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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수 Oct 27. 2024

통신장애

칼을 간다는 것.


통신장애     

세상에는 더 많은 환상이 필요하다.

문명은 너무 기계적이다.

우리는 환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으며

환상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현실이 된다.

-살바도르 달리     


 저녁 일을 정리하며 쓰레기를 들고 소각장으로 향했다. 생활동에서 데크로 나갔을 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다만 몇 개의 별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소각장에서 오늘 하루 동안 버려진 쓰레기와 제때 내뱉지 못한 욕을 몇 마디 태웠다. 데크에 나와 문을 열고 생활동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내 시선이 닿아있는 모든 곳에 별이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쳐 올리지 않고 그저 15도 각도로 시선만 살짝 들어보아도 눈부실 정도의 선명한 별들이 하늘에 박혀있다. 지구에서 보는 것이 아닌, 대기권을 지나 우주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침에 봤던 무수한 윤슬이 하늘로 올라가 빛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샤워도 하지 않은 채 방 앞의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우주를 유영하고 싶은 기분으로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데 불과 10분 전과 다르게 별이 몇 개밖에 보이 지 않는다. 저녁을 먹으며 반주를 한 터라 살짝 몽롱한 상태였다. 분명 봤는데 절대 내 정신이 헤까닥 한 게 아니라며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 배 위로 우주가 펼쳐졌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여 동공이 작아지며 작은 빛도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순간 파도가 배를 쳐올려 잠시 하늘로 들뜬 기분이 들었고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 전함에 탑승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군 시절 경계 근무 시 사용하던 야간투시경 04K가 생각났다. 약 40배의 광학적 증폭을 제공하여 밤에도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빛들도 04K를 통해 선명하게 볼 수 있다. 04K를 통해 밤의 하늘을 보면 눈으로 보이지 않던 수많은 별들이 망막에 꽂힌다. 그 경험을 통해 밤하늘에는 보이지 않은 별들이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대 후에는 도시의 하늘을 볼 때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별들을 마음으로 보고는 했다. 마음속으로 그렸던 별보다 더 많은 별을 육안으로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Shoot for the Stars.” 별(꿈)을 향해 쏴라.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이 눈앞에 있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계속 하늘만 바라보며 꿈만 꿀 수는 없다. 현실의 문제들이 생각났고 오랫동안 별을 보기 위해 쳐들었던 목이 아파왔다. 고개를 내려 정면을 직시했다. 바다가 보인다. 낮에 봤던 밝게 빛나는 영롱한 푸른색이 아니다. 햇살을 반사해 빛나는 윤슬도 없다. 아무 빛을 받지 못해 그저 어둡다. 지금의 바다는 어떠한 빛이 와도 모두 흡수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 또한 우주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이곳에는 별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생각이 자꾸 바다에 빠지려 한다.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가고 싶은 느낌이 든다는 20년 차 선배 선원의 말이 생각난다. 사이렌이 바닷속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지금 당장 하늘로 날아오를 수는 없지만, 저 바다에 누워 끝없이 추락하는 것은 가능하다. 현실은 별을 따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기를 당해 9만 3천 톤의 배도 묶어둘 수 있는 육중한 닻에 온몸이 묶여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그 순간 바다 위 그리고 눈앞의 하늘에 노란색 선이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대각선 방향으로 짧게 그어진다. 별똥별이다. 별똥별 꼬리는 이내 사라졌지만 빛을 여전히 담고 있는 내 숨을 멈추고 그 숨을 뱉기 전에 소원을 빌었다. 소원의 내용은 평소 하느님에게 하는 기도와 일치한다. 다만 하느님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과거에는 존재했을 수 있으나 더는 존재하지 않다고 믿고 있다. 단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쉬지 않고 이어나가는 기도이다.

‘내 꿈을 향한 불같은 집념이 24시간 돌아가는 배의 엔진처럼 꺼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사기꾼들을 처단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세요.’

