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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너의 윤슬

싱가포르 표류기

너의 윤슬     

바다는 마음을 움직이고, 상상력을 고무시키며, 영혼에 영원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 로버트 와이어랜드     


 점심 일을 마치고 저녁 일을 시작하기 전, 두 시간의 여유가 주어진다. 보통은 방에 들어와 바다가 슬쩍 보이는 창문에 커튼을 치고 바로 잠에 들지만, 그날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무 감정이 없던 주위의 여느 여성이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커튼을 치려는 찰나, 배에서 창밖을 통해 바라본 벵골만 부근의 인도양에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구름이 겨우 두세 점 떠 있는 날이었다. 오후 두 시의 백색 태양이 바다를 비추며 치명적인 생명력을 전파하고 있었다. 바다에는 윤슬이 가득했다.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커튼을 치는 것을 멈추고 로즈마리차에 얼음을 띄운 후 창틀에 앉았다. 

 시속 38km로 나아가는 상선은 물을 가르며 파도를 일으킨다. 파도의 바깥쪽 부분만 햇빛을 반사하며 내게 윤슬을 선물한다. 윤슬이 서핑하듯 매끄럽게 파도 위에 올라탔다. 파도 뒤에 비슷한 모습을 한 파도가 생기고 조금은 다르게 빛나는 윤슬이 올라선다. 두 쌍의 윤슬과 파도가 나란히 나와 배를 따라온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 고개의 각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 눈동자만 굴려 배와는 약간 떨어진 원양의 윤슬을 바라본다. 윤슬처럼 빛나는 여성은 나를 눈치채지 못하지만, 나는 맘껏 그녀를 훔쳐보는 것처럼. 

 윤슬은 바다와 해의 변덕에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반짝인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방문했던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월드에서 크리스털들을 한 곳에 넓게 펼쳐놓은 보석의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가는 것 같다. 어제저녁에 보았던 인도양 상공에 떠 있던 은하수가 바다에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윤슬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점이 아닌 면으로 빛난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마신 수은처럼 은색 액체가 바다 위를 돌아다닌다. 

 윤슬의 무리에서 시선을 비껴가 홀로 피어난 소중한 윤슬을 보면 내 눈은 밝아진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서 나눠준 전기 실험 도구를 받아 병렬로 놓인 건전지를 직렬로 연결해 작은 전구가 조금 더 밝게 빛나는 것을 바라볼 때의 눈처럼.

 윤슬을 보다 넋을 놓고 눈에 초점을 잃는다. 초점을 잃은 몽롱한 시선에 윤슬은 그 모습을 다시 한번 변화한다. 유리잔에 막 따른 사이다의 표면처럼 톡톡 튀어 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호수에 내리는 비에 왕관 현상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아가 정신마저 아득해지면 푸른색 폭죽이 사방에서 튀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멸치 떼가 형이상학적인 형태로 이동하듯 윤슬도 규칙 속에서 자유롭게 폭발한다. 

 지나가는 구름이 해를 막아 윤슬이 바다에 녹아내리면 아쉽다. 잠깐의 아쉬움은 이내 구름이 지나가고 다시 돌아온 윤슬을 더 애틋하게 보여준다.

 윤슬에도 색이 있다. 루비에서는 빨간빛이 나고 아쿠아마린에서는 파란빛이 나는 것처럼 파란 하늘은 파란 윤슬을 만들고 노을이 질 때면 붉은 윤슬이 생긴다. 태양이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순간의 윤슬은 마치 횃불이 위가 아닌 아래로 출렁이며 붉게 타오르는 것 같다. 다만, 나는 파란 윤슬이 더 좋다. 붉은 불보다는 푸른 불의 온도가 더 높기 때문일까? 파란 하늘 아래의 윤슬은 더 격렬하게 스스로를 박살 내며 푸르게 타오른다. 

 문득 내 기억 속 초록 윤슬이 떠오른다. 승선 직전, 성당에서 함께 성가를 부르고 청년회 활동을 하던 자매님과 나란히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이고 묵상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마피아 게임에서 어둠이 지면 마피아만 고개를 들고 시민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나는 머리를 들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자매님을 보았다. 무엇이 그리 간절한지 감겨있는 눈이 약간 찡그려져 있다. 올라간 눈꼬리는 파도의 유선형을 닮았다. 그녀의 뒷배경에는 성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초록색 빛이 핀포인트 조명처럼 그녀를 빛냈다. 그 빛은 그녀의 눈썹 사이사이를 투과하며 윤슬처럼 반짝였다. 배에서 윤슬을 볼 때면 그녀가 떠오른다. 

