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의 바비큐
상사의 옆방에 산다는 것
내가 열심히 했다고? 아니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해서인 거로 생각하겠다.
너무 아프니까
-장그래 [미생]
처음 배를 타기로 결심했을 때 원양어선을 알아보았다. 원양어선의 경우 배가 상선만큼 크지 않아 부원 막내의 경우에는 한 방에서 이층침대로 여럿이 나눠 쓴다고 들었다. 그때는 원양어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기 위해서라면 사생활도 포기할 결심을 했었다. 하지만, 부원은 원양어선에 쉽게 취직할 수 없었고 후에 알아본 원양상선은 다행히도 1인 1실이었다. 나는 상선 속 고독의 요새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 공간은 암흑과도 같은 편안함을 내게 주었지만, 모든 소음과 불안에서는 나를 해방시켜주지는 못했다.
내 방의 오른쪽은 조리장이 살고 왼쪽에는 조리수가 산다. 조리수와는 철판 하나를 두고 침대가 마주하고 있어 서로가 뒤척이다 벽을 칠 때면 상대방이 진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방을 나올 때면 자동으로 고개가 좌우로 돌아가며 조리장과 조리수의 방 앞에 놓인 신발을 확인한다. 슬리퍼와 운동화, 조리화 종류에 따라 그들이 지금 방에 있는지 더 나아가 어디 있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그들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도 나의 위치와 행동반경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에 운동을 하면 다음날 아침에 어제 운동했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을 수 있다. 싱가포르에 있었을 때는 선원들만 배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 작업자들이 와서 복도에서 작업도 하고 절도가 빈번하다는 이슈로 방 안에 신발을 들여놨다. 하지만 조리장은 내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며 신발을 밖에 내놓으라고 말했다.
방에 있을 때는 잘 건들지 않았지만, 불편하긴 했다. 주방에서 방까지 찾아오는 것도 귀찮아 방으로 전활 걸어 나오라고도 한 적도 있다. 조리장들은 왜 항상 문을 열고 생활하는지 모르겠다. 밖에서 누군가 나를 괴롭힐 수 있다는 걱정보다는 문을 여는 개방감이 더 크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내가 문을 열고 밖에 나오면 그 소리를 듣고 ‘지수야 일로 와보래이’ 하며 부른다. 잊은 업무를 시키거나 다음 날 업무를 지시하고 감사하게도 맛있는 간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항통사는 서류업무로 자주 방에 찾아온다. 1-3시 사이에 자거나 쉬고 있는 것을 알 텐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문을 두드린다. 잠에서 채 깨지 못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지 못하면 문을 세게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인다. 눈도 비비지 못한 채 침대에서 나가고 있는 도중에도 계속 두드린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다. 전화를 걸어 브릿지로 부르지 않은 게 어디냐며 거울을 보며 짜증 나지 않은 얼굴로 표정을 바꾼 후에 문을 연다.
두 항차를 함께했던 거구의 조리수가 있었다. 핫플레이트 위 후드에 머리가 닿을 듯 키가 컸으며 문 앞에서 마주치면 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우람했다. 6년간 유도를 해서 몸도 다부졌다. 배에서 만난 사람 중 어깨가 제일 넓었다. 서양권 만화에서 바이킹이나 슈퍼히어로를 표현할 때 하체는 작고 상체는 넓은 역삼각형으로 그리는데 그와 비슷한 체형이었다. 그는 일찍이 겪어본 조리수들과는 다르게 조리수와 조리원과의 중간에 놓인 회색지대의 일을 솔선수범 해줬다. 쿵푸판다와 비슷하게 잘 웃고 순한 성격이었고 얼굴에는 성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10년 전 갑판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입사 시에 보고했지만, 회사는 그를 받아들였다. 연차가 쌓이고 갑판수로 진급을 해야 했지만, 조타수 업무를 하려면 눈이 좋아야 했다. 성실함 덕분에 충분히 갑판수로 진급하는 케이스임에도 시력 이슈로 갑판수로 진급하지 못했다. 그의 성실함을 알고 있는 회사와 조리부에서 그에게 인사 이동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그는 조리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조리부에 와서도 다시 조리원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함께 승선한 조리장과는 갓 조리원이 되었을 때 승하선을 하며 처음 스쳤다고 한다. 조리장에게 강렬한 인상이 있었는데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그는 바나나를 자르다 손을 베어 피가 났다고 했다. 그 후 7년이 흐른 지금 두 번째로 다시 만났다고 한다. 회사에 조리부원이 탈 수 있는 LNG선은 4척뿐이지만(다른 용도의 배를 포함한 선단은 수십 척에 달한다.), 타이밍과 인연에 따라 수년간 같이 배를 탈 수도 있고 십 년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선원들의 요청에 사이가 나쁜 선원들은 같은 배에 태우지 않고 사이가 좋은 선원들은 같은 배에 태우기도 한다고 들었다. 갑판부에서는 두 명의 입사 동기가 갑판장이 되고도 많은 세월이 지나 20년 후에 처음 봤다고도 이야기한 경우도 있었다.