 나는 신이자 동시에 악마인 아브락사스가 되어 사기꾼들을 심판하고 싶다. 사기꾼들이 내게 달아놓은 닻을 풀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기꾼들을 연행해서 원양상선에 실을 것이다. 그대로 우주로, 태양으로 목적지를 설정한 후 항해하게 할 것이다. 38KM의 속력으로 태양으로 향하는 억겁의 시간 동안 그들이 신에게 사죄해도 응답이 전혀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배가 태양에 도달해 만물을 촛농처럼 녹아버리기 직전 사기꾼들이 모든 것, 그들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돈 마저 포기하는 비로소 속죄하기 시작한 그 순간 다시 배의 항로를 바꿔 대한민국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의가, 정치권의 쇄신에 입각한 법의 단호한 심판이, 굳이 배에 태워 태양에 보내지 않더라도 사기꾼들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또 지금도 서서히 그렇게 변해가려는 조짐이 보인다. 피해자는 영향력이 없고 정치인은 호소력이 약하다. 피해자가 정치인이 되어 그 과정을 주도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 별을 보며 느낀 감정과 생각은 냉동실에 넣은 후 나중에 필요할 때 꺼내 잘 해동하여 다시 느낄 수 있게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비록 나중에 꺼내 먹는 감정의 맛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 감정이 냉동실에서 오래오래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별똥별을 본 불과 몇 시간 뒤인 00시 30분부터 위성 통신 장애로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았다. 영화에 나오는 클리셰처럼 내 소원이 신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통신 장애가 생겼고 절대자에게 전달된 소원이 이뤄지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망상하였다.     

 인터넷이 끊기자 거친 파도의 일렁임에도 동요하지 않던 선원들의 마음이 일렁였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주식이나 코인을 하는 사람들은 가격이 어떻게 널뛰기하는지 몰라 금단현상이라도 온 것처럼 초조해했다. 방안에 박혀 있던 사람들도 인터넷이 되지 않아 답답했는지 휴게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시절, 교토의 기숙사에서 거주할 때 여름에 태풍이 불면 전기가 끊겼다. 식당에 함께 모여 촛불을 켜고 불안과 불편을 느끼며 태풍과 정전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장난 삼아 기우제를 지낸 적이 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났다. 물론 선원들에게 인터넷 끊김은 태풍이나 폭풍 등 자연재해 이상의 재앙이었다.

 본선에서 통신을 담당하는 항통사는 선배들의 집요한 물음에 본선의 모뎀 문제나 위성 수신 문제일 거라고 대답했다. 수리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으며 본선 꼭대기에 있는 위성 안테나까지 만져가며 수리를 시도해 보았다고 한다. 와이파이 관련 질문을 하루에 수백 번은 받았는지 모뎀 이상이라고 게시판에 써 붙여 놓았다. 인터넷이 끊기자 밥 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오래 대화한다. 밥 먹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밥을 많이 먹는다. 잔반이 거의 남지 않아 정리하기는 수월하지만, 일을 마치는 시간이 늦어진다.      

 나도 우울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활동의 가장 큰 부분이 잘려 나간 기분이었다. 내가 별똥별을 보고 빌었던 소원이 이뤄질 만한 중요한 카톡이나 메일이 와있는데 그걸 보지 못해 기회가 날아가 버리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상상해 보았다.   

 점심 무렵 갑판부 선배와 배에 달린 위성의 통신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지금 A사 위성을 쓰고 있는데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지네! B사 위성으로 바꾸자 해야겠다. 너는 어디 통신사 쓰냐?”

“저는 알뜰폰 쓰는데요?”

선배는 약간의 조소 섞인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한다.

“알뜰폰? 하하하 그거 얼마나 아낄 수 있다고 그런 거 쓰는 거야?”

“작년에 밥 먹을 돈도 없을 때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바꿨습니다.”