 오후 세 시의 연한 다홍색 태양이 하늘색 인도양을 비출 때까지 윤슬을 보았다. 커튼을 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의 기억 속에 윤슬의 잔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잔상은 태양에 빛나는 윤슬이 아닌 달에 빛나는 윤슬처럼 여리고 잔잔하다. 너를 닮은 윤슬을 보며 잠에 들 수 있었다. 파도에 배도 내 마음도 두둥실. 아아- 너의 윤슬이 그립다.           


싱가포르 표류기     

해변에서 떠날 용기가 없다면 

당신은 절대로 새로운 바다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안드레 지드     


 나의 역마살은 운명인가 보다. 다섯 항차를 돌며 호주, 카타르, 오만 그리고 싱가포르 도크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도크 입항은 내게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판교에 있는 서울 톨게이트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초록색 네이버건물 같은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흘러가면 하선이라는 지표와도 같다. 싱가포르에 접근하여 마리나베이샌즈 건물을 봤을 때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싱가포르 도크 근처에 앵커를 박았다. 세 팀으로 나뉘어 통선(항만 안에서 묘박 중인 선박과 육지 간의 연락을 중계하기 위해 사용되는 선박)을 타고 입국 수속과 비자를 받으러 나갔다. 통선 승선을 위해서는 선체 위에 사다리처럼 길게 붙어있는 갱웨이를 이용해야 했다. 평소 도선사가 와서 탑승할 때 사다리를 내리는 것을 위에서 바라본 적은 있는데 각도상 어떻게 계단이 펴지는지, 어떻게 올라오는지는 보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사다리 모양의 갱웨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갑판장이 갱웨이를 리모컨으로 움직여 통선이 있는 수면에 내렸다. 체감상 아파트 5층 높이의 가파른 갱웨이를 내려가야 했다. 촉촉하게 비가 내리고 있어 미끄러지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갱웨이 계단 자체도 미끄럼 방지가 잘 되어있고 장갑과 안전화를 착용했기 때문에 신발과 장갑이 잘 착지되 문제없이 내려갈 수 있었다. 

 갱웨이의 끝에서는 선체 밑에 대기하고 있던 통선에 점프해서 안착해야 하는데 파도의 조류에 갱웨이와 통선이 울렁거려 꽤나 스릴 있었다. 그 순간에 집중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바다에 빠져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런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고 한다. 

 배에서 또 다른 배를 탔을 뿐인데도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해방감은 엄청났다. 25인승 미니버스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통선은 빠르게 세관을 향해 나아갔다. 싱가포르해협에는 정말 많은 배들이 정박하고 있었다. 세관까지 가는데 닻을 내리고 있는 군함도 보이고 입항해 있는 자동차운반선도 보였다. 동그란 모양의 탱크가 있는 모스형 LNG선 그리고 국내의 다른 해운사들의 배들이 보여 반갑기도 했다. 배들 사이에 작은 섬들이 숨어있기도 했다. 얼마 만에 신록을 가까이서 보는지 눈이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해풍에 실려 식물 냄새가 불어왔다. 실외로 나가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말도 못 했다. 다행히 한 갑판장이 먼저 실외로 나가 의자에 앉았다. 나도 곧 따라 나갔고 해풍과 대기를 뚫고 배가 나아갈 때 생기는 와류를 맞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뒤로 날아가고 있으며 바람이 사이사이 내 머릿속을 긁어줘 쾌감이 느껴졌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에 음악을 끄고 바람이 귀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비도 촉촉하게 내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탈옥에 성공해 밖으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비슷한 쾌감이 느껴졌다. 

 입국 심사장에 도착해 땅에 다리를 디뎠다. 안정적이었다. 배를 타다가 육지에 나오면 육지 멀미를 한다던데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입국 심사와 비자 발급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앞서 나간 3등 항해사가 심사관에게 비자에 대해 설명했고 감색 회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 모두에 대해 같은 케이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심사관에게 짧게 인사를 한 후에 회사 이름을 말하고 여권과 선원수첩에 도장을 받았다. 몇 분 후 심사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재밌던 건 심사를 받은 후 건물 밖을 나가보지도 못하고 건물 내의 화장실만 이용한 후에 문밖만 바라보다가 입국 심사를 받은 곳으로 나와 통선을 타고 다시 배로 돌아갔다. 아쉬운 짧은 일탈이었지만 이삼일 후면 싱가포르 본토에 상륙할 수 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사실 도시의 불빛과 수만은 배를 볼 수 있는 변화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감상이 되었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건조했던 지난날의 잠자리와는 다르게 다가올 내일을 설레하며 잠에 들 수 있었다. 

