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소녀
힘든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은 기뻐해야 할 일인가?
아, 흐르는 시간에는
닻을 내릴 수 없구나!
-마거릿 가디너
승선한 지 어느덧 5개월 가까이 지났다. 그동안 호주 한 항차, 카타르 한 항차, 오만 한 항차를 끝내고 두 번째 오만을 방문 후 한국으로 회항 중이다. 오늘 또 한 번 싱가포르 해협을 지났다. 지금껏 항상 업무 시간에 싱가포르 센터를 통과하였는데 이번에는 아침과 점심 사이의 쉬는 시간에 통과하였다. 운이 좋게도 점심 메뉴는 간단한 냉면이었다. 평소 8, 9첩으로 깔리는 반찬들은 절인 무와 명태무침회 정도만으로 간소히 차려지고 냉면과 만두만 내면 된다. 덕분에 쉬는 시간이 1시간 30분에서 2시간으로 늘어났다. 그 시간 동안 카메라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갑판에서 마음껏 싱가포르를 관광할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마리나베이샌즈는 감탄이 나온다. 파도를 닮은 곡선을 가진 세 개의 건물 위 200미터에 전장 343미터의 배 모형 전망대가 올라서있다. 건물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마리나베이샌즈를 육상에서 본 사람들은 건물의 아름다움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랜드마크 빌딩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큼이나 주변 경관과 얼마나 잘 조화되는지도 중요하다. 마리나베이샌즈의 진가는 바다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싱가포르 해협에는 수십 척의 배가 지나가며, 수백 척의 배가 정박해 있다. 그 가운데에 우뚝 솟아있는 마리나베이샌즈 건물과 꼭대기의 배는 여느 배들이 겪어온 파도보다 높은 파도 위에 올라가 있어 마치 웅장한 성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박의 신 같은 위엄이 느껴짐과 동시에 모든 배와 선원을 압도한다. 마침 그날은 도심 상공을 지키는 구름마저 비밀의 왕국으로 통할 수 있을 것처럼 신비롭게 떠 있었다. 마리나베이샌즈를 다섯 번째 마주한 그날 뱃머리가 인도양에서 태평양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서양의 문물이 동양으로 전파되는 것 같기도 했고, 세상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 같기도 했다. 시공사가 쌍용건설이라는 것에서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무스카트호는 곧 싱가포르 도크에 들어간다. 한국에 갔다 다시 돌아오면 한 달간 배 수리를 하며 싱가포르의 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런 연유로 다시 마리나베이샌즈를 만나면 과거 유럽의 이민자들이 대서양을 건너 마침내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만났을 때, 반가워했던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오랜만에 육지에 발을 디디면 이민자들이 아메리칸드림에 첫발을 내디딜 때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싱가포르에서 한 달간의 배 수리를 마치고 오만에 다녀오면 아마도 하선하게 된다. 순간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선하여 휴가를 나가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문득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던 12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군대에 입대한 첫날밤 306 보충대에서 불침번을 설 때였다. 당시 의무복무기간은 21개월이었고 매일 불침번을 서게 된다고 들었다. 앞으로 남은 636번의 불침번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다. 십이 년 전 내 청춘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영원할 것만 같았다. 때문에 군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21개월쯤은 내 인생에서 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서른세 살인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기성세대는 아직 청년이라고 불러주지만, 스스로를 청년이라 지칭하기에 조금은 부끄럽다. 길을 가다가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도 마음에 전혀 스크레치가 일지 않는다. 친구들 중에는 두 아이의 아빠도 있고,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친구도 있다. 국가에서는 34세를 청년(여느 부서는 39세)의 마지노선으로 정해 놓았다. 내게 청년은 곧 청춘이고 35세가 되면 청춘도 끝이다. 어느덧 끝이 보이지 않던 청춘의 터널 먼 곳에는 청춘의 끝을 알리는 희미한 빛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최근 겪었던 중요한 순간들의 지나온 날들을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의 날짜를 계산해 봤다. 전세 경매 통보받은 날로부터 1,013일이 흘렀고, 엘지전자 헝가리 법인을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온 지 434일이 되었다. 전셋집의 경매가 완료된 날로부터 386일이 흘렀다. 전셋집에서 쫓겨난 지 228일이 지났고, 승선한 지 143일이 되었다.
앞으로는 싱가포르 도크에 들어가기까지 20일 남았고 하선하기까지 81일이 남았다. 그리고 내 청춘(35세가 되는 생일)은 655일뿐이 남지 않았다.
‘푸른 봄(靑春)’은 내가 원치 않아도 빠르게 흐를 예정이기 때문에 조금은 벅찬 현실에서도 내 삶에 충실하기로 했다. 운동을 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해야겠다. 술은 조금 자제를 하고 바다와 배 그리고 그 위에서 발버둥 치는 나를 눈에 각인될 정도로 많이 봐둬야겠다. 물론 본업인 조리원 업무는 단연 최우선 순위로 하여 언젠가 완전히 하선했을 때 선상생활을 돌아보며 뿌듯함을 느끼고 싶다. 마치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하는 180개 들이 종합비타민을 불과 200일 만에 마지막 한 알을 맞이한 것처럼.
