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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학박사 마이오스 Sep 29. 2024

인도 점성학의 철학적 의미


인도 점성학이 학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가르침과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점성학을 삶의 배움과 가르침으로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동안 점성학의 이미지는 딱히 곱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철학이 부재하고 길흉화복만 난무했기 때문이다. 

점성술을 굳이 점성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정작 학문적 근거나 학문이 가져다주는 설득력 있는 논리는 제공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자기만의 근거로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논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철학이다. 

어떤 학문이나 분야별 철학이 존재한다. 

철학의 조건은 최소한 인문적 성찰이 전제되어야 만 한다. 

근대에 부활한 서양 점성학은 어떤 인문적 성찰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쉽게 생각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도 점성학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는 심오한 베딕 철학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술수학적인 측면에만 몰두한 나머지 그 중요성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상식으로 판단할 때 점성학에서 굳이 철학적 가치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베다 철학과 연관된 세속적 존재에 관한 철학을 점성학이 설명하고 있다면 점성학에 관한 시야를 새롭게 제공해 줄 것이다.

점성학에 대한 대중적 욕구는 세상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유를 알고 동기를 파악해 세속적 해결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공급은 수요의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점성학에서 삶의 철학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철학적 답변도 필요 없었다.

개인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습득한 '선'과 '정의' 그리고 올바른 '도덕'이라는 가치가 현실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의 가치로 느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가르침들이 세속적인 현실에서는 공허한 구호처럼 들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 존재에 관한 베다 철학의 지류인 '베당카 조티샤' 즉, 인도 점성학은 현실적 존재를 관념적 구호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실현이라는 세속적 목적에서 어떻게 올바른 가치로 구현되는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물질적 기준이 전부인 철학적 가치관의 부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감각적 욕망이 제시하는 물질적 가치가 인간의 평가 기준으로 결정되고 그저 물질적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은 전부 쓰레기 취급을 하고 있는 이 현실에 냉엄하게 놓여있다. 

물질적 욕구의 충족은 악의 범주로, 형이상학적 도덕관념의 기준인 '정의'나 '관용', '박애' 같은 것들은 선이라는 이분법적인 기준으로 분류해 놓고 현실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삶의 선택을 강요하였다. 

이런 무의식적 강요는 박제된 철학적 도덕관념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죄책감만을 남기고 인간의 존엄한 개인의 가치를 스스로 내팽개치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현재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는 아노미 상태이며, 병리적으로는 거의 정신병의 수준에 와 있는 만든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태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철학적인 그 무언이 필요해 보인다. 

이 어지러운 현실을 정신과 의사가 그리고 심리 상담가의 상담이 순간의 공감을 줄지는 몰라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 자신만의 삶의 길을 자기 의지로 나갈 수 있게 해 주기에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오히려 복잡하고 파편적일 만큼 다양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이유가 삶의 긴 여정에서 길을 잃어버린, 아니 현재의 내 위치를 상실한 상태의 정신적 막연함과 공허함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오는 미래의 불안감이라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타나서 현재 내가 있는 위치라도 정확히 가르쳐 준다면 당장의 불안감만은 어느 정도 상쇄는 될 것 같다. 

더하여 내가 가야 할 가치관의 방향까지 알려준다면 더 이상 고마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현재의 나라는 존재는, 위치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능력이나 상태마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많다.

베다의 철학은 철저하게 존재에 관한 물음이다. 

바로 내가 위치한 현존재를 처절하게 사유하는 학문이다. 

대부분의 철학이 가진 한계는 실천성보다는 이론적이다는 것에 있다. 

아무리 훌륭한 논리적 이론도 현실과 괴리된 형이상학적 논증에 치우치면 공허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동양철학에서도 도덕적 형이상학을 현실의 형이하학을 통해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의 학문이 명리학이다. 

그러나 동양적 사유는 이상과 현실을 따로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 이유는 동양철학의 근간인 유학의 철학적 이념이 인간의 개인적 가치에 무게를 둔 현실적인 생활 철학이 아니라, 정치적 이상주의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지리적 특성이 만들어낸 문화적 특징이라고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말하고 있다. 

반면 서양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자연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그리고 사유의 전개는 이성제일주의에 치우쳐 있다. 

즉, 이성을 배제한 그 어떤 논증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성은 근거는 지식이며 논리다. 

그리고 그 지식은 생각이 만들어낸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은 자연주의 철학에서 출발했지만, 이성이라는 무기는 자연을 분석하고 학문이라는 객관적 지식의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 중에서 인식론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느끼는 지각이다. 

그러나 당시 그리스 시민들에게 공감이라는 면에서, 이 객관적인 지각이 얼마나 객관적인지는 의문이다. 

객관적인 지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충분히 객관적인 삶을 행동으로 살 수 있어야만 된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고대인도 아리아인들처럼 인생의 4가지 목표인 '다르마' '아르타' '까마' '목샤'라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균형잡힌 영적, 세속적 경험이 충분한 삶에서 나온 이야기가 그리스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리스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당시 그리스 시민권은 봉건시대 귀족에 해당하는 소수의 특권층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경제활동은 식민지와 그들의 노동력에 의지하였고 그리스 시민들은 경제적 자유라는 독점적이며 폐쇄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었기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철학적 사유가 가능했다. 

그들이 사유하는 철학적 지식은 자연주의 현상세계의 존재라는 지식의 범위를 넘을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이성만을 도구로 하기 때문에, 경험에 한정된 인간의 생물학적 인식의 한계 내에서만 확실하다. 

인더스 문명의 베다 철학은 존재라는 물음에 천착해 있었다. 

여기서 존재는 나라는 개체적 존재로 시작해서 우주 만물의 존재까지 포함해서 그 존재의 궁극적 근원까지 파고 들어간다. 

