 토사물이 쏟아져 나왔다. 시계를 보니 3시였다. 다섯 시까지 자고 배출하기를 반복해 가며 내 몸속 모든 음식과 힘을 뽑아냈다.
아프지만 조리원이다. 5시에 출근하여 겨우 겨우 준비를 했다. 아침에 내 상태를 본 조리장은 하루 쉬라고 했지만, 3명이 하는 일에 한 명이 쉬면 나머지 두 명이 곤란해진다. 아파도 약을 잘 먹지 않지만, 일을 위해 약을 곱빼기로 쑤셔 넣었다. 점심은 정말 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저녁까지 쉬라고 했지만 나가서 일을 했다. 이 후로도 며칠 후유증이 있었다. 5일 정도는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았고 이 주일 정도는 계속 음식이 얹혀있었다.
선풍기 바람마저 몸을 찌르는 듯 따갑게 느껴졌다. 힘들었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고 내가 아픈 티를 낸다고 해도 받아줄 사람도 없었다. 서러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에 나가면 가끔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여전히 나를 걱정하고 계실 모습이 그려지고 더 이상의 걱정을 드리고 싶지 않아 연락하지 않았다. 빈 속에 쓰라린 위가 너무 아파 위암에 걸린 게 아닐까 혹시나 위경련이 오면 어쩌나 걱정을 하였고 망망대해에서 위세척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런 최악의 상황은 없었지만, 정말 쉬고 싶었다. 미치도록 쉬고 싶었다. 휴가를 쓰고 싶었지만, 배에서 휴가를 쓰는 건 곧 자의에 의한 하선을 뜻한다. 사람이 하루도 못 쉬고 7개월을 일한다는 게 정말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겠다. 하나 그 생활을 10년 20년 하고 있는 내 곁에 있는 선배들은 보니 나의 나약함이 부끄러워 불만을 입 밖으로 내지르지는 못했다.
한 번은 뒷정리를 하는데 조리수가 니 표정이 왜 그러냐며 면박을 줬다. 사실 조리수는 요 며칠 업무 태만에 가까울 정도로 적극적이지 않던 나를 벼르고 있었다. 내가 제 몫을 하지 못하니 그 몫은 당연하게도 조리수에게 돌아갔다. 아픔을 참고 있던 나도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우리는 서로 업무 외적인 대화를 하지 않았다. 어떤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고 누구도 맞지 않았다. 아직도 내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배를 탈 생각이었다면 맞지 않는 이상 욕이나 부조리는 끝까지 속으로 혼자 삭히는 게 맞았을 거 같다.
나는 하선하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적은 리스트가 있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가기, 캠핑 가기 등이 있었다. 지독하게도 아프고 난 후에 리스트를 다시 한번 확인했고 리스트는 다 지워졌다.
감량을 하는 복서들은 처음에는 기름진 음식들이 먹고 싶었지고 이후에는 탄산음료나 맥주 등 자극적인 음료가 생각난다고 한다. 땀을 빼며 수분커팅까지 진행해야 하는 절정에 이를 때 그들은 결국 물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처럼 배에서 내리면 알람을 끄고 이틀 정도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내가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이었다. 배에서 힘들 때마다 멋진 미래를 상상하며 멘탈적으로 이겨내며 성장했지만, 이때만큼은 내 나약한 멘탈을 붙들어 메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