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지나간 메뉴와 시간은 아쉬워하지 말자.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을 달리는 소녀中
조리장들은 각자만의 필살기가 있다. 필살 음식은 맛있기 때문에 그만큼 양을 많이 잡고 간다. 위대할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도 어김없이 남겨져 버려지고는 했다. 나는 그 맛있는 음식들이 쓰레기가 되어 떠나가는 게 슬펐다. 나는 그들이 물고기 밥이 되기 전 통에 담아 나중에 먹고는 했다. 하지만, 자동차가 감가상각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음식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맛없어지게 마련이다. 오래된 딸기초콜릿케이크보다 오븐에서 갓 나온 식빵이 더 맛있는 것처럼.
기관원인 탁구 형님은 밥을 아주 오랫동안 먹었다. 탁구씨 혹은 탁구 형님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유는 배에 승선한 날(가장 바쁘게 행동해야 할 날) 체육관에서 탁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탁구형님은 나이가 쉰을 바라보고 있지만 이제 갓 계약직이 끝나가는 사람이었다. 밖에서 다양한 일을 했었고 한 때는 시의원에 도전할 만큼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 기관부의 시선을 조금 달랐을 수도 있었지만, 같은 막내라인이고 나를 존중해 주며 항상 친절하게 말은 건네 내적 친밀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새로 승선한 대부분의 사람은 밥을 많이 먹는다. 배에 승선하는 자체가 꿈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삶의 파도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승선한다. 현대 사회에 돈이 없어서 밥을 굶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나처럼 먹고 싶은 게 많은데 재정적 부담으로 맘껏 사 먹지 못하다가 배에서는 매 끼니 10찬 이상 나오는 진수성찬을 만나 돈 걱정 안 하고 양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탁구 형님도 나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으나 식탐이 있어 밥을 많이 펐다. 안타깝게도 배에 넣을 수 있는 용량이 그의 식탐을 못 따라가는지 자주 음식을 남겼다. 그는 남은 음식을 그냥 버리지 않았다. 개인 보관함에 남은 음식을 넣고 다음 끼니와 함께 먹었다.
조리장의 필살 짜장면이 점심으로 준비된 날이었다. 조리장은 칼질부터 예사롭지 않다. 짜장면에 들어갈 양파, 돼지고기, 양배추 등의 재료를 잘게 썬다. 나는 손목 힘을 사용해서 칼을 재료에 파고들게 한다. 반면 조리장의 칼은 재료 위를 스쳐 지나갈 뿐인데 재료들이 손쉽게 잘린다. 유니크한 칼질이었다. 본인 스스로 칼질만큼은 전 선대에서 최고라고 자부한다. 재료를 손질하는 그의 눈은 순하고 예쁜데 날카롭다. 처음 보는 유형의 눈을 가지고 자신만의 요리 철학을 만들어 나간다.
그는 웍에 충분한 양의 기름을 부었다. 내게 토치를 양손에 들고 냄비를 지져달라고 했다. 토치로 달궈져 기름 표면에 불로 막이 생길 때 즈음 채소와 고기를 넣고 볶는다. 웍에서 불길이 치솟아 후드에 닿을 듯하다. 불 속에서 채소와 고기를 볶은 후 설탕을 넣는다. 설탕 위를 바로 푸른 불의 토치로 지지면 흰 연기가 냄비 속에서 피어오른다. 그는 캐러멜 향기가 퍼지는 이 과정에서 감칠맛이 폭발한다고 했다.
주방이 있는 B데크는 물론 한층 위의 C데크 까지도 불향이 퍼져나갔다. 불향 가득한 짜장면이 서빙되었다. 탁구 형님은 면을 곱빼기로 받고도 짜장 소스를 더 퍼갔다. 식사를 다 하고 짜장면을 남겼는데도 남은 짜장소스를 또 추가해 통에 담았다. 저녁에 본 그의 짜장면은 팅팅 불어 괴물처럼 변해있었다. 그걸 탁구 형님은 꾸역꾸역 다 먹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다 먹는 모습이 조리부로서 감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저녁에 나온 맛은 조금 떨어질지도 모르나 따듯하고 신선한 생선구이에 집중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푸드파이터나 먹방유투버처럼 재능이 뛰어나 매 끼니를 소처럼 먹으면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의 배는 한계가 극명하기에 지나간 음식에 미련을 갖지 말고 현재 메뉴에 집중하면서 나중을 기약하면 된다. 한 번은 탁구 형님과의 대화에서 예전에 치른 선거에서 시의원이 되었더라면 여기 안 왔을 텐데 후회를 한다고 말했을 때, 그에게 내 모습이 거울처럼 비쳐 보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는 미련한 모습이었다.