 밤에는 항해사의 시야를 위해 외부로 나가는 모든 불빛을 차단한다. 따라서 안정상의 이유로 갑판을 달릴 수 없는데 승선생활 중 유일하게 이 날 밤에 배를 달릴 수 있었다. 갑판 위에도 주황색 불빛이 켜졌고 배는 앵커를 내리고 멈춰서 있기에 가능했다. 여러 대의 대형 선박이 바로 옆에 서 있고 저 멀리 해안가에는 도시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주황색 불빛은 초록색 갑판을 비추고 있었고 나는 그 위를 달렸다. 눈앞의 낭만에 매료되어 그날에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무리 달려도 숨이 차지 않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다음 날 정오 즈음 무스카트호는 싱가포르 동남부에 위치한 Tuas 수리 도크에 입항하였다. Tuas는 해양 산업과 물류의 중심지로 개발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섬이다. 배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항상 망망대해였는데 도크에서는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은 평소와 크게 달랐다.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타워크레인과 그보다 더 큰 배들이 일렬로 주차장의 차들처럼 나열돼있는 게 신기했다. 마침 전선 전에 탔던 라스라판호도 비슷한 시기에 도크에 들어오게 되어 옆 도크에 나란히 주차될 수 있었다. 같은 회사의 표식을 하고 일란성쌍둥이처럼 똑같은 외관과 칠을 한 배가 나란히 서 있으니 인큐베이터 같기도 했다. 길거리에는 수많은 직원들이 현장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현장과 현장 사이가 멀고 조선소 안에는 자가용 통행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타워크레인용 레일이 설치되어 있었고 레일을 따라 타워크레인이 거대한 몸집을 움직였다. 신기한 배들도 많이 보였다.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흔히 볼 수 있는 상선 외에도 군함, 카캐리어 그리고 정제선이라는 시추한 석유를 해상에서 바로 가공을 하는 거대한 배도 있었다. 정제선은 무스카트 호와 라스라판호가 합쳐진 것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정유 계통의 특수 선박은 척당 가격이 4조가 넘는다고 한다. 

 수리 도크는 흡사 거대한 중고차 전시장 같았다. 다양한 선박이 주차되어 있는 도크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싱가포르의 65,000달러가 넘는 1인당 GDP는 비단 금융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닌 해상 요충의 이점을 잘 활용한 것도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옆의 말라카 해협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국가가 있음에도 싱가포르라는 작은 도시국가가 해협의 이점을 더욱 잘 운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항 날부터 도크에 물을 빼는 작업을 했다. 물을 빼는데도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다고 했다. 드라이도크로 만들어서 평소에는 수면 밑에 숨어있는 선체의 아랫부분까지 전부 수리를 진행할 예정이다. 

