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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지수 씨, 배에서 내릴래요?

떡볶이의 교훈

지수 씨, 배에서 내릴래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속담     


 육지에 있었을 때 코인노래방은 내게 효과 빠른 진정제 혹은 감정의 쓰레기통 같은 느낌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분을 풀어야 했다면 나는 코인노래방으로 향했다. 천 원을 넣으면 세곡을 부를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스트레스 수치에 따라 한 장에서 세 장의 지폐를 넣고 노래를 불렀다. 군대에 있었을 때도 코인노래방에 자주 갔는데 말년에 평소 친한 후임에게 전역 후에 내가 뭘 하면 잘할 거 같냐고 물으니 소리 지르는 사람 하면 잘할 거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하.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마치 폭포 밑에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얼굴에 미스트가 뿌려지는 것처럼 상쾌하고 몸속 깊숙이 있는 이산화탄소를 내뱉고 산소를 충전한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내 몸 곳곳에 있는 암세포들이 터져버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라스라판호에 있을 때는 저녁이면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나는 사관 팬트리에서 마지막 설거지 거리를 식기세척기에 넣은 뒤 식기가 세척되는 동안 바로 옆 사관휴게실에 가서 노래방기계를 부팅했다. 얼추 식기가 세척되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 노래방기계는 부팅이 완료된다. 나는 방에도 가지 않고 앞치마를 멘 체 그날 제때 토해내지 못한 감정들을 마이크에 실어 보낸다. 댓 곡 정도를 부르고 날마다 상쾌한 마음으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노래방은 스트레스에 압력밥솥처럼 달아올랐을 때 터지기 전 증기를 배출하는 무게추 같은 역할이었다. 

 그러나 무스카트호에서는 자유롭게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부원의 실질적 리더인 갑판장도 가스장에게 허락을 득한 뒤에 노래방을 사용했다. 물론 노래방을 사용한다고 물으면 안 된다고야 하지 않았겠지만, 허락을 득하는 게 껄끄러워 그날 쌓인 감정들을 제때 배출시키지 못하고 속에 묵혀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쥐 취급하는 조리장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물론 내가 속한 부서의 장인 그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뭐라고 해서 한 번은 눈을 이상하게 뜬 적이 있다. 마치 예전에 선배 연예인이 후배 연예인에게 ‘너 눈 왜 그렇게 떠?’라고 말했을 때의 후배의 눈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2주 후 아이폰 건강 앱에서 알림이 떴다. 최근 계단 오르는 추세가 증가하였습니다. 평소에는 매일 20층을 오르내렸는데 2주 동안 40층으로 바뀌었다. 냉장창고가 아래층에 있었는데 조리장이 2주간 평소보다 내게 물건을 가져오라고 한 명령이 많아져서였다.  

 조리장에게 쥐 잡듯이 털린 날이었다. 우울 속에서 설거지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조리장은 실항기사들과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다른 선원들은 조리장을 순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그 이면적인 모습에 내 스트레스 지수는 상한 점을 찍었다. 

 나는 방에 들어간 후에 욕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다만, 문제가 된 것은 소리를 얼마나 꽥꽥 질러댔는지 그 소리를 조리장과 실항기사가 그대로 들었다는 점이다.  

 며칠 후 가스장이 나를 소환했다. 힘든 일 있냐 할만하냐 누가 괴롭히냐 일이 힘드냐 가끔 쉬냐 등 생활 전반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일을 시작하고 같은 배에서 신입만 네 명 그만둔 걸 본 나는 신입들이 배에서 얼마나 Fragile 한(깨지기 쉬운) 취급주의의 인간들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가스장에게 일 없다고, 할만하다고, 선배들도 너무 친절하고 잘 알려준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화를 갑자기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냐고 물어왔다. 실항기사들이 위에 보고했다는 것을 나는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했던 문제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별 소득이 없자 갑자기 너무 친근하게 대화를 걸어왔다. 가스장으로서의 고충을 먼저 털어놓았다.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 요인이나 살인적인 업무 강도 심지어는 이직 안 하고 전 회사에 있었으면 이미 선장이 되었을 텐데 약간은 후회한다는 말까지 풀어놨다. 약 십 분 정도의 철저하게 사적인 이야기를 마친 후에 다시 뭐가 힘든지 물어왔다. 나는 이 즈음에서 면담은 마무리된 줄 알고 신나서 힘든 이야기를 했다. 쉬는 날이 없는 게 힘들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힘들다 등 지금껏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갑자기 사관 중에 아침밥을 먹는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물어왔다. 나는 순순히 답했다. 가스장은 즐겁게 배를 타라는 말을 했고 대화는 마무리됐다. 

