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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뜨개로 만들어준 돌선물

by 부만나 Mar 15. 2025

낡은 앨범을 펼치면 항상 먼저 보게 되는 사진이 있다. 빨간 털실로 짠 원피스를 입고 동그란 사과머리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기. 바로 나의 돌사진이다.


"이건 네 엄마가 손수 떠준 거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뜨개질을 시작해서 돌잔치까지 딱 맞췄지."


아버지는 언제나 그 사진을 보며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밤늦게까지 뜨개바늘을 놓지 않았던 엄마. 한 코, 한 코 정성을 담아 만든 그 옷은 엄마의 사랑 자체였다. 선명한 빨간색과 귀여운 사과머리는 그 시절 내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냈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셔서 그 돌복에 관한 이야기를 엄마의 입으로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사진 속 빨간 원피스는 엄마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 중 하나였다. 실제 돌복은 오래전에 낡아 어딘가로 사라졌지만, 사진 속에서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수년 전 아이의 돌 때를 회상해 본다. 그 시절 유행이었던 돌앨범 만들기와 비디오 촬영을 하였다. 비록 나는 엄마처럼 손뜨개 원피스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딸아이의 돌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었다.


하나둘 돌복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스타일을 살펴보다 마음에 드는 세 벌을 선택했다. 남색 드레스와 작은 모자, 귀여운 멜빵 반바지, 그리고 봄꽃 무늬가 화사한 원피스. 엄마가 정성껏 만든 한 벌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나름대로의 정성을 담은 선택이었다.


촬영 당일, 아침부터 들뜬 마음으로 딸아이를 깨웠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짧은 단발머리가 더 돋보이도록 작은 핀으로 앞머리만 살짝 정리하고, 첫 번째 남색 드레스와 모자를 입혔다. 거울 앞에 선 딸아이의 모습이 마치 인형 같았다.


"우리 공주님,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딸아이는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진관으로 향하는 길, 차 안에서 딸아이는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신기한 듯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몇 번이나 미소 지었다.


"곧 도착할 거야. 오늘 정말 예쁜 사진 많이 찍자."


사진관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특별히 준비된 세트장에는 다양한 배경과 소품들이 가득했다. 첫 번째 촬영은 남색 드레스와 모자를 입고 진행됐다. 짧은 단발이 모자와 어우러져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두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히는 동안 딸아이는 조금 보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귀여운 멜빵 반바지로 갈아입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에 모두가 웃음 지었다.


마지막으로 봄꽃 무늬 원피스를 입히는 순간, 문득 내 돌사진 속 엄마가 손수 뜨개질로 만든 빨간 털실 원피스가 떠올랐다.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만큼은 같았다.


딸아이는 아기 모델처럼 사랑스러운 포즈를 계속 보여주었다. 마치 이 순간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기라도 하는 듯했다.


한 시간이 넘는 촬영 동안 행복했다. 딸아이의 다양한 표정, 움직임, 그리고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는 과정 자체가 소중했다. 특히 아이를 안고 함께 찍은 가족사진에서는 아버지가 보내준 내 어릴 적 가족사진과 오늘의 우리 가족사진이 이십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어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다. 그 평화로운 얼굴을 보며 생각해 본다.


'엄마, 오늘 저희 봤나요? 제가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일주일 후, 완성된 사진들을 받아보는 날이었다.


첫 페이지에는 남색 드레스와 모자를 쓴 딸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 옆에 나의 돌사진을 놓아 보았다. 빨간 털실 원피스를 입은 나와, 남색 드레스를 입은 내 딸. 사과머리를 한 나와, 짧은 단발의 내 딸. 시간을 뛰어넘어 마주 보는 두 사진.


사진과 함께 받은 비디오는 정말 보물이 되었다. 그 비디오를 하도 많이 돌려봐서 이제는 테이프가 늘어져 복원이 어렵다는 말까지 들었다. 아쉽지만, 그 순간들은 이미 내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딸아이의 첫걸음마처럼 어설픈 움직임,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까지. 영상이 사라져도 그 기억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앨범을 살펴보며 문득 생각했다. 엄마는 손뜨개로 정성껏 원피스를 만들어주었지만, 나는 비록 직접 만들지는 않았어도 정성을 담아 고른 옷들로 딸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구나. 방법은 달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같았다.


가끔은 내가 아이를 키우는 모습이 아이를 키우던 엄마의 모습과 겹쳐 보일 때가 있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모습처럼.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행복했던 촬영 시간은 이제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테이프는 늘어져도, 사진은 바래도, 그 순간의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선명하게 보인다. 카메라 앞에서 방긋 웃던 딸아이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 뒤로 아련하게 겹쳐지는, 30여 년 전 카메라 앞에 앉아있던 작은 나의 모습. 내가 20대였을 때의 일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아이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촬영 시간은 이제 영원히 남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언젠가 딸이 자라 자신의 돌사진을 보게 될 때, 그리고 또 언젠가 그 딸이 엄마가 되어 자신의 아이를 위한 돌을 준비할 때, 이 사랑의 연결고리는 계속 이어지겠지.


그것이 바로 '부모로 만나는 나'의 의미가 아닐까. 부모가 되어, 그리고 부모를 이해하며 발견하는 새로운 나 자신.


그 손뜨개 돌선물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마가 내게 건넨 사랑의 언어였고, 나는 그 언어를 딸에게 다시 건네고 있었다. 비록 내 손끝에서 실을 엮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짜 내려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언젠가 딸도 나처럼 자신의 아이를 품에 안고 이 순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엄마가 내게 건넨 사랑이, 이제 나를 거쳐 딸에게로, 그리고 다시 그 아이에게로 흘러갈 것이다.


나는 조용히 앨범을 덮었다. 사진 속 엄마의 손끝에서 시작된 사랑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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