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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단데기

블랙아웃

단데기     

살이 터져 허물 벗어 한 번 두 번 다시

나는 상처 많은 번데기

-YB [나는 나비]中     


 배라는 철갑 안에서 내가 하는 가장 생산적인 활동은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해지는 것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칠 때나 일과 일 사이의 쉬는 시간이면 내 방에 들어와 허물 벗듯 옷을 벗어젖히고 그대로 바닥에 둔다. 커튼을 친 후에 바로 침대 위의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이불은 따듯한 방패막이되어 지친 내 몸을 데워주고 마음에 위안을 준다. 조금이라도 방심을 하면 끝없이 닥쳐오는 파도처럼 우울한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불과 5분 전에 마친 21명 분의 설거지. 두 시간 후 해야 할 35명이 이틀 동안 버린 쓰레기를 정리해야 할 것과 또다시 21명분의 설거지. 배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의 위치. 내가 하고 싶은 것 중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무력감. 우울함의 파도를 멈추지 못했고 결국 쓰나미가 되었다. 나는 부정의 쓰나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쓰나미에 잠식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내 삶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고 있다. 할 수없이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단단해져야 한다는 것과 단단해지지 않으면 이곳에서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린다. 배의 철갑껍데기 안에서 희망의 실을 놓치지 않고 있는 나는 사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누에처럼 물러 쉽게 문드러진다. 껍데기 속에서 곤죽이 되어 흘러나오지 않게 단단해지는 것, 그게 내가 배에서 할 수 있는 그리고 해내야 되는 유일한 것이었다. 

 세상에서 단단해지기를 가장 잘하는 그 무언가를 떠올려본다. 포켓몬스터의 단데기(번데기)가 문득 떠오른다. 단데기는 캐터피(애벌레)에서 진화하여 번데기 과정에 있는 포켓몬인데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오직 하나, 단단해지기뿐이다. 다른 포켓몬들과는 다르게 말이나 울음소리도 없어 대화창에는 오직... 많이 찍혀있을 뿐이다. 할 수 있는 게 단단해지기 밖에 없는 단데기는 얼마나 단단할까. 닌텐도를 손에서 놓지 않던 어린 시절에는 단데기가 진화해 봤자 동충하초가 될 것처럼 하찮게 느껴졌지만, 지금의 나는 말없이 그저 단단해지기만 하는 단데기가 존경스럽고 내가 뒤를 밟아 나가야 할 선배처럼 느껴진다. 단데기는 두꺼운 껍질에 갇혀 얼마나 괴로워했고 또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을까? 단데기의 숙명은 고치 속에서 끊임없이 단단해져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마른 비명을 외치는 누에를 불쌍히 여겨 고치에 구멍을 뚫어주었다고 한다. 누에는 구멍을 통해 손쉽게 빠져나와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쉽게 나온 나비는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이내 땅바닥에 추락하였다. 누에는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힘겨워하며 낑낑대는 과정에서 피가 날개로 공급되어 날개가 팽팽해진다고 한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 누에는 자기 힘으로 고치를 극복해야 한다. 

 포켓몬스터에서 단데기는 인고의 단단해지기를 마치면 결국 하늘을 날 수 있는 버터플(나비)이 된다. 하늘을 날기 전 번데기 속에서 인고의 과정을 거치는 서사가 있기에 나비의 날갯짓은 더욱 찬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비를 주제로 하는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을 듣다 보면 단데기 상태의 나도 계속 단단해지다 보면 언젠가는 나비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언젠가는 비상할 내일을 꿈꾸며 단데기 속에서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것들을 참으며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국가대표 OST [Butterfly]中     


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나를 허락해 준 세상이란

손쉽게 다가오는 편하고도 감미로운 공간이 아냐

그래도 날아오를 거야 작은 날갯짓에 꿈을 담아

조금만 기다려봐

-디지몬 어드벤처(전영호) [Butter-fly]中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 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YB [나는 나비]中          


블랙아웃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당신의 생각은 옳다.

-헨리 포드


무스카트호는 LNG(액화천연가스)와 35명의 꿈을 싣고 시속 38km로 나아간다. 올해로 27살, 사람 나이로 치면 칠순이 넘은 이 배의 엔진 소리는 늙고 힘없는 사자의 그르렁거림과 닮아있다.

점심 일을 마치고 저녁밥을 만들기 전,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쉬는 시간이다.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조리부는 이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 부르지 않고 회복 시간이라 부른다. 병원 수술 회복실에서나 쓸법한 단어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로 직행한다. 밖의 날씨가 덥던 춥던 실내는 공조기를 통해 항상 25도로 유지된다. 승선할 때 가지고 온 가습기가 쾌적한 환경을 만든다. 커튼으로 외부의 빛을 완전히 차단한 후 이불을 덮는다. 배가 좌우로 출렁이는 게 침대를 통해 온몸으로 느껴진다. 수면보다 낮게, 배의 바닥에 위치한 38,900마력의 거대한 엔진에서 울리는 기분 좋은 진동까지 겹쳐 마치 요람에 누워있는 듯하다. 조용하고 듣기 좋은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백색잡음)처럼 느껴지는 기계음들 속에서 베개에 머리를 닿고 10초가 지나면 나는 완전히 Black out이 되어 수면 상태에 빠져든다.

낮잠을 자다 보면 3시간에 한 번은 기계 결함 알람이 뜨는 데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라 잠에서 잘 깨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알람은 평소보다 더 요란했다. 장단음을 섞은 여러 가지 패턴의 알람이 있는데 다행히 단음 7회, 장음 1회의 퇴선 신호는 아니었다.

잠에서 깨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허물을 주워 입고 주방에 나갔다. 정전이다. 이내 엔진이 Black out 되고 세상은 고요해졌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24시간을 제외하고는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배의 엔진이 멈추니 바람이 아예 불지 않거나 조류가 없는 평면의 바다가 존재하는 이세계(異世界)에 온 듯하다. 기관부 2명이 계단을 다급하게 뛰어 내려온다. 앞선 1 기사는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러 가는 군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뒤에 있는 기관수는 환자를 끌고 응급실에 뛰어 들어가는 간호사의 얼굴이다.

처음 겪는 상황에 망상력이 풍부한 나는 남은 식량으로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빠르게 계산하였다. 반면, 조리장은 평온한 얼굴로 도마 위에 올려진 돼지고기를 썰며 고요를 칼끝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다. 해적이 쳐들어와도 ‘밥은 먹었니?’하고 물어보며 계속 요리할 것만 같은 여유로움이다.

다행히 정전은 10분 만에 복구되었고 엔진은 2시간 후에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후문을 들어보니 평형수 탱크 밸브가 노후화되어 해수가 새는데 밸러스트 펌프를 이용하여 물을 넣는 작업을 매일 한다고 한다. 그 작업에 보통 디젤 터빈 발전기를 작동시키는데 작동을 하지 않고 펌프를 가동하는 테스트를 하다 과부하가 걸려 퓨즈가 나가고 엔진이 꺼졌다고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이틀 동안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더워서 숨이 막히는데 50도의 여름 인도양을 겪는 갑판부와 40도에 육박하는 엔진룸에서 일을 하는 기관부는 별로 불평이 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대단해져서 그들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른다.

블랙아웃으로 늦어진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무스카트호는 조금 더 힘을 내어 목적지를 향해 시속 40km로 나아간다. 마라톤 마의 구간인 38km를 넘은 마라토너의 거친 숨소리와 비슷한 엔진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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