닻의 무게
쉬는 날 없이 일한다는 것
때로는 푹 쉬도록 하라
한 해 놀린 밭에서
풍성한 수확이 나오는 법이다.
-오비디우스
5월 1일 근로자의 날, 당신은 8시간을 일해야 한다면 기쁘겠습니까?
4월 30일 화요일, 여느 때처럼 나의 영혼은 아직 잠들어있고 비루한 육신만이 자동문처럼 깨어나 5시에 출근하여 8시까지 아침 일을 하고 퇴근한다. 8시 즈음 아침 일을 마친 육신이 진하게 탄 커피를 들고 바다를 본 후에 방에 들어오면 비로소 침대에서 깨어난 영혼과 마주하게 된다. 샤워를 하고 다시 침대에 들어가고 싶지만, 다시 깨어나는 고통을 겪기 두렵다. 나만의 시간을 소중히 활용하고 싶어 낮잠을 오후로 미룬 후에 책상 앞 의자에 앉는다. 퀭한 눈을 통해 잠시 책을 읽거나 글로써 쌓인 감정들을 뱉어낸다. 깊은 한숨을 쉰 후 다시 9시 반에 출근한다. 원래는 10시 출근인데 일도 느리고 매일 정시에 출근한다며 나를 쥐 취급하는 조리장이 나의 출근 시간을 30분 앞당겼다. 그의 말이 항상 옳다. 점심 일은 13시에 끝난다. 커튼을 치고 완벽한 어둠 속에서 꿀맛 같은 오침을 즐긴 후에 15시에 출근하여 19시까지 저녁 일을 한다.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10시간 전후의 일을 한다.
식사시간마저도 언제 호출당할지 몰라 악어 떼가 있는 강가에서 물을 마시는 가젤처럼 불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청춘의 피가 들끓는 사관들은 음식을 정말 많이 먹는데, 음식이 부족하다고 부원식당에 자주 찾아온다. 굶주린 악어의 얼굴을 한 사관을 만나면 나는 가젤처럼 튀어 나가 부족한 음식을 채워야 한다.
원칙상 사관이(가장 막내인 실항기사 혹은 3항 기사) 직접 부원식당에 발걸음을 하여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사관식당에는 테이블마다 밑에 BOY(조리원) Call System이라는 버튼이 하나씩 있다. 버튼을 누르면 주방 안에 있는 쇠로 만들어진 종이 쨍하고 울린다. 호기심에 한 번 눌러봤는데 그 소리는 권투에서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유사하다. 종이 울리면 조리원이 사관식당에 가서 요청사항을 이행해야 한다. 2000년 초반부터 일을 시작한 햄스터 조리장은 20년 동안 버튼을 누르는 사람을 한 명 봤다고 한다. 버튼을 누른 사람은 선장이었고 벨의 알림에 조리원의 반응이 없자 화를 냈고 다시 종을 누르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 다만, 40년 경력의 수석조리장은 1990년대에는 종을 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내가 느끼는 2020년대의 원양상선 문화에서 사관들은 부원들을 많이 존중해 준다.
호출이 귀찮아 음식을 여유 있게 담으면 조리장은 음식물 쓰레기 많이 나오게 하지 말라고 한다. 사관들이 찾아오지 않을 만큼 많이 담고 조리장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로 적게 담는 그 미묘한 경계는 아직 찾지 못했다.
불안해서 체할 거 같은 식사 시간을 마무리하고 달력을 보니 아직 화요일밖에 되지 않았다. 저녁 여섯 시 반 즈음 설거지를 하는데 내일도 새벽 다섯 시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퇴근 전인데도 벌써 나를 휘감았다. 설거지 순서는 부피가 큰 대접에서 작은 그릇 그리고 식기류 순으로 진행한다. 수저를 씻는 중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조리장이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니 휴무라고 한다. 물론 매일 밥을 준비해야 하는 조리부는 휴일이 없다. 다만, 공휴일에는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9시에 출근하여 8시간만 일하면 된다. 아, 내일 아침에 늦잠을 잘 수 있다니 존나 기쁘다. (기쁜 정도를 짧은 비유로 나타내고 싶어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존나 라는 비속어보다 더 나은 비유를 찾을 수 없어 부득이하게 사용하게 된 점 양해 바랍니다.)