현상적 존재는 인간이 의식하는 감각적 인식의 범위 내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을 넘어서는 인식은 인간의 생물학적 인식 범위 밖을 말한다. 

다시 말해, 감각적 지각의 인식을 넘어서는 지각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그들의 윤회관이 함께한다. 

베단타 철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윤회는 그들의 문화적 관습이자 경험이 가져온 생활 철학이다. 

인더스 문명의 고대인들은 이러한 믿음을 단지 형이상학적인 이론적 철학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체득된 생활 속 경험이 가져온 공감 철학이다. 

즉, 그들은 윤회라는 관념을 이념이나 숭배가 아닌 현실의 삶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인간 존재에 관한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베단타 철학의 결정체인 우파니사드의 지혜는 신적인 정언명령과는 거리가 먼, 존재에 관한 끝없는 질문과 대답의 이야기 형식을 띠고 있다. 

형이상학적 내용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은 각 개인의 깨달음이라는 최종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으며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러한 형태는 부처의 가르침과 방법적인 면에서는 똑같다. 

개인적으로 더 매력적인 것은 베다의 한 부류인 베당카 조티샤라는 베딕 점성학이 그들의 생활 철학과 더불어 현재 내가 존재하는 현실을 철학적 무게로 설명하고 있다.

 베딕 점성학에서 그들은 현실의 길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인생이라는 삶에 있어서 '베당카 조티샤'가 알려주는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철저하게 믿고 따르기 때문에 현생의 내 위치를 잃고 방황하는 일은 없다. 

'베당카 조티샤'라는 인생의 지도책은 베다 경전이라는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출처에서 나온 것이고, 내비게이션에 표시된 내 현생의 위치는 그들이 삶의 철학에서 인생을 아슈라마라고 하는 4가지(다르마, 아르타, 까마, 목샤)의 삶의 목표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 제시를 지표로 삼은 일상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인도인들은 삶이라는 철학에서 방황하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회적 가치 추구는 다르마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인 욕구도 무시하지 않기에 아르따와 까마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도 충족되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목샤라는 영적 추구의 가치를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써야 할 행위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선이란 정해진 도덕적 이념 구호도 아니며, 신적인 정언명령도 아니다. 

4가지 삶의 목표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다. 반대로 이 4가지 삶의 목표의 부조화를, 굳이 정의하자면 '악'으로 볼 수 있다

다르마

베다 문학 사상에서 발전한 관습과 윤리, 법과 의무, 정의 등과 같은 의미이며, 우주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로써 힌두교에서는 윤회와 관계된 행위 규범이지만, 불교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아르타

경제적 안녕을 뜻하는 리(利)와 같은 의미로, 베다 철학은 부에 관해 편견을 가지는 동양 철학이나 기독교적 윤리와는, 다르게 경제적 풍요를 인생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중요한 하나의 목적으로 보았다.

까마

생물학적 또는 문화적 만족감을 주는 인간의 욕망(愛)을 말하는 것으로, 베다 철학은 인간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할 삶의 중요한 하나의 목표로 보았다.

목샤

해탈이나 열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박이나 장애로부터 벗어난 해방이나 자유를 의미하지만 열반은 번뇌의 불을 끈다는 정신적 수행의 상태를 말한다. 힌두 문화의 베딕 점성학에서는 자기실현이나 절대적 실체를 인식하는 자기반성을 통해서 다음 생의 윤회를 준비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를 말한다.

인도 점성학에서는 인간의 탄생을 존재론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엄마의 자궁을 통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인  ‘자나르다나’라는 비슈누 화신의 이름이 ‘인간을 자극하고 두려움과 걱정을 일으키는 이’라는 뜻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감각적 지각을 말한다.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물리적으로 지각한다는 것이다. 

베단타 철학의 우주적 존재에 관한 인식을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아(지바라고도 부르는 실존적 객체)의 주관적인 인식 주체가 개아인데, 이때 개아는 '마야'라는 현상의 객체에 인식 주체가 얽매여 있는 상태다. (마야 :  감각적 지각으로 현실의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우주라는 환영의 장막에 가려서 우주 너머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장막의 세계를 실재라고 믿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감각적 지각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생물학적인 지각을 통해 인식하고 의식을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개인의 의식을 '자의식'이라고 말하는데, 인간 개인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상대적 자기 가치이며 자신만의 절대 가치로 여기는 일종의 자기애를 말한다.

반면 감각적 지각에만 의존하지 않는 감각질과 같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는 차별적이고 주관적 인식 방법을 통해 얻는 구원된 자아를 명아라고 한다. 

이때 명아는, 감각적 지각의 인식 형태를 마야라고 보고, 이 마야라는 현상적 인식 객체를 벗어나 감각적 인식 너머의 초월적 인식 상태인 '브라만'과 합일된 자아를 말한다.  

인도 철학은 자아가 개아로부터 명아로 인도될 수 있는 방법적 과정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명아 : 인식의 전환을 통해 감각적 지각 너머의 초월적 지각으로만 알 수 있는 영적 근원)

완벽한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칭하고, '아트만'이 '명아'로 안착하여 범아(브라만과 아트만) 일체’가 되었을 때 해탈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우파니사드에서는 그 자아의 여정을 4단계로 나누어진 꿈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일명 개아는 꿈의 초기 상태인 몽면을 비유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의 4번째 단계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트만이라는 현상을 초월한 브라만과 합일하여 하나 된 의식이 없는 전지전능, 만유의 근원이 된 의식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 단계는 의식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지, 해탈과 같은 결론적으로 종결된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의 단계별 분류도 이와 같이 방법적인 면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베딕 점성학에서 인식론적 체계는 까마와 아르따는 개아로 볼 수가 있으며, 다르마와 목샤는 명아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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