 도크에 입항하게 되면 매일 밖에 나갈 수 있다는 말과 달리 외출이 쉽지 않았다. 지금껏 입항했던 도크는 시내와 2~30분 거리였는데 이번에 처음 입항한 Tuas는 시내로부터 1시간가량 떨어져 있었다. 다섯 시에 저녁식사가 시작되는데 통차는 5시 50분에 예정되어 있었다. 조선소를 벗어나 통차를 승차하는 곳으로 걸어가려면 25분 걸렸다. 내 업무는 이르면 평소와 같이 7시나 되어야 끝났고, 다른 부서에서 야근을 하면 나는 그 시간 동안 꼼짝없이 주방을 지켜야 했다. Freedom is not free라는 말처럼 자유를 누리려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 뒷정리가 메인 업무인 내가 자유를 찾아 밖으로 나가려면 그 업무는 조리수와 조리장이 감당해야 했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3~4일에 한 번쯤은 외출을 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속으로 끙끙대고 있었는데 그 마음이 행동과 얼굴에 드러났는지 선배들이 마무리는 본인들이 나눠서 할 테니 부담 갖지 말고 맘껏 외출하라고 했다. 조리장과 조리수는 외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 인원들이 적은 날에는 오히려 먼저 내게 나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도크에 들어온 후로 불규칙해진 식사 시간과 식수인원으로 인한 다른 부서와의 트러블 등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도 역시 뱃사람의 어진 마음과 배포는 바다와도 같다. 그들은 내가 놀러 나가는 동안 나의 일까지 했다. 그 대가로 그들의 일을 내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입항 3일 차에 첫 외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선배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과 심카드 심부름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었다. 평소 작업복으로 입지 않은 유일하게 깨끗한 외출복을 입고 오랜만에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였다. 머리를 다듬기 위해 승선 이후 처음 열어본 왁스통은 반쯤 굳어있었다. 굳은 왁스를 머리에 왁스를 발라 왼쪽 위로 넘겼다. 상황실에 보고를 한 후에 헬멧을 착용하고 출입증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도크와 배를 잇는 갱웨이는 100m 정도의 낮은 경사도로 길게 이어진 계단이었다. 이 계단을 내려갈 때면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 쳤다. 맞바람이 강했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위에서 내 몸을 찍어 내렸다. 계단을 내려가서 선미 쪽에서 출발하여 선두 쪽으로 갈 때 즈음이면 온몸에는 땀이 났다. 나를 포함한 뚱뚱이들은 셔츠 상의 뒷부분이 전부 땀에 젖었다. 조금 더 심한 뚱뚱이는 앞뒤 셔츠가 다 젖고 머리마저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다 젖었는데 자기한테만 비가 왔다고 이야기해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통차에서 한 시간 정도 시원한 에어컨을 쒜며 옷이 다 마를 때 즈음 센터에 도착했다. 처음 센터로 가서 일행들과 헤어지고 온전한 혼자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자유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심볼 마리나베이샌즈와 글로벌 금융 투자사들이 즐비한 중심상업지구는 준공된 지 15년이 채 되지 않은 새 건물들이다. 한국의 송도 신도시나 신대륙인 호주의 브리즈번, 시드니와 비슷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건물 숲을 산책하며 오랜만에, 그리고 처음 마주한 문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상선에 있으면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잠에 들 때까지 매일 보는 사람의 얼굴이 똑같다. 생경한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이나 활기 넘치는 미소에 빠져들었다. 쇼윈도를 바라보며 나도 자연스레 미소를 지어보려 했는데 그 미소는 영 어색해 보였다. 미소 연습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외출을 한 날 나는 스타벅스에 방문하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스타벅스를 좋아한다. 한국은 물론 내가 살던 곳(일본과 헝가리)에서 골드회원이 되었다. 외출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맛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먹는 것이었다. 마리나베이샌즈를 끼고 있는 호수를 마주한 스타벅스 One Fullerton점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시켰다. 물은 적게 그리고 얼음은 많이 요청해서 스타벅스 원두 특유의 타고 쓴 맛을 더욱 강조시켰다. 강릉의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다를 보고 해풍을 맞아가며 마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슷한 느낌으로 스타벅스 앞 노천 테이블에 앉아 호수와 마리나베이를 배경으로 마시는 커피는 일품이었다. 햇살이 지면에 닿은 싱가포르 특유의 냄새가 커피에 더해져 고소한 향이 배가되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많아 약간의 소음이 있었지만, 일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소음에 예민한 내게 선물해 준 노이즈캔슬링에 특화된 소니 WF-1000XM5 이어폰으로 지우면 그만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읽었고, 프랑스 AFP통신에서 요청한 신문 인터뷰를 작성하였다. 밤 11시가 되어 다시 통차를 타고 배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통차를 타는 곳에서 선배들을 만났다. 선배들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도파민이 충분이 자극될만한 무언가를 하고 왔을 테 였다.     

‘지수 씨, 첫 외출 어땠어요? 뭐 했어요?’

‘저는 스타벅스에서 줄곧 커피를 마셨습니다.’

‘지겹지 않았나요?’

‘군중 속에서 고독을 즐긴 그 평화로운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평생 처음 들어봤을 법한 답변을 들은 선배들의 얼굴 표정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

 싱가포르는 부자 나라임에도 신기하게도 차량이 많이 없다. 차량 수를 제한하기 위해 차 구입 시 별개로 차량취득권리증을 취득해야 하며 평범한 중형급의 차량도 약 1억 원 이상이 소요된다. 또한, 싱가포르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도시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동양의 유교사상과 서양의 젠틀한 매너가 잘 융화되어 시너지 효과가 발휘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강력한 벌금과 태형이라는 제도가 존재하고 있다. 특이한 범칙금 제도는 껌을 씹거나 판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 공공장소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행위 등의 낯선 것들이 있다. 이런 경범죄에 대한 범칙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형식적으로는 법적으로 잘 마련되어 있기에 크게 부럽지 않았다. 다만,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태형 제도에 대해서는 흥미로웠다. 사기, 부정부패, 마약 밀매, 성폭행 등의 흉약범죄를 저지른 18세~50세의 남성에게만 적용된다고 한다. 수감자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예고 없이 교도소 건물 옥상에서 집행한다. 수감자는 장파열을 방지하기 위한 두꺼운 벨트를 채우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손발을 형틀에 묶은 채 다리를 벌려 엉덩이를 들게 한다. 1분당 1대씩 최대 160km/h 속도로 성인은 최대 24대, 청소년은 최대 10대까지 때린다. 태형도구는 길이 1.2m, 직경 1.27cm의 등나무로 만드는 회초리이다. 집행관은 3명이 교대로 도움닫기를 통해 체중을 실어 힘껏 내려친다. 때린 후 엉덩이 살이 터지고 피가 나면 간호사가 소독약을 발라주며, 정해진 시간이 되면 또다시 매질을 시작한다. 2~3대 맞고 나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다 맞기 전에 기절하면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한 뒤에 다시 형을 집행한다. 최근에는 태형 기계를 도입하여 태형을 집행한다. (*출처 위키백과)

