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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박사 마이오스 Sep 29. 2024

베딕 점성학


베딕점성학에서 창조 신화는 어느 문화에서나 있는 천지창조 신화의 공통점인, 의인화된 조물주가 창조주의 의지대로 세상을 만들었다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다르다. 

베딕점성학은 그러한 단순한 스토리의 개념으로 우주의 탄생을 말하지 않는다. 

베딕신화는 천지창조의 신화부터가 우주를 순환적 개념의 무한 시간을 포괄하면서 심오하게 시작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시간은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직관적이면서 수학적이다. 그래서 인도 점성학은 시간에 대해서 강박적일 정도로 정확하고 철저하다. 

점성학을 단순하게 말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접하게 되는 환경을 통해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궁금증을 풀어주는 학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삶의 시간이라는 근원적인 철학적 물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근본적인 물음은 뒤로하고, 그저 나에게 닥치는 감각적 욕망의 해결책으로만 바라보게 되면, ‘’이라는 좋은 일과 ‘’이라는 언짢은 일, 그리고 ‘’라는 갑작스러운 재앙과 ‘’이라는 행복에만 시선을 빼앗기게 되고, 점성학을 술수적인 탐욕의 욕구 충족 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이러한 전반적인 인식이, 운명학이라는 분야가 현재 미신이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게 만든 결과에 대한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였다고 본다.

존재에 대한 질문은 시간의 철학과 함께하였다. 

존재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자의 공통된 관심사였으며, 철학적 고민이었다. 

과학의 등장으로 시간이란, 공간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임을 수학적 논리를 통해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를 말한다.’는 정의에 대해 최근까지 어느 누구도 부정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에 등장한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이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식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개념은 공간과는 무관하다. 즉, 시간이 따로, 공간이 따로다. 다시말해서, '시간이란 없다'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이해의 혼란이 온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본질을 고대 인도의 베다 경전에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 내용을 고대의 일부 베다의 현자들을 제외하고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했던 당시의 현자들 역시 자신은 이것을 이해했지만, 이 이해한 내용을 전달할 수단이나 방법이 딱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힌두 문명은 베단타 철학으로 그리고 부처는 ‘불립문자’라는 표현으로, 고대 동아시아의 현자 노자는 ‘말할 수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라는 형언 불가능한 자신의 답답한 입장만을 나타냈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경전에는 지금의 양자물리학적 표현을 정확히 하고 있다.

점성학에서 모든 설명은 행성과 하우스로 설명을 한다. 

우리는 날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수놓은 어두운 밤하늘의 존재감 있게 떠 있는 달을 보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행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크기는 어떤 특별한 설명이나 의미를 따로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점성학에서는 하우스가 가진 의미와 뜻이 점성학을 존재하게 하는 명확한 근거다. 

이러한 이유로 하우스에 관한 본질적 이해가 동반하지 않는 점성학은, 그저 살아있는 동안 내가 겪는 세상사를 설명하기 위한 술수학에 지나지 않으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목적을 위한 감각적 삶의 방편에 지나지 않다.

시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현재의 공간에서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인식을 쉬운 말로 내가 ‘안다’ 혹은 ‘알았다’를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오감을 통한 주체 감각이 감각적으로 객체인 사물을 지각했다는 의미를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인간은 인식했다고 하는가?

인식에 관한 철학적 물음은 사유의 역사와 함께한다. 

고대 그리스가 남긴 철학적 사유는 학문적으로 잘 정립이 되어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양의 황화 문명이나 인도의 인더스 문명처럼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진 고대 문명들의 인식에 관한 내용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카데미의 원조답게 인식론도 고대 그리스에서 학문으로 잘 정리하여 완성 시킨 사람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론은 대부분 여기서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쌓아 올린 학문적 업적은 위대하다.

황하 문명에서 인식에 관한 학문적 수준으로 정리한 사람은 고대 중국, 제자백가 시대의 '순자'라는 사람이다. 인식론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 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저서를 통해서 인식에 관한 개념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성악설의 원조로 알려진 것만 보아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인더스 문명이 남긴 인식에 관한 구체적 학문은 없다. 그러나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 자체가 인식론의 원류다. 

이 철학을 본류로, 상카라 철학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 너머의 초월적 인식마저도 포괄하는 차원이 다른 인식론을 말하였으며, 후대에는 현학적 주지주의까지 확장한다.

시간의 인식은 과학의 발전과 궤를 함께한다. 즉, 현대 이전의 고전 물리학이 지배했던 시대 시간에 대한 인식은 철저하게 시간과 분리할 수 없는 공간과 함께한다. 

고전 물리학의 시간에 관한 인식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이다. 

이 고전 인식론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에 철저히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반론을 제기한 것은 ‘이데아’라는 것이 인간의 감각적 지각을 바탕으로 하지 않기에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 이후 양자물리학의 등장은 시간에 관한 그동안의 인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즉, 시간은 공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는 공간, 공간이 없는 시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과학이란 인간을 이성적으로 설득 가능해야만 한다. 

그러나 아직은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여기서 멈춰버렸다.

우리는 이제 시간에 관한 인식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아야만 할 시점에 와 있다. 

다행히 우리 인류 문명은 시간에 관한 양자물리학적인 초월적 인식을 베단타 철학이 가지고 있었다. 

고대 인더스 문명의 아리아 현자들은 이 같은 초월적 인식을 설명한 수단이 언어 이외에는 없었기에 그들의 표현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설명은 길어지고 방법은 복잡해지면서 과학은 그들의 사유를 현학적인 주지주의로 치부해 버렸다.

역설적으로 과학의 급격한 발달이 베단타의 현학을 오히려 과학의 양지로 이끌고 있다.

베다의 한 지류인 베당카 조티샤 즉, 인도 점성학은 바로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세계에 포함되어 있다.

인도 점성학에서 시간은 하우스가 행성의 조합으로 나타낸 특성을 개인의 삶의 주기표인 '다사'와 '북티'라는 타임라인를 통해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인도 점성학의 시간은 우주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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