 다음 날부터 사관들이 아침밥을 먹지 않았다. 매일 와서 간장계란밥을 만들어 먹던 이항사와 가끔 라면을 끓여 먹던 이기사 등 세네 명의 아침을 먹던 사관들의 발길이 멈췄다. 나는 대단한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많은 수의 부원들은 아침을 먹기 때문에 소수의 사관들의 아침 준비는 일도 아니었다. 나의 쉽게 벌려진 입 때문에, 아주 적은 일거리가 줄었고 큰 마음의 일거리가 생겼났다. 한동안 아침밥을 못 먹게 된 사관들의 눈을 차마 마주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선장이 나를 불렀다. 직접적으로 조리장이 괴롭히냐고 물었고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직 일이 서툴러서 알려주는 과정이라고 대답했다. 선장은 이번에 새로 오는 조리장과 조리수는 더 무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독에 들어가게 되면 업무량이 평소보다 많아질 것이라 했다. 갑자기 선장의 눈이 조금 흔들리는 듯하면서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더니 내게 하선할 생각 있냐 물었다. 배가 암초에 충돌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뭐가 문제였을지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반면, 나는 누군가 내 몸을 부여잡고 두 다리를 공중에 뜨게 한 뒤 배에서 육지나 바다로 내 던지는 거 아니면 자진해서 하선할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서 내린다는 것은 곧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하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답했고 선장은 조리장에게 너무 굴리지 말라고 이야기할 테니 여기 있는 동안 스트레스 잘 관리하고 재밌게 타라고 했다. 선장의 말은 조리장에게 잘 전달된 것 같았다. 그날부터는 조리장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다음 항차의 확정 명단이 배포되었는지 선장과 가스장, 조리장과 조리수 그리고 가스수는 내게 앞으로 고생 좀 할 거라며 이번에 승선하는 조리장과 조리수에 대해 설명했다. 두렵다. 마치 폭풍이 눈앞에 보이는데 그걸 알고도 뚫고 나아가야 하는 배의 운명과도 같다. 

 하선 권유할 정도로 일을 못했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하루도 못 쉬고 10시간씩 일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 나의 내 외면의 문제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사실 업무에 집중을 잘 못해 조리장에게 가끔 혼나는데 멘털이 나약한 나는 쉽게 어두워진다. 악명 높은 조리장과 조리수 밑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못하겠다고 인사팀과 직속 상사들에게 말하고 싶지만, 나는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이겨낼 수 있다고 나를 믿어야 한다.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하면 그 누가 나를 믿을 것인가.

 배와 시간은 끊임없이 나아가고 나는 고뇌 속에서 방황했다. 결국 배는 평택항에 도착했고 다음 조리장이 왔다. 그의 눈빛은 살 발했다. 일본의 편의점이나 마트에 가면 항상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도둑질을 예방하기 위해 매대에 매서운 눈빛의 그림을 부착해 놓는데 그 눈과 비슷했다. 어릴 적 씨름과 축구를 했다는 그는 덩치가 산만했다. 난 잔뜩 졸아있었다. 그가 내게 물을 때 우물쭈물 대답을 잘 못하고 있으면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눈이 세모나게 변하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 자주 소리를 질렀지만, 그곳에 악의는 없었다. 소문의 실상은 그는 열정적으로 말할 뿐인데 주방 밖에서는 윽박지르는 것처럼 들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난 그가 너무 좋았다. 그때까지 만난 조리장과 조리수 중에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선배였다. 조리장에게서는 정이 느껴졌다. 조리원들은 대개 1년 안에 90%가 그만 두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선배들 입장에서도 기껏 알려놨더니 죄다 그만두니 배신감도 많이 느낄 것 같다. 알려주지는 않고 소리만 지르는 입장도 이해 간다. 