짜장면과 탁구 형님을 통해 느낀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후미의 갑판에 섰다. 힘든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배에 올랐지만 그전에도 한 번쯤은 배에 타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선상 생활은 쉽지 않았고 지금껏 그 자리에 서서 지나가버린 실수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스스로를 책망했었는지 모르겠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바꿀 수 없다. 배가 나아가기 위해 스크류가 만들어낸 물꼬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시각화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꼬리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눈으로 물고리의 끝을 찾으려 해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 대해 집착할수록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길어지는 것 같다. 실수를 교훈 삼아 오늘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잘 사용하자. 과거를 빠르게 떨쳐버릴수록 미래를 꿈꿀 시간이 많아지고 내가 꿈꾸는 미래가 언젠가는 오늘이 될 것이다. 음식과 배를 통해 많은 걸 경험하고 배운다. 시간이 지나 불어버린 짜장면을 먹기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의 생선구이를 바라봐야지. 동시에 내일 점심에 나올 영광스러운 치킨 윙을 기대할 것이다. 지나가버린 시간과 음식은 아쉬워하지 말아야겠다.
롤링
파도는 피트나 인치로 측정되지 않는다.
두려움의 크기로 측정된다.
-버지 트렌트
선배들로부터 7,8 월 인도양의 롤링은 거세다고 익히 들어왔다. 나는 계약기간을 다 채운 상황이라 7월 중순에 하선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을 줄 알았다. 6월 말에 아라비안해를 지나고 있었다. 2등 항해사가 단톡방에 명일부터 파고가 최대 6M까지 칠 예정이니 업무에 참조하라고 했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파고를 겪어보지 못했기에 뭘 해야 될지 몰라서 조리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계란판을 거의 모든 식기밑에 깔아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다만 내 방은 간과하지 못했다.
밤새 배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결에 들은 소리로 저 멀리 주방에서 쇠로 된 식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꽤 긴 거리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 방에서는 책상 위에 있던 화장품이나 맥주캔들이 땅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은 꽤나 둔탁한 소리도 들렸다. 내 몸도 배와 함께 찰랑였다. 그날 내가 느낀 롤링은 배 없이 파도 위에 바로 침대가 놓여있고 그 위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에서 밤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출근하기 전 새벽에 눈을 뜨고 불을 켜보니 내 방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책상과 선반에 있던 모든 집기는 아래쪽에 놓여있었고 컴퓨터 모니터는 엎어져서 의자 모서리에 부딪혀 액정이 박살 나있었다. 어제 마시다 남긴 뚜껑이 열려있던 페트병에 담긴 커피에 방바닥은 검게 변해있었고 원두를 그라인딩 하고 있는 카페처럼 커피 향이 가득했다.
방을 정리할 시간은 물론 정신을 정리할 시간도 부족했고 수습할 새도 없이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더한 난장판을 생각하며 출근하니 주방은 의외로 멀쩡했다. 내가 단잠에 빠져있을 동안 조리부 선배들이 새벽 2, 3시에 나와 다 수습을 했다고 한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는 계급에 관계없이 일을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나를 깨운 후에 함께 청소를 했어도 할 말이 없었는데 막내인 나는 단잠에 빠져있었다니 민망하고 죄송스러웠다.
계란판을 더해 접지력을 추가했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그날 오후에는 잔반통이 엎어져 바닥에 난리가 나기도 했다. 잔반통이 바닥에 쓰러진 것을 봤을 때의 그 처참함은 온몸에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대청소를 하고 노끈으로 잔반통을 선반에 묶었다.