쿵푸판다 조리수는 회사기준의 연차로 봤을 때 조리장 진급 케이스임에도 불과하고 다른 조리수들과 비교적 젊은 나이, 짧은 요리 경력을 이야기하며 자진해서 조리수로 남아 있다. 성실함에 겸손함까지 갖춘 그는 최고의 인재다. 배에서 그렇게 일을 하고도 하선하면 아버지께서 운영하는 고깃집에서 일손을 거둔다고 했다. 일은 못하지만 대답만큼은 크게 하고 또 자신보다 어린 조리원이었기에 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었던 것 같다. 나도 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고 배울 점이 많은 조리수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우선 그는 나아지지 않는 내 업무 실력에 불만이 있었다. 나는 설거지를 혼자 천천히 하고 싶었지만, 같이 빠르게 정리를 마무리하고 들어가고 싶어 했다. 함께 일을 끝낸 후에 조리수는 자신의 방이 아닌 그 오른쪽에 있는 내 방에 왔다. 내 방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들고나가며 방이 더러우니 청소 좀 잘하라고 했다. 그의 행동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덜 먹고 싶은 과자와 음료를 상납품으로 미리 정하고 출근을 했다. 그의 내 방 침공은 멈추지 않았고, 그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한숨이나 표정 그리고 언어로써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한 번은 그가 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잽싸게 들어가 문을 잠그려 했지만, 문이 채 닫히기 전 그가 문고리를 잡았다. 내 방문을 힘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문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거구의 조리수와 맞서기에는 힘이 부족해 발로 벽을 밀면서 버텼다. 공성전처럼 치열해진 힘겨루기를 하며 짧지만 깊은 생각을 했다. 내가 왜 내 방 문을 놓고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선내에서는 나보다 힘이 세고 계급이 높으면 내 방문을 힘으로 열어도 되는 건가 궁금했다. 동시에 그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확실히 말 못 하는 내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배에서 직급별로 계급이 분명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간 계급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몸뚱이 하나 비집고 들어오는 건 쉬웠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고 그는 조용히 왼쪽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샤워를 했다. 안타깝게도 샤워만으로는 분을 삭이지 못했고 방금 있었던 기분 나빴던 기억도 씻어내지 못했다. 술만이 내가 방금 겪은 감정을 흐리게 해 줄 수 있을 거 같았지만, 아직 저녁 일이 남아 있었다. 샤워 도중에 냉장고에서 차게 식혀진 330ml짜리 콜라를 꺼내 원샷을 했다. 과도한 청량감에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콜라를 마시고 끝에 쓴 맛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상사와 함께 사는 경험은 아무런 장점이 없었고 나의 개인주의적 성향만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선상의 바비큐
기분이 저기압일 때는 고기 앞으로 가라
-작자미상
액화천연가스를 운반하는 선박에서 불을 항상 경계의 대상이다. 담배도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워야 하고 가스레인지가 아닌 핫플레이트로 요리를 한다. 당연히 숯불바비큐는 절대 불가하다. 다만, 1~2년에 한 번 예외가 있다. 한국에서 액화천연가스를 내리고 도크로 배를 수리하러 이동할 때는 탱크 안에 떠 있는 가스를 전부 뺀다. 그리고 도크를 마치고 가스를 실으러 갈 때 바비큐가 허락된다. LNG선에는 4개의 높은 굴뚝이 있는데 그곳에서 흰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뿐만 아니라 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필히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가스를 내뿜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는 성을 생각했을 거 같다. 문득 가스 운반선에서 가스를 빼면 어떻게 엔진을 운행하는지 궁금했다. 기관부 선배에게 물어보니 가스와 기름 두 가지 전부 운용 가능하다고 했다. 가스와 기름의 가격과 연비를 따져 더 가성비 있는 연료를 사용하여 항해한다고 한다. 싱가포르 도크 입항 날짜가 잡혔지만 한국에서 입항하여 싱가포르까지 가는 동안 이틀의 여유가 있었다. 앵커를 박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목적 없는 의무적인 항행을 해야 했는데 이등항해사가 동해로 항로를 설정했다. 동해를 항해하는 중 독도를 볼 수 있었다.