직장인이라면 대다수가 한 번쯤은 주말을 반납하고 쉬는 날 없이 일해 봤을 것이다. 나 또한 천안에서 회사에 다닐 때, 일본에서 골든위크에 한 번 주말 없이 일해봤는데 삶의 색채가 전부 사라져 눈앞이 흑색으로 보일 정도로 처절했던 기억이 있다. 그 경험을 남들에게 12가지 과업을 마친 헤라클레스처럼 나는 이 정도의 힘든 일도 해봤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 사실 배를 타기 전 여러 경로를 통해 조리부는 쉬는 날이 없다는 걸 익히 들었는데 설마 진짜 쉬는 날이 없겠어? 하고 들어왔다. 근데 진짜 쉬는 날이 없다. 실제로 무슨무슨 날에 어떠한 이유로 한 번 쉬었다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유니크한 상황이고 내게는 처음 배에서 승선하는 날부터 지금껏 그런 일이 없었다. 진짜 주말, 휴일에도 출근해야 했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주말에도 예외 없이 아침밥을 해야 했지만, 주말에는 아침밥을 먹는 사람도 적어 선장 재량으로 쉬게 해 줬다. 다만, 첫 항차를 포함한 세 번의 항차는 기관장이 아침밥을 안 먹으면 죽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말에도 오직 기관장을 위해 아침에 출근하여 밥을 차렸다. 주말이 쉬는 날이 아니라는 건 정말 끔찍하다. 군대 보충대에 입소하여 2박 3일 후에 탄 버스가 집이 아닌 훈련소에 나를 내려줬을 때, 이어지는 7주간의 신병 교육 훈련을 끝내고 탄 버스가 집이 아닌 자대에 나를 내려준 느낌이다.
처음 배에 탔을 때 힘들다고 생각한 게 세 가지 있었다. 다섯 시에 출근하는 것, 선배들의 챌린지 그리고 쉬는 날이 없다는 것. 그중 이른 출근과 선배들의 챌린지(천안에서 다녔던 회사의 부조리가 선상에서의 부조리보다 훨씬 심했다.)는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쉬는 날이 없다는 것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주말이 없다는 것은 육체도 마음도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하루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건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니고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방에 갇혀 하루 종일 누워 뒹굴고 싶다.
벼랑 끝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듯한 느낌을 받는 휴일 없는 생활에 가끔은 정말 미치도록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아프다고 거짓말할까, 일을 그만둔다고 할까 여러 궁리를 해본다. 결국 일을 나가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시각의 마지노선을 알리는 알람이 켜지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방문 고리를 잡고 한숨을 깊게 쉰 뒤 일터로 향한다. 그럼, 그만이다. 대신 그날은 일을 마치면 운동이나 글쓰기는 가급적 삼가고 일찍 꿈나라로 간다.
기댈 곳 없는 부서져버린 멘탈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나만의 방법을 강구했다. 다음은 나만의 방법을 표절한 영화 [쇼생크탈출]의 한 장면이다. 아래의 대화는 주인공 앤디가 2주간 독방에 갇히고 나와 수감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다.
‘독방이 쉬울 리 있나, 일주일이 일 년 같을 텐데. 모차르트 씨가 친구가 되어 주었지.’
‘독방에 축음기를 갖고 들어갔단 말이야?’
‘이 안에 음악이 있었어. (머리를 가리키며)
이 안에도.... (심장을 가리키며)’
앤디와 비슷하게 내겐 33년 산 은행나무의 이파리처럼 많은 기억이 있다. 외롭고 답답하고 힘들 때는 그냥 일 끝나고 바로 침대에 누워 은행나무의 이파리들을 들여다본다. 그중 좋은 기억의 이파리를 따서 자세히 관찰한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삼인칭으로 하는 관찰이 아닌 일인칭으로 과거에 회기 한 선명한 느낌을 받는다. 추억 속에서 나는 치유받는다. 다음날 기분 좋게 일어나 주말 동안 푹 쉰 사람처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명언 ‘삶이 괴롭다면 그냥 잠이나 자라’처럼 고민하지 않고 숙면을 취하면 선상에서 벗어나버린 정신적 궤도를 조금은 바로잡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역시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다. 과거에 주 6일 근무가 당연하던 시절 부모님 세대는 군말 없이 일했다. 나 또한 초등학교 때 토요일날 등교했었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격주로 토요일을 쉬는 놀토가 생겼다. 분명 어느 시대의 어느 사회에서는 모두가 쉬는 날 없이 일했을 것이고 그게 당연했을 것이다. 굳이 다른 시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원양상선 위의 모든 조리장은 10년 이상 쉬지 않고 일한 사람들이다.