 이 훌륭한 제도는 공포감을 유발하여 범죄 예방과 재범 방지에 탁월하다고     하다. 태형 제도를 한국화 시켜서 도입하고 곤장을 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을 도입할 때 법을 조금 더 선진화시켜서 곤장 집행자는 피해자가 되면 좋을 것 같다. 특히 내 주적인 사기꾼과 경제사범에 대해서는 과중 처벌이 되어 그들의 엉덩이와 마음이 푹 하고 터져버리는 희망찬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꾸어 봤다. 

 사기를 당한 가슴 아픈 경험 때문인지 안타깝게도 나는 돈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빚도 다 갚았고 해운사에게 받은 감사한 월급이 몇 번 통장에 들어왔다.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풍족하게 쓸 수 있는 정도의 잔고였다. 하지만 내가 힘들게 번 노동의 대가가 들어있는 통장임에도 나를 위해 손을 잘 대지 못했다. 외출했을 때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고 먼 곳은 가지 않았다. 택시는 한 번도 타지 않았다. 대중교통비가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자꾸 대한민국의 대중교통비와 비교를 하게 되었다. 무료 전망대를 갔고 카지노에 들어가서 무료 커피와 콜라를 마시고 나왔다. 내가 가장 많은 돈을 쓴 곳은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에서 테이크아웃을 하면 아까웠을 테지만, 벤티 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킨 후에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커피를 마셨다. 가끔씩 무료해질 때면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빼고 바로 옆의 지중해 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선상에서 달리기를 하고 싶었을 때 먹고 싶었던 클라우드치즈케이크를 사 먹으려 했으나 그 제품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뉴욕케이크가 있었는데 이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케이크가 아니라며 매번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시켰다. 

 밖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걸 했어야 됐는데 돈을 너무 아꼈다. 되도록 저녁을 배에서 먹고 나와 식비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외출을 한 후에 복귀 통차를 타면 11시고 배에 도착하면 12시가 되었다. 카페에서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중 지중해 음식점에서 올리브오일과 해산물 냄새가 풍겨오면 식욕을 참기 힘들었다.  

 한 번은 사테(꼬치) 거리 옆 라우 파삿이라는 길거리 식당가에서 만 원짜리 새우볶음면을 먹었다. 새우볶음면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저녁을 거르고 나와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으므로 새우볶음면만으로는 부족했다. 사테거리에서 풍겨오는 숯불 위에 떨어지는 닭기름의 냄새가 라우 파삿 식당가도 점령한 상태였다. 닭꼬치에서 닭을 젓가락으로 분리한 후에 새우볶음면 위에 얹어놓고 면과 닭을 한 번에 집어 입에 욱여넣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뭐가 그리 아까운지 5000원짜리 닭꼬치를 사지 않고 돈을 아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10시간씩 하루도 쉬지도 못하고 일하며 고생을 하는데 나한테 5000원이 아까워 그 작은 선물도 해주지 못했다. 새우볶음면에 집중하며 닭꼬치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중국계 손님들이 인당 두 그릇씩의 식사와 요리를 먹은 후에 닭꼬치는 거의 손도 안 대고 남기고 갔다. 볶음면을 먹는 내내 그 닭꼬치를 빼올까 생각하느라 볶음면의 온전한 맛도 다 느끼지 못했다. 

 결국 닭꼬치를 먹지 않고 식기를 정리한 후에 자리를 떠나왔다. 많은 생각을 했다. 5000원을 아끼고 닭꼬치를 먹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후회는 분명 내가 절약한 5000원 보다 비싼 후회였으며 전력을 다해 파도를 헤쳐가는 내게 주는 모욕이었다. 내게 근사한 선물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밉다. 작년에는 돈이 없었지만 이제는 돈이 있는데도 그 하찮은 소비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선 후에는 소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적립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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