 그는 밥을 같이 먹으니 나를 식구라고 했다. 수년 넘게 알아온 사관들보다 얼굴 본 지 얼마 안 된 내가 더 좋다고 했다. 그는 존경할 수 있는 조리장이었다. 칼은 재료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며 칼질만큼은 스스로를 선대에서 최고라고 자부했다. 실제로 손목에 힘을 주기보다는 어깨와 팔을 움직이며 재료를 손쉽게 썰어나갔다. 또한 본인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요리 철학이 있었다. 그는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았고 재료에서 뽑아내는 감칠맛은 탁월했다. 매 항차 휴가를 나가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고 일본 후쿠오카에 견학을 갈 정도로 끊임없이 요리를 연구했다. 그 덕분에 많은 새로운 메뉴가 선대에 개발, 공급되었다고 한다. 열 길은 알아도 사람 속 하나는 모른다는 말이 있다. 역시 소문만으로는 누군가를 섣부르게 판단을 하면 안 되겠다.

 전에 있었던 하선 제의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이번 항차는 도크에 입항하는 건데 도크에서는 작업자도 많아지고 엄청 많은 변수들이 생긴다. 조리장은 손발이 맞는 걸 중요시했는데 조리수도 조리장을 처음 만났고 거기에 처음 배를 탄 나와 근무하면 부담이 갈 거 같아 회사에 조리원(나)에 대한 교체를 요구했다고 한다.           

떡볶이의 교훈     

젊은이들은 젊음을 잃어본 적이 없기에 젊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中   

  

 때때로 소나기가 내리고 하루 종일 회색 하늘이었던 오늘 저녁의 사이드 메뉴는 떡볶이다. 조리수는 두껍고 흰 가래떡을 고추장과 물엿을 넣고 삼십오 분을 약한 불로 뭉근하게 조려냈다. 먹고 나면 치아 안쪽 잇몸에 떡이 쩍쩍 달라붙어 손가락으로 떼어내야 할 만큼 쫄깃했고, 떡볶이 속까지 양념이 매콤 달콤하게 배어있었다. 지금은 참치대뱃살에 밀려났지만 떡볶이는 학창 시절 내가 최고로 애정하는 음식이었다. 중학생 때는 용돈의 9할을 떡볶이에 바쳤으며 라면 이외에 가장 자주 만드는 음식은 떡볶이였다. 떡볶이를 하도 많이 먹어서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땀에서는 떡볶이 냄새가 풍겼다. 