쉬는 날 없이 일한 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 혼자라면 절대 못 했을 것이다. 어깨를 부대끼며 조리부가 함께 한다. 또한 매일 세끼의 밥이 차려지는 것처럼 상선이 24시간 쉬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항해사들도 역시 쉬는 날이 없다. 처음에는 조리원이 배에서 제일 힘든 줄 알았지만, 배에 대해 알아갈수록 항해사가 나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해사는 8시간을 항해하고도 세 시간의 서류 작업 등의 데이워크를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공부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시험도 본다. 사관들은 부원보다 연대가 훨씬 강해 자주 어울리고 식사 시간도 오랫동안 가져야 한다. 대체 이들은 잠을 언제 자는지 모르겠다.
또래의 항해사들이 내게 쉬는 날이 없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삼으며 반강제적으로 유대감을 형성시켰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쉬는 시간에는 무얼 하냐고 물었을 때, 본인들은 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을 때 그들과의 격차를 느꼈다. 그런 멋진 동료들이 주변에 있기에 나도 함께 이끌려갈 수 있는 것 같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피곤에 쩔어서 잘 걷지도 못하는 나를 보고는 동기가 파김치 같다며 내게 파김최라는 별명을 선물한 적이 있다. 파김치의 흰색 대가리 부분처럼 머리가 허옇게 질려있고 나풀거리는 초록색 이파리 부분이 나의 힘없이 흩날리는 팔다리 같다고 했다. 그 동기가 배에 있는 나를 봤다면 녹최(녹초)라고 불렀을 거 같다. 하지만, 나는 과거에 파김최로 살아본 적이 있었기에 지금 녹최로나마 배에서의 생활을 연명해 나갈 수 있는 것 같다. 파김최 시절이 없었다면, 녹최도 없었을 것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분명 인생에 거대한 자산이 될 것이다. 언젠가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돌아가면 배에서 내가 바라봤던 시계와 알람, 바다세상을 기억하며 권태의 시간으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닻의 무게
파도를 막을 수는 없지만,
서핑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존 카밧진
무스카트호는 기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승선 중인 LNG 운반선은 20세기말에 진수된 원양상선이다. 선체, 갑판, 기계장치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내 마음도 빨갛게 녹슬어있다. 페인트를 덧대도 쇠의 내부까지 침투한 녹은 금세 빨간 꽃을 틔운다.
올해로 27살이 된 늙은 배가 바다에 갓 태어났을 때도 이미 15년 차 선원이었던 초로의 갑판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IMF, 조선업의 불황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경제가 힘들어지면 부원 지원자가 늘어난다.’
실제로 ‘베이비붐’처럼 그 시기에 배를 탄 선배들이 많다. 육지에서의 불황의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해운업계에서는 부원들의 황금세대이다. 경제적 위기에 빠진 호전적인 남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잡듯 배에서 내려준 닻줄을 붙잡고 갑판에 올라섰다. 그들은 자신의 고행과 고독을 대가로 바다의 은혜와 낭만을 받아간다. 무스카트호가 정박하기 위해 17.8톤의 닻을 내리고 파도를 이겨내야 하는 것처럼 신입 부원들은 각자가 맞닥뜨릴 선내의 파도에 도전해야 한다. 그것은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독이 발린 채찍일 수도 있고 자신이 맡은 무거운 업무가 짓누르는 것을 두 어깨로 받아내야 할 수고이기도하다.
상선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각자만의 닻을 내리고 파도를 이겨낸 자들은 대양을 향해 나아갔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파도에 떠밀려 육지로 돌아가야 했다. 선원들은 상선에서 각자만의 꿈을 꾼다. 바다와 배로부터 은혜를 입은 후 육지에서 재기하려는 사람도 있고 바다 그 자체와 육지에서 가족이 편히 지내는 게 꿈이 되어버린 사람이 있다.
나는 마이너스가 된 내 통장과 인간에 대한 혐오로 얼룩진 삶을 스스로 구원하고 나의 소중한 꿈을 지키고자 했다.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무게의 육중한 닻을 들어 올렸다. 해운회사에서 다섯이 함께 입사교육을 받았다. 상선에 내릴 각자만의 닻이 있었다. 이혼해 전처를 따라간 아이들의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어릴 적 자신을 고아원에 버린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한 무거운 닻을 지닌 자가 둘 있었다. 반면, 유튜브를 보고 선원의 월급에 흥미를 느낀 젊은이와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어서 지원했다는 철없는 아저씨는 가벼운 닻을 지녔다. 각자의 삶의 무게에 비례한 닻의 크기를 지니고 승선하였다.
