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
안산만 가면 타임슬립을 한 것만 같았다.
연수원이 있던 안산은 지금 생각해 봐도 1990년대 같다. 우리 모두 잔머리 하나 삐져나오지 않는 쪽머리에 유니폼과 검정 뾰족구두를 신었다. 앞머리는 올려야 했고 뒷머리도 U핀으로 돌돌 말아야 했으며, 무스나 스프레이로 딴딴하게 고정시켜야 했다. 스타킹 색깔은 살색, 네일은 칠하면 안 됐고 귀걸이나 화장에도 제약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이해할만했다.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지만 단정해야 하는 서비스직이니 군기가 바싹 들었던 신입사원으로서는 굳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교실 안에서는 운동화 말고 실내화를 신어야 했으며 식당에서는 머리를 꼭 묶어야 했다. 명찰은 잘 때 말고는 항상 착용해야 했고 핸드폰은 전부 압수였다. 교복처럼 파랑셔츠 두 장을 주고서는 수업 중에는 이 옷만 입어야 한다 강요했다. 때는 푹푹 찌는 7월이었다. 에어컨은 가끔 고장 나서 20대 중후반, 많게는 30대 초반인 사원들은 셔츠 두 장을 돌려 입기 위해 때 아닌 세탁기 경쟁을 벌여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시에는 벌점을 받았다. 성인을 대상으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실제로 나는 식당에서 머리를 묶지 않아서, 내 친구는 잠시 숙소에 명찰을 두고 나와서 경고를 받았다.
아침 6시 반에는 기숙사에 가요를 틀어줬다. 우리는 마른세수만 하고 나와 운동장을 뛰고 들어가 1시간 만에 씻고 수업준비까지 마쳐야 했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은 반납이다. 가끔은 은행에서 직원들이 나와 강의를 하는데 이른 기상으로 조는 신입사원들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경고를 받았다. 인재개발부 사원들은 어깨를 툭툭 치거나 옆에 있는 사원들 보고 깨우라 그런다. 그러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뒤로 나가 서있는다. 뒤에 서있는 인원수가 많아서도 안 된다. 당신의 강의가 졸리다는 뜻이므로 뒤에 너무 많은 사람이 서있으면 인재개발부 사원들은 졸리지 않은 사원들 보고 들어가라 눈치를 준다. 연수기간 후반쯤에는 반장이 강의 중 잠시 졸았는데 사원이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 오빠는 나이가 20대 후반이었다. 20대 후반에 상사에게 졸았다고 뒤통수를 맞는다라... 여기는 군대가 아니다. 학교도 아니고 교정시설은 더욱이 아니다. 그 어디서도 폭력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두 달이었던 연수원 기간 중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두 달 중 두 번의 주말을 외부에서 보냈다. 나머지는 안산에 콕 박혀있어야만 했다. 외부에서 보냈던 두 번째 주말이 끝나고 강당으로 모였는데 인재개발부 사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캐리어를 끌고 온 우리들에게 강당 벽에 붙어 서서 각자의 캐리어를 열라고 시켰다. 여성 사원들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뾰족구두를 신고 서있어야 했다. 발가락이 아프고 피가 통하지 지 않았다. 기분 좋게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과 주말을 보내고 들어온 결과가 벌서기라니.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술을 들여와서 그렇다, 게임을 들여와서 그렇다는 말들이 오갔지만 인재개발부는 그 정확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캐리어를 열고 강당 벽에 붙어 서서 다른 사원들이 우리 짐을 뒤지기만을 순서대로 기다렸다.
이 모든 일은 2018년에 일어났다. 다들 대학을 졸업한 건실한 청년들이었다. 서류와 인적성, 면접을 통해 붙은 인재들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여태껏 속했던 단체들 중 사람들이 가장 성격이 순했다. 엇나가거나 일탈하는 사람들 없이 다들 이 조직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고 연수에 임했다. 그러나 두 달 후 모두는 가슴속에 품었던 프라이드를 잃고 회의감만을 얻고 나갔다. 득 보다 실이 많은 연수였다. 타사의 연수를 보면 모두가 회사에 대한 소속감을 얻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았던가. 굳이 꼽자면 비상식적인 규율 속에서 같이 구른 안쓰러움에서 오는 동지애일 것이다. 그것만은 남았어야 했다.