엘리베이터는 완전 멈추어질 때도 있었고 D데크까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고 D데크까지만 사용할 수 있게 한 이유는 위로 올라갈수록 롤링이 더 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D데크까지만 운용되는데도 엘리베이터가 엘리베이터 통로의 철프레임과 마찰을 일으키는 끔찍한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평소에는 도시락을 엘리베이터에 두고 선교 층을 누른 후에 올려 보내고 전화를 해서 전달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교까지 엘리베이터가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도시락통을 직접 들고 배달 가야 했다. 거센 파도가 치는 가운데 계단을 타고 위로 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몸이 자꾸만 무겁게 느껴졌다. 중력이 지구의 두 배쯤 되는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었다. 물론 항해사가 밥을 다 먹을 때에 맞춰 도시락통을 회수하러 가야 했다. 몇 번 밥을 올리고 나니 파도가 칠 때 계단을 오르는 요령을 습득하게 되었다.
계단의 경사는 보통 35도라고 한다. 롤링이 10도 정도 됐으니 리듬을 잘 타고 올라가면 25도의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었고 리듬을 잘 맞추지 못하면 내가 올라야 하는 계단의 각도는 45도가 되었다. 나는 리듬게임을 하듯 배가 좌우로 흔들릴 때의 타이밍을 잘 맞춰 25도의 계단을 올라갔다. 도시락을 넣은 철가방 속 국물이 엎어지지 않게 손으로는 균형을 잘 맞춰야 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브릿지에 도착하면 아래에서보다 확실히 롤링의 정도가 심하게 느껴졌다. 눈앞의 유리창은 고정되어 있는데 파도의 너울에 의해 왼쪽 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오른쪽 바다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보인다.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처럼 바다가 수직으로 서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많은 선배들이 내게 멀미하는지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내 입으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두 귀가 집중되었다. 초짜인 내가 멀미를 한다고 하면 바로 웃을 준비가 된 모두가 기대하는 시선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다. 멀미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모두가 실망한 느낌이었다. 한 번은 서비스로 선배들에게 속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니 주위에 있던 모두 나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마치 다리 짧은 강아지가 점프하여 힘겹게 소파 위로 올라선 것을 본 것처럼.
그렇게 아라비안해에서 삼 일간 롤링에 녹초가 되었다. 그동안 많은 기계장치가 고장 났고 기관부에서는 고생을 많이 했다. 그들의 고초 덕분에 무사히 오만 수르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세계지리에 꽤나 관심 있는 나도 오만이 어느 대륙에 붙어있는지 몰랐다. 평생 가볼 일 없을 것 같은 국가의 LNG 터미널에 간 경험은 특별했다.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오만을 눈으로 구경했다. 파이프 위로 끊임없이 가스가 타오르고 있었다. 조리장은 가스 많다고 자랑하는 거라고 내게 얘기했다. 기관수가 탱크 압력 조절을 위해 가스 배출을 하는데 배출 중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불이 나오게 하는 거라고 했다.
스물한 살에 유럽 배낭여행을 하며 메가시티들의 야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스물두 살에 입대하고 훈련소에서 파주 어느 논밭에 홀로 서있는 아파트 불빛을 보는데 그 불빛이 유럽 어느 도시의 야경보다 아름다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내게는 수많은 도시에 거주하며 과거에 마주한 어느 곳보다 오만 수르의 불빛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가스 시설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적색 산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스위스에서 80km를 하이킹하며 봤던 어느 산보다 내 눈에는 더 생명력이 가득해 보였고 그곳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스를 싣고 다시 아라비안해로 나왔다. 파고는 올 때와 동일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적재된 LNG 무게 덕분에 큰 불편 없이 아라비안해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호기심에 선배들에게 더 높은 파고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 한국을 들어간 후에 다시 인도양에 들어서게 되면 10M 전후의 파고가 있을 것이라 이야기해 주었다. 또, 알래스카의 베링해를 넘을 때 집채만 한 파도를 견뎌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힘겹게 헤쳐 나온 파도는 맛보기에 불과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