별이 잠에 들고 해가 깨어나기 전, 새벽 네 시 사십사 분에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전날의 피로는 물론 그 이전의 피로도 아직 내 몸을 떠나지 못하였다. 누더기 같은 몸을 바닥에서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을 비비며 거울을 보니 전날 선배에게 들은 꾸지람과 사기에 대한 기억 그리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공포감이 내 얼굴에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다. 두 손으로 거칠게 세수를 해보아도 표정에서 우울함은 잘 씻어지지 않는다. 지난 반년 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그날도 참 힘든 하루였다. 마음이 육지에 있을 때는 실수를 하길 마련이다. 아직도 내 마음은 배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고래 힘줄처럼 억센 선배 선원들과 일하다 보면 새우등처럼 목을 구부리며 연신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게 된다. 일을 마치고 옷걸이처럼 처진 어깨를 들고 내 방에 들어온다. 창문 너머 태평양이 그림처럼 걸려있는 널찍한 창틀에 앉았다. 창밖을 우울하게 바라본다. 배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 주는 맥주를 마시며 실수로 가득했던 오늘 하루를 그리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는 지난날의 잘못된 선택을 자책한다. 맥주를 마시면 오늘 피해 가는 우울의 파도가 내일의 우울과 함께 들이닥칠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좌절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다시금 옳지 않은 선택을 한다.
‘사기를 친 사람은 내 돈으로 뭘 하고 있을까? 왜 그날 사기꾼의 전화를 받았을까? 사기를 당한 돈은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3년간 정말 알뜰살뜰 모은 돈이다. 나는 사기를 당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렇게 허리띠를 졸라매었던 것일까? 하...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바다로 낙하하는 것처럼 감성은 후회 속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이때 창밖의 붉은 수평선 위로 회색의 무언가가 펄떡인다.
‘돌고래다!’
맥주를 내팽개치고 비 오는 날의 개구리처럼 환호를 지르며 비상구로 향한다. 비상구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속은 썩어있어 바깥공기가 새어 들어온다. 비상구 손잡이를 잡기 전부터는 태평양 적도 부근의 습하고 더운 바다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탈의실을 지나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 락스 냄새를 맡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과 비슷하다.
문을 여니 수영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원대한 개방감의 천장 없는 하늘 보인다. 해질녘의 달궈진 쇳물 같은 바다가 나를 맞이한다. 지는 해가 만드는 윤슬은 마치 거꾸로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다. 희미한 기름 냄새와 바람에 실려오는 바다 내음이 내 코를 간질이며 설렘을 증폭시킨다. 돌고래가 사방의 바다에서 산발적으로 뛰어오른다. 그들의 얼굴 표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환하게 웃고 있다. 돌고래는 자신의 몸처럼 유선형으로 뛰어올라 다시 바다로 부드럽게 들어간다. 장난기 많은 돌고래는 있는 힘껏 일자로 튀어올라 여러 차례 꼬리를 흔들고 물에 몸통을 부딪치며 파란 물보라를 일으킨다. 꼬리를 흔들어준 답례로 손바닥을 흔들어 돌고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여섯 마리가 양쪽에서 교차하며 한 번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두 마리가 동시에 같은 자세로 뛰어오른다. 올림픽에 출전한 잘 훈련된 싱크로나이즈드 선수들 같다. 돌고래들이 숨을 참고 뛰어올라 그 짧은 순간 내게 ‘힘내 할 수 있어!’라고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흔하다는 돌고래를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바람이 귀를 스쳐 지나가며 내가 힘들 때 보여주기 위해 바다가 기다렸다고 속삭이는듯하다. 스쳐 지나간 바람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태양이 바다와 가까워져가고 있었다. 금색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틈새빛살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발산하고 있다. 배가 향하는 그곳에는 분명 희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방에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눈은 구름처럼 입은 돌고래처럼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닻은 노아의 방주도 묶어놓을 수 있을 만큼 무거워졌다. 나의 닻은 바다의 가장 어둡고 춥고 깊은 밑바닥에서 단 한 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바다는 내가 하는 일의 배 이상 은혜를 베풀어 준다. 그 은혜로 빚을 다 갚았다. 뿐만 아니라 내가 언젠간 하선하면 다시 꿈을 향해 달려 나갈 용기를 충전하고 있다. 바다에서 내 삶과 통장은 플러스가 되었다. 배를 타다 보면 파도와 비바람, 천둥과 번개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굴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그림 같은 하늘과 푸른 바다, 돌고래와 무지개 그리고 꿈을 마주할 수 있다. 내 30대 초반에는 빚을 졌지만 30대 중반에는 기필코 빛을 볼 것이다.
함께 입사교육을 받은 다섯 중 닻이 가벼웠던 사람 한 명이 한 달 만에, 또 다른 한 명은 지난달 육지로 돌아갔다. 원양상선은 LNG와 35명의 꿈을 싣고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