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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덩이 Apr 05. 2023

은행을 그만두기로 했다 1

퇴사의 이유

시작부터 그만둘 생각은 있었다


첫 지점에 배정받고 실무를 했을 때부터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연수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언젠가는 잘 맞을 일이라 나를 다독였다. 심지어 내가 스티커 붙이고 도장 찍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가 은행원에 제격일 것이라 세뇌시켰다. 실제로 통장이 찍히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다. 찌지직찌지직. 짱구는 못 말려에 유리가 말하는 리얼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도장 찍고 스티커 붙이고 고객에게 통장 교부하고. 듣기만 해도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통장 신규와 이월 업무는 내가 대출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제일 좋아하는 일이었다. 고객과 얘기하지 않고 찌지직찌지직 소리와 함께 휴식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은행을 그만두기로 한 이유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절반뿐이었다. 나를 로봇이나 사기꾼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활한 사기꾼들 무리 중 제일 만만한 말단으로 봤다. 모두가 그러진 않았지만 절반 정도는 사기를 당하지 않을 거란 다짐으로 나를 대했다. 개인 대출 업무. 말만 들어도 무서운 분야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 사람이 이자를 불려 고리대금을 받지 않을까, 더 좋은 선택지가 있음에도 본인에게 실적되는 상품으로 유인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도 의심과 실제는 다르다. 보통은 본인의 의심을 현실화해서 나를 사기꾼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반말을 하신다. 처음에는 잘 얘기하다가도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윽박을 지르신다. 모바일 서비스로 도와드릴 때도 모르겠으니 대신해 달라며 핸드폰을 던지는 일도 많다. 직원이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라 설명드려도 잘 듣지 않으신다. 그리고 분노가 동작으로 드러나는 때가 많다. 술에 취하신 분들은 앞에 있는 직원에게 욕을 하며 화풀이를 하고 본인이 예전에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이었는지를 얘기한다. 명함을 던지거나 종이를 찢고 다 들리게 혼잣말을 한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오히려 이런 단순한 불만이 나을 때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조용히 있다가 뒤에서 민원을 넣는 때가 있다. 절반 이상은 이해가 안 되는 단순 민원이다. 예를 들어 말을 싹수없게 한다, 마스크 안에서 비웃었다 식이다. 결국에 다 나에게 안 좋게 돌아올 것을 아는데 그 어떤 직원이 고객을 대충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는 잘 안 한다. 그래도 이 민원을 취하시키기 위해 우리는 사과를 한다. 사실 관계를 떠나서 그렇게 느꼈으면 죄송하다 고개를 굽히고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면 들어줄 때도 많다.


사과는 일상이다. 내가 잘했든 못했든, 아니면 정말 잘못했든 간에 사과는 매일 한다. 일처리를 잘해도 고객이 꼬투리를 잡으면 사과해야지 별 수 있나. 그렇게 죄송해요 라는 말은 입에 익고 잠꼬대까지 하게 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잘 때 죄송해요를 남발하는 것을 보고 혼자 속을 끓이셨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민원이 무서워서인데 이 얘기는 나중에 더 풀겠다.


"아가씨" 또는 "저기요"라고 나를 칭하는 경우도 많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싶겠지만 정말 있더라. 참고로 창구에는 탁자형 명패와 태블릿에 각각 내 이름과 직급이 대문짝만 하게 나와있다. 나는 그냥 창구 뒤에 있는 아무개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아무개는 그 고객의 일을 하기 위해 10시까지 야근을 한다. 웃기는 경우다. 그나마 유니폼이 없어지고 나이가 분별이 안 되게 되면서 조금 나아졌다. 일부러 그래서 어린 직원들은 나이 들어 보이게 머리를 염색하거나 옷을 중후하게 입는다.


특정 기업 아래층에 위치한 지점에는 가끔 그 기업에 직급 높은 사람이 오는 때가 있다. 그러면 어린 행원이 마치 본인 기업의 신입사원인 양 대한다. 커피 심부름을 시킨다든지, 사람이 바뀌었는데 왜 위층으로 인사를 안 오냐 라든지. 심지어 신입행원이 혹여 통장 스티커를 잘못 붙이면 당사자가 아닌 은행 선임에게 가서 화를 낸다. 이 직원 똑바로 가르치라고. 이중으로 혼나는 셈이다. 아, 본인보다 어린 행원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게 인간이 아닌 아무개, 그것도 사기꾼 아무개로 지내다 보면 나 자신이 어디까지 작아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점점 작아져서 점이 되고 그것이 일상이 될 때까지. 고객은 왕이고 나는 하인이 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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