 선배가 순간적으로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고민하는 듯 정색을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반년 전이었다면 혓바닥으로 만들어진 가시 박힌 채찍을 맨살에 맞은 듯 상처받아 눈물을 흘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어느새 내 마음은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해졌다. 알뜰폰으로 바꿔 한 달에 2만 원이라도 더 절약했던 내 과거가 전혀 부끄럽지 않아 나 또한 덧니를 보이며 어색한 미소로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와이파이가 끊긴 지 이틀 차 저녁, 가스장이 부원 식당에 찾아와 본선의 모뎀이 불량인 것 같다고 했다. 회사에 모뎀의 항공 배송을 신청해 보겠지만, 카타르에서 제때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즉 카타르에서 모뎀을 받지 못한다면 한국으로 되돌아오는 18일간은 계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틀 동안 인터넷을 못 쓴 것도 힘들었는데 과연 18일간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일도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가족이 걱정하지 않게 위성 전화를 한 통씩 쓰게 해 준다고 했다. 군대 훈련소 시절 전화를 한 통 사용하게 해 준 기억이 떠올랐다. 다행히 다음날 새벽에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승진 심사 결과 통보 전화를 기다리듯 초조하고 불안해하던 선원들은 다시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인도나 대만 쪽 항로를 지나 중동으로 들어가는 구간에서는 위성이 자주 끊긴다는 말을 하며 모두가 함께 역경을 헤쳐 나온 것처럼 서로를 칭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지구 평평설을 주장하는 갑판수는 이곳이 지구의 모서리이기 때문에 전파가 끊긴 거라고 말해 모두가 배꼽을 잡았다.

 나 역시 와이파이를 연결하며 벽돌이나 다를 바 없던 핸드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나 역시 심해에서 질식해 가던 중 산소마스크를 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몇의 나를 찾는 연락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내가 빌었던 소원이 갑자기 이뤄질 만한 연락은 오지 않았었다.           


칼을 간다는 것.     

인간은 정지할 수 없으며 정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현 상태로 머물지 아니하는 것이 인간이며 

현 상태로 있을 때, 그는 가치가 없다. 

-장 폴 사르트르     


 생명이 단축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전력을 다 할 때 ‘칼을 갈고 임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선배들에게 들은 귓동냥과 어깨너머로 칼 가는 법을 배웠다. 어설프게나마 샤프함을 유지하기 위해 칼을 가는데 ‘칼을 갈고 임한다.’라는 게 무슨 뜻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칼을 갈기 전 숫돌을 따듯한 물에 20분 정도 담근다. 숫돌에서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가 멈출 때 즈음 적셔진 숫돌을 꺼낸다. 칼의 단면을 고르고 부드럽게 갈아내기 위함이다. 숫돌 밑에 젖은 수건을 깔아 숫돌을 고정한다. 숫돌 위에 18도 각도로 칼을 눕힌다. 양손을 칼의 면 위에 두고 숫돌 위에서 칼을 당길 때 힘을 주고 올릴 때는 힘을 뺸다. 칼을 어금니 송곳니 앞니로 3분의 1씩 나눠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갈아내고 이후에 반대편도 갈아준다. 1000방짜리 거친 숫돌로 칼날을 얇게 눕히고 3000방짜리 부드러운 숫돌로 칼끝을 다듬고 칼날의 거친 부분을 마모시킴으로써 정리한다. 

 나는 손가락 끝이 쇠의 단면과 반복되어 마찰되는 느낌이 소름 끼친다. 칼에서 갈려 나온 쇠와 숫돌에서 갈려 나온 모래의 미세한 입자들이 손과 쇠 사이에 들어온다. 어깨 죽지와 귀 뒤가 간질간질하다. 그 느낌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지만 칼을 갈기 위해선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익숙해져야 한다. 지루한 수업시간에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처럼 집중하며 칼을 가는 건 쉽지 않다. 정신을 놓으면 손을 베기 십상이다. 칼을 갈 때도 정성이 필요하다. 칼의 양쪽 면 어느 한 부분도 날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된다.