 떡볶이는 메인메뉴가 아니기 때문에 양이 충분치 않다. 선원들은 떡볶이에 환장해서 조리부가 밥을 먹으러 갈 때 즈음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항해사들이 떡볶이를 엄청 좋아했다. 밤에 야식을 먹으러 주방을 어슬렁거릴 때 항해사들이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높은 확률로 떡볶이였다. 항해사의 필수 덕목에 떡볶이를 좋아해야 하는 게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업무 후에 방에서 맥주와 함께 혼자 먹으려고 가장 통통한 떡볶이를 골라서 통에 쟁여뒀다. 사관 식당까지 배식이 전부 끝난 후 부원식당에 갔을 때는 예상대로 떡볶이가 동나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충 끼니를 때웠다. 식사가 전부 마무리되었고 떡볶이 생각에 군침을 흘리며 열심히 설거지를 했다. 평소 좋아하던 유튜버의 술먹방을 보며 외롭지 않게 떡볶이를 먹겠다는 계획까지 구상했다. 맥주를 차게 먹으려고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냉동고로 옮겨 놓을 정도로 설거지가 대부분 끝난 시점이었다. 조리장이 와서 내일 점심에 짬뽕이 나가기 때문에 양파를 썰어야 하는데 깐 양파가 다 떨어졌다고 양파 한 망의 껍질을 다 까놓으라고 했다. 내일 양파를 많이 사용할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충분히 재료 준비를 하지 않은 분명한 내 실책이다. 저녁 업무 시간에 다음 날 밑재료를 준비하는 게 나의 몫인데 떡볶이에 정신이 팔려 양파의 재고를 체크하지 않은 것이다. 평소였다면 오히려 내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시를 한 조리장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군말 없이 양파 껍질을 깠을 것이다. 하지만 떡볶이를 먹으려던 내 원대한 계획이 처참하게 짓밟힌 순간이었다. 머리는 화로 가득 차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다면 머리에서 승한 열이 수증기로 변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있는 공간이었다면 소리를 지르고 주방 수납장을 발로 찼을지도 모르겠다. 충동적인 행동은 참았지만,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간신히 설거지를 마치고 아래층의 냉장창고로 들어갔다. 두꺼운 철문으로 밀폐가 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아까 힘겹게 참은 분노를 그곳에서 표출했다. 냅다 소리를 지르고 창고의 철벽을 발로 두 세 차례 찼다. 그제야 화가 풀리고 이성이 돌아왔다. 발끝과 목구멍에 통증이 느껴졌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는지 냉정하게 돌아봤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20kg짜리 양파망을 위층으로 올리며 생각했다.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고 어려운 작업도 아니다. 30분 정도 가만히 서서 조용히 까면 된다. 양파를 까며 생각했다. 나의 잘못된 실책과 별것도 아닌 걸로 화를 내었다. 떡볶이가 도망칠 것도 아니고 짜장면처럼 불어서 맛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30분 후면 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기분만 나빠질 뿐 결국 손해 보는 것은 나다. 처음에는 자책이 시작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화를 내고 멘탈이 나약한 것일까, 이에 대한 스스로의 답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조금은 특수한 상황은 충분히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는 상황이다. 우선은 이 짜증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쉽게 짜증을 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양파 꼭지의 단면을 자르며 양파즙이 튀어 눈가가 촉촉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느덧 양파를 깐 양이 까야할 양보다  많아졌다. 이제 15분 후면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졌다. 문득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오늘 저녁에 한 생각과는 다르게 편협하지 않은 사고가 스쳐 지나갔다. 조리장이 양파를 까라고 했을 때 떡볶이를 먹는다는 명제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먹는 게 30분 늦어졌을 뿐이다. 

 이 개념을 좀 더 거대하게 적용해 보기로 했다. 2022년에 조종 훈련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사기를 당해 2년이 미뤄졌을 뿐이다. 나는 어차피 훈련을 시작할 것이고 무슨 수를 써서든 조종사가 될 것이다. 그 2년이라는 시간은 은행마저 속인 사기꾼들에게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피치 못할 사정이다. 양파를 미리 까놓지 않은 것과는 다르게 내 잘못도 아니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옭매어봤자 나아질 것은 없다. 미뤄졌을 뿐이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는 조종사는 될 것이다.

 떡볶이와 양파로 생긴 에피소드로부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즈음 양파 까기가 마무리되었다. 선반에 묻은 양파의 흙먼지 들은 행주로 깔끔하게 씻어내었다. 행주를 깨끗이 빨아 선반 위에 널었다. 양파를 까기 전 내가 보았던 깨끗한 선반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었다.

 방에 들어왔다. 차갑다 못해 따가울 정도로 시원한 맥주를 들이킬 수 있었다. 예정했던 대로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의 술먹방을 보며 떡볶이를 먹었다. 떡볶이는 30분간 양념이 더 깊게 스며들었는지 환상적인 맛이었다. 예정보다 30분 후에 먹은 떡볶이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예정보다 2년 늦게 조종사가 되면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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