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히던 시절, 평소 지나친 시장의 과일 가게에 쌓여 있던 귤이 다르게 보였다.
전에는 그저 지나쳤을 뿐인 노란빛 귤더미가 그날따라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손에 쥐어본 귤의 무게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느껴졌고, 껍질을 벗기지 않았는데도 상큼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나도 모르게 귤이 든 바구니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이거 얼마예요?"
내 질문에 상인은 가격을 말했고, 옆에 있던 남편이 한마디 던졌다.
"너무 비싸니까 나중에 사자."
남편의 무심한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집에 돌아와 임신 테스트기를 들여다보며 두 줄을 확인했을 때, 이미 내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시장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날 남편의 모습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했던 그의 목소리, 표정, 심지어 옆에 서 있는 모습까지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우리는 이제 부모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왜 남편은 여전히 어제와 같은 모습인 걸까? 나만 변한 걸까?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나는 여전히 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남편의 표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내 마음을 알았을까? 한참을 말없이 걷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래도 조금만 살까? 자꾸 생각나서..."
남편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시장으로 향하는 우리. 그런데도 여전히 남편은 낯설게 느껴졌다. 임신을 알고 난 후, 같은 공간에 있어도 우리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귤을 가득 담은 검은 봉지 한아름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 앞 어딘가에 그 검은 봉지를 놓고 온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귤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들은 항상 이렇게 쉽게 사라졌다. 엄마의 존재, 아빠의 칭찬, 친구들과의 추억... 모두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곤 했다. 그 익숙한 상실감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부모가 될 자격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불쑥 솟아올랐다.
저녁이 되어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이웃인 듯한 사람이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이거 혹시 잃어버리신 건가요? 입구에 있길래..."
검은 봉지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토록 먹고 싶었던 귤을 손에 쥐고 있으니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찾긴 했는데... 갑자기 먹고 싶지 않아."
남편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임신이 그런 거지 뭐."
그때 나는 여유라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 몸의 변화, 감정의 기복, 그리고 옆에 있는 남편까지도.
어린 시절,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들은 항상 이렇게 기대와 달랐다. 얻고 나면 왜 항상 이렇게 허무한 걸까? 간절히 원했던 귤처럼, 내가 원했던 많은 것들은 결국 내 기대와 달랐다. 그리고 지금, 내가 부모가 되어간다는 사실도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밤, 베개에 머리를 묻고 생각했다. '내게 부족했던 것들을 내 아이에게는 줄 수 있을까? 나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결핍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우리가 '부모'가 되어가는 과정이 시작된 것은. 간절히 원했던 것을 놓치고 다시 찾았지만 기대와 다른 현실, 그리고 그 모든 낯섦 속에서 나는 천천히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겨울이 오면 여전히 귤향기가 콧속을 간지럽힌다. 그리고 그 향기 속에는 내가 처음 '부모로서의 나'를 만나기 시작했던 순간의 추억이 담겨 있다. 낯설고 혼란스러웠던 그때의 감정들이 지금은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제 우리 아이는 귤을 까서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가끔 아이에게 귤을 건네며 그날의 이야기 조각을 들려주곤 한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간직했던 결핍과 상처를 통해, 나는 부모가 되어 새로운 나를 만나고 있다. 아이는 아직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이 이야기가 아이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