 선배들이 칼을 갈 때의 일정한 리듬 소리는 음악 같기도 하다. 그 뒷모습은 더없이 경건하고 그들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롭다. 그렇게 완성된 칼은 재료 위를 길게 스쳐 지났을 뿐인데도 금방 도마에 닿아버린다. 반면 내가 칼을 갈 때는 일정한 리듬은 없고 다만 분투한다는 느낌만 난다. 나의 서툴고 거친 손길에 선배들은 누군가를 죽이려고 칼을 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천하제일의 명검도 칼을 갈지 않으면 결국 무뎌지기 마련이다. 반면 값싼 칼도 정성을 들여 갈면 오랫동안 날카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 사실 칼은 조금만 갈아도 날이 선다. 잘 갈려진  칼과 그렇지 않은 칼의 결과는 실전에서 드러난다. 칼이 끝날 부분만 갈려있으면 날이 금방 죽는다 하지만, 칼 면을 길게 갈아놓으면 날카로움은 오랫동안 유지된다. 칼을 간 후에는 두 가지 방법으로 날을 검사한다. 하나는 손톱을 살짝 긋거나 손가락 끝을 살짝 대보는 거다. 칼을 갈기 전에는 손톱에 깊게 파고들지 못하지만, 칼을 간 후에는 손톱에도 쉽게 길을 낼 수 있다. 손가락 끝으로 예리한 칼날을 슬쩍 누르면 삐끗하다가는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느낌이 난다.

 바쁠 때는 무뎌진 칼을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칼로 야스리(쇠스틱)를 친다. 진정한 고수는 야스리를 칠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물론 나는 칼 관리를 잘 못해서 일하는 중 칼이 무뎌지면 때때로 야스리를 친다. 야스리를 치면 칼에 상처가 생기며 조금씩 잘려나가고 금세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야스리는 칼을 다치게 하고 빨리 세워진 날은 빨리 무뎌지기 마련이다.

 40년 경력의 수석조리장이 썬 육고기의 단면은 수평선처럼 일정하다. 도마에는 씹힌 고기의 흔적이 없다. 반면 내가 썬 고기는 여기저기 씹힌 부분이 많다. 물론 칼의 차이보다야 칼솜씨 차이가 더 크겠지만, 그의 줄어든 칼을 보며 그가 얼마나 많이 칼을 갈아왔을지 짐작해 본다. 조리장은 그 칼을 10여 년간 사용했다고 한다. 10만 원도 주지 않고 산 칼인데 몸에 너무 익어 이제는 칼과 대화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동안 더 비싼 칼들도 많이 겪어봤지만, 아직까지도 이 칼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칼을 가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아직 나는 한 자루의 칼을 최선을 다해 갈아본 적이 없다. 나는 칼을 갈지 않고 대충 살아왔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도 한 자루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칼에 동시에 손을 댄다. 문제의 본질은 칼이 아니라 칼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신중히 관리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다. 제대로 갈려지지 않고 손에도 익지 않은 칼은 위기를 만났을 때 단칼에 썰어내지 못했고 결국 무딘 칼로 매번 야스리를 쳐가며 힘겹게 버텨나가고 있다.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그 깊이는 한결같이 얕았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현역으로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한 몇몇 친구들은 벌써 과장의 자리에 올랐다. 과장은 한 분야의 베테랑으로써 인정을 받는 경계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칼만 벌써 8년을 갈아왔다.

 다만 칼 가는 것에 정도는 없다. 칼마다 생김새와 경도, 용도가 다르고 조리사의 스타일마다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면 생선회를 뜨는 오로시용 사시미 칼의 날은 양면이 갈려있는 게 아닌 오른쪽만 갈려있다.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의 칼을 경험하였고 아직 만나지 못한 조종사라는 칼을 잡게 되면 그 칼만 일편단심으로 갈아나갈 생각이다.

 그날을 꿈꾸며 배에서 매일 밤 서툴게나마 칼을 갈고 있다. 지금 칼을 가는 법을 열심히 익혀 마침내 새 칼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그동안 갈고닦은 칼 가는 실력으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끝까지 연마해 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내가 스쳐 지나가며 망가지고 버린 칼들에 대한 경험은 반드시 나중에 만날 칼을 가는데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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