며칠 후 탱크에서 가스를 전부 뺐고 애초에 금요일로 예정된 바비큐 날짜를 비 예보로 인해 하루 앞당겼다. 바비큐 장소는 선교 뒤쪽에 위치한 갑판이다. 360도 어느 곳을 돌아봐도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 40M에서 바비큐를 한다. 빌딩 루프탑에 있는 기분이 들고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인다.
숯불 위에 올라갈 바비큐 재료는 삼겹살, LA갈비, 소시지, 닭꼬치를 준비했다. 그날은 남지나해 상공의 뜨거운 태양이 우릴 내려다보고 있다. 뜨거워진 쇠판에 그대로 고기를 구워도 될 정도였다. 주변을 여유 있게 돌아볼 새도 없이 숯불 앞으로 향한다. 태양을 정면으로 맞이하며 숯불 옆에서 바비큐를 하면 내가 굽고 있는지 구워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럴 때는 대야 속 얼음과 물 위에 떠다니는 맥주를 꺼낸다. 목장갑을 끼고 있어 맥주의 냉기가 피부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캔 뚜껑을 딸 때 들리는 경쾌한 소리에서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신 후에 찡그린 눈을 뜨니 눈앞에는 갑판부 선배가 건네준 뼈를 제거한 LA갈비의 야들야들한 살코기가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맥주를 꺼내 뚜껑을 따서 선배에게 건네준다. 캔을 마주하고 부딪히는데 이제야 나도 그들의 동료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내 표정도 얼마 전부터 좀 더 의연해지고 뱃사람다워진 거 같다.
뱃사람들은 웬만한 건 OK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기가 좀 타도 그냥 서로 자처해서 먹어버린다. 평범한 사람이 탄 부분을 잘라먹을 정도면 그냥 입에 넣고, 버릴 정도면 선원은 탄 부분만 잘라서 먹는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모든 생활 전반이 다 이렇다. 참을성의 달인들이다.
고기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이 숯과 만나서 발생하는 연기가 하늘에 닿기 시작할 때 즈음 불판에 있던 시선을 넓혀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려있고 배 주변에 성층권까지 길게 뻗어있는 적란운이 몇 개 보인다. 적란운 밑에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타는 듯한 더위에 배 위에도 소나기가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머리 위에는 아쉽게도 구름 한 점 없이 성층권까지 뻥 뚫려있었다.
어느 정도 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고기 굽기를 그만두고 평상에 앉아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는 스쳐가는 바람과 낭만으로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이제 막 고기를 삼키고 술을 좀 마셔보려 할 때 즈음 빗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진다. 숯불고기가 수육이 되어가고 있다. 주변에 구름은 있었지만 머리 위 하늘은 여전히 뚫려있고 태양이 내려쬐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비를 맞자 머리카락 사이의 두피, 눈썹 콧대, 어깨 그리고 기분이 시원해진다. 쇠로 만들어진 갑판도 숯불마저도 열기를 식혀주는 비를 반기는 듯하다. 선원들의 노랫소리는 커지고 목청은 올라갔다. 내가 선장이었다면 뱃고동을 울리고 싶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선상의 바비큐 파티는 비 따위에 끝나지 않았고 선원들은 보름달이 뜬 날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것처럼 이성을 잃고 즐기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함성에 편승해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고기를 굽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비가 흥건한 접시에서 고기를 집어 먹었는데 식고 물에 젖은 고기가 너무 맛있었다. 맥주를 따라진 종이컵은 누가 따라주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수위가 높아졌고 빗물과 섞인 맥주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속을 시원하게 해 줬다. 이내 소나기가 멈추고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린 듯 바비큐가 끝이 났다. 비에 젖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 함께 미소를 짓고 다 같이 뒷마무리를 하였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깃털을 닮은 구름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