내가 갓 서른이 되었을 때 ‘늙은 기분이 어떠냐고’ 20대 초중반의 친구들에게 질문받았다.(좀 더 부드러운 워딩이었는데 내 기억 속에서 변질되었다.) 이미 28, 29세부터 30세가 될 준비를 마쳤던 나는 ‘열 권이 들어가는 책꽂이에 매년 일기를 한 권씩 적어 세 번째 칸까지 채우고 이제 네 번째 칸에 꽂힐 새로운 일기를 적어나가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보다도 다양한 경험을 하며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30대 초반의 내 일기는 전세지옥 속에서 불타버렸지만 앞으로의 일기는 지옥 속에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삶과 항로의 변곡점에서 깊은 사색에 빠져있던 나는 어느새 싱가포르 센터에서 멀어져 있었다. 싱가포르를 지나가며 존재할 리 없다고 확신하는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내 청춘이 전세사기로 얼룩이 지며 끝나지 않기를. 전세사기를 이겨내고 내 꿈인 조종사가 되어 중년을 맞이하길.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더라도 내 힘으로 반드시 꿈을 이룰 것이다.
바다에서는 만나지 못하는 육지에만 있을 24년의 봄을 그리워하며 방에서 해바라기씨를 해바라기 싹으로 발아시켰다. 만약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배는 항상 봄이었다.’를 제목으로 작문하려고 밑 재료를 다 구상해 놓았는데, 아쉽게도 봄은 갑판 위를 넘어오지 못했고 해바라기는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 혹시 봄이 없는 곳에서 지내면 그 기간만큼 청춘을 좀 더 길게 설정하면 안 될까?
동경소녀
달이 참 아름답네요
-나쓰메 소세키
원양상선 속에서도 육지에 있는 누군가를 동경할 수 있다는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대학생 시절의 나는 수업이 비는 시간이면 그 계절에 피는 꽃과 관계없이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도서관은 4.5층 높이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언덕 위에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르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고 숨을 골랐다.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 마시면 이내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언덕의 끝으로 가기 전 길목에는 예술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바하의 선율은 다른 학생들처럼 피시방으로 흐르지 않고 도서관에 온 나를 위한 칭찬으로 들리기도 했다.
구름이 예쁜 날에는 예술관 건물을 울리는 음색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공연을 듣곤 했다. 예술관 건물 주변에는 단풍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3학년 가을 학기, 단풍이 익었을 무렵에는 단풍나무가 누군가의 염색한 머리와 비슷하게 보였다. 연주실에서 단풍나무를 닮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가를 상상하며 그를 동경했다. 그 후로 졸업 때까지(대학을 졸업하기 싫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얼굴 없는 예술가를 줄곧 상상하고 동경하였다.
23년 9월, 예술관 안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던 사람과 닮은 이를 성당에서 보았다. 긴 생머리를 전부 가을의 단풍나무 색으로 염색하고 가늘고 긴 손가락을 지녔다. 사실 그 모습을 봤을 때 연주했던 음악은 기억나지 않고 10개의 길고 흰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기억밖에 나질 않는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바이올린을 부전공한 그분은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게 느껴질 만큼 이질적이었다. 요즘말로 나와 그분의 그림체가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피아노보다는 바이올린 연주를 더 좋아했는데 듣고 있다 보면 문득 성전의 꼭대기에 올라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전셋집에서 쫓겨나 부모님 집으로 돌아온 시점이었는데 그분의 음악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성가대 지휘자와 친분이 있어 쉽게 성가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육지를 떠나기 전까지 성가대에 속해있던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조금 더 가까이서 그분의 예술을 동경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떼제미사를 드린 적 있다. 떼제미사는 짧고 단순한 곡을 반복적으로 노래하며 묵상을 통해 평안과 성찰을 한다. 평소보다 긴 예배시간과 성가시간이 편성되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촛불을 켜고 차분한 분위기에 진행된다. 떼제미사를 위해 평일에도 모여 연습을 했고 미사 전 네 시간, 미사 두 시간 동안 가슴이 벅차도록 성가를 불렀다. 그분의 바이올린 연주 위에 내 목소리를 덧입혀 노래하는 동안 내 마음은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처럼 맑고 고요해졌었다.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승선행활 중 가슴이 뛰고 있다는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가지 행동을 하며 가슴이 벅차오르며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런닝 머신 위로 올라가 십 분만 뛰면 간단했다. 스마트워치에 심장박동수가 분당 150회 이상을 쉽게 넘어갔다.
두 번째로는 2만 리 떨어져 있는 동경하는 이를 생각하면 됐다. 그분의 손가락과 절절한 연주, 바이올린만큼이나 맑은 목소리를 생각했다. 가슴은 온도 제어기가 고장 난 튀김기의 기름처럼 쉽게 달아올랐다. 달리기보다 더 높고 빠르게.
한때는 동경하는 이의 악기 연주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었다. 다행히 떼제미사의 녹음 파일을 저장해 뒀었다. 성가 부분만 편집해 50분짜리 성가 모음집을 만든 뒤 마음이 지옥에 빠지려 할 때마다 떼제미사 편집본을 들으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다. 녹음된 디지털 파일이 만약 카세트테이프였다면 테이프가 늘어졌을 만큼 많이 들었다.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의 장점은 그를 롤모델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길을 걷고 있으면 참새가 어깨에 앉을 것만 같이 무해해 보였다. 그분의 삶에는 향기와 콧노래로 가득할 것 같았다. 나의 삶도 그분의 삶처럼, 동화처럼 꾸며보고 싶었다.
고민되거나 결정해야 되는 상황에 그가 어떻게 대처했을지 가정해 보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했다. 나는 덜렁댔고 그는 침착했다.
내 기분에 나의 행동을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슬플 때 술을 통제했다. 앞머리마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그처럼 외모와 옷가지를 단정히 하고 방도 항상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잘 웃고 친화력이 좋은 그처럼 가끔은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웃어보기 위해 입 근육을 움직여보기도 했다. 다른 세계에 있는 그의 옆에 다시 돌아갔을